<2레벨로 회귀한 무신 411화>
어비스의 주인과 싸워 본 경험은, 인류 멸망 시나리오 때의 것도 카운트하면 이번이 3번째.
그때는 압도적으로 강했던 거인이었지만, 성지한도 그 시절에 비하면 상당히 발전한 상태였다.
다만.
[시간을 오래 끌진 않겠다.]
상대도, 그때처럼 수동적이진 않았다.
스스스…….
공허의 기운이 자욱하게 깔리더니,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공간.
인류 멸망 시나리오 때 인류를 완전히 없앴던 저 일그러짐은.
예전보다 더 정교하게 성지한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나를 흡수하려고 드는군.’
동방삭이 태극을 부여해서 그런지, 예전엔 성지한의 신체를 모두 갈아 버릴 기세였다면.
이번엔 일그러짐 속에서 그를 빨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려는 망혼.
이 공격에 대해선, 성지한도 이미 대처법이 있었다.
혼원신공混元神功
멸신결滅神訣
만귀봉신萬鬼封神
검을 주변으로, 퍼지기 시작하는 만귀봉신의 문양.
그것은 마치 거대한 방패처럼 성지한의 앞을 가로막으면서, 거세게 가해지는 공격을 모조리 차단했다.
[성가시군.]
번뜩!
거인의 몸에 박힌 수천 개의 눈에서 붉은빛이 반짝이자.
치이이이익……!
만귀봉신의 문양이 가로와 세로로 베이며, 중앙부가 일점으로 꿰뚫렸다.
“이건…… 삼재무극인가. 동시에 펼쳤군.”
횡소천군과 태산압정, 선인지로까지.
태극의 망혼은 기본공 삼재무극을 공허를 사용하여 동시에 펼쳐 내고 있었다.
[나도 무명신공을 이었으니까.]
“무명신공이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 너희 중 그 누구도, 이름을 밝히진 못했나?”
[넌, 알아냈다는 건가?]
성지한의 말에 잠시 망혼의 공세가 멈추자.
스으으으…….
만귀봉신은 금방 원래대로 재생했다.
“난 알지.”
[뭐지? 무명신공의 진짜 이름이. 매번 죽기 전에 궁금하던 것 중 하나였다.]
“이름을 알려 주는 건 어렵지 않다만, 내 궁금증도 풀어 주었으면 좋겠군.”
[뭘 알고 싶나?]
“누나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방법. 내가 이기고 네가 소멸하면 자동으로 풀리냐?”
누나를 저렇게 석상 상태로 계속 둘 수는 없는 노릇.
그녀를 풀어 주지 않던 게 어비스의 주인이었으니, 성지한은 그에게 저 상태를 풀 방도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
성지한의 말에 잠시 멈칫하던 태극의 망혼은.
[누나를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선, 열쇠가 필요하다. 이것 말이지.]
펑!
거인의 가슴에 박힌 눈이 하나 터지더니, 거기에 보랏빛의 열쇠가 대신 자리했다.
저게 석상의 몸을 옥죄고 있던, 사슬의 자물쇠를 풀 열쇠인가.
[나를 이기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그럼 바로 승부를 보면 되겠군.”
[하나 그렇게 되면 누나가 성좌에서 다이아 서포터로 강등하게 될 것이다. 다른 세계에서 정착하기 전까지는, 공허의 마녀로서 지닌 힘이 필요해.]
“이세계는 어차피 물 건너갔잖아? 그러면 누나한테 사람 몸 찾아 줘야지.”
[그 판단이 너와 나의 결정적인 차이다.]
성지한과 합세하면, 이세계로 탈출할 수 있을 거라는 망혼과.
이 일은 이제 불가능하다고 확신하는 성지한.
둘은 서로를 감정적으로 적대하진 않았지만, 입장 차가 워낙에 명확했다.
[그래서, 무공 이름은 뭐지?]
무명신공의 이름을 밝히면, 그의 무공도 강해지려나.
성지한은 잠시 정보만 빼먹고 안 가르쳐 줄까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됐다.’
또 다른 나는 열쇠까지 띄워 놓고 있는데,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혼원신공이다.”
[혼원이라…… 그런 이름이었나?]
의문이 풀린 듯, 공세를 가속화하는 망혼.
치이이익!
방패 역할을 하는 만귀봉신에는 점차로 금이 커지고.
성지한의 몸도, 공간의 일그러짐 속으로 서서히 들어가려 했다.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지 않으면, 결국 흡수당하겠군…….’
아무리 성지한이 성장했다고 해도, 망혼과는 지닌 힘의 차이는 상당했다.
그가 지금 자신을 집어삼키려고 드는 게 아니라, 소멸시키는 게 목적이었다면.
지금보다 더 강렬한 파상공세에 확실히 데미지를 입었을 터.
‘나를 흡수하려고 들 때, 타격을 입혀야겠어.’
그러려면, 전력을 다해야겠지.
성지한은 배틀튜브를 켰다.
그러자.
-오 챌린저 리그 게임 시작하는 건가?
-이번이 처음 아님? ㅎㅎ
-응? 근데…… 이거 인게임 아닌 거 같은데?
챌린저 리그로 올라간 성지한이 드디어 게임을 실행하는구나 싶어서 신나게 들어온 시청자들은.
-……저 거인 어디서 보지 않았음?
-저, 저거 인류 멸망 시나리오 때의 거인이잖아?!
-그때보단 좀 작은 크기 같은데…….
-그래도 생긴 건 똑같은데?? ㅡㅡ
-공간도 요상하게 일그러지고 있음 그때처럼.
성지한의 상대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분위기가 대번에 심각해졌다.
인류가 브론즈 리그 강등전을 이겨 냈음에도 종말을 야기한, 평양 어비스의 주인.
그가 화면 속에서 거대한 존재감을 내보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오…… 이건 저번에 봤던 적이네.
-저 괴물이랑 벌써 맞붙는다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그때처럼 멍하니 있는 것도 아닌데…… 이거, 승패가 금방 갈리겠어.
-아, 안 되는데…… 인류 종족에 베팅 좀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멸망하면 어떻게 해?
외계의 시청자들도 방송 ON 상태를 보고 대거 유입되자.
[스타 버프가 활성화됩니다.]
모든 능력이 100% 증가하는, 강력한 버프가 활성화되었다.
그러자, 조금 전 속절없이 잘리던 만귀봉신이 금방 회복하고.
공간의 일그러짐은, 더 확장되지 못하고 성지한에게 영역을 내주고 있었다.
그리고.
번뜩!
[너, 설마 배틀튜브를 틀었나…….]
“어. 능력 버프 좀 받아야지.”
[……실망이구나.]
성지한의 배틀튜브 ON에, 지금까지 싸우긴 해도 적대적이진 않았던 망혼이.
처음으로 모든 눈에서, 그에게 살기를 내보였다.
[배틀튜브로 우리의 전투를 생중계하면, 차후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
망혼이 말하는 차후의 계획이야 당연히.
성지한을 흡수한 후, 그 힘으로 윤세아와 성지아를 데리고 탈출하겠다는 거겠지.
한데 이 전투를 배틀튜브를 통해서 생중계하면, 이 일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나, 그거야 저쪽의 사정일 뿐.
“그래서 버프 포기하라고?”
성지한은 능력치 100% 증폭 효과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탈출은 불가능해졌으니까.’
인류가 적색의 관리자라고 의심받고.
이를 공허 측에서도 알아챘는지, 탈출하지 못하게 제재를 가하고 있는 이 상황에선.
성지한이 얌전히 망혼과 합쳐서, 이세계로 도피하려고 해도 저들의 추격을 뿌리치긴 힘들었다.
‘탈출 가능성이 보였으면 합세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불발된 이상, 내가 상황을 주도해야 해. 여기선 모든 힘을 동원해서라도, 망혼을 제압한다.’
그러기 위해선 필수적인 스타 버프었으니, 배틀튜브는 꼭 켜야 했다.
하지만.
[……버프. 허, 결국 감이니 뭐니 해도.]
성지한의 말을 들은 망혼은 그에게 크게 실망하고.
[자기가 살기 위해서 버텼던 건가.]
더 나아가 강렬한 살의를 내보였다.
[……일을 그르치기 전에, 그 방송. 더 틀지 못하도록 해 주지.]
스스스스…….
공간의 일그러짐이 더욱 가속화되고.
어비스의 공간 내부가, 종이 구겨지듯 접혀지기 시작했다.
[일단 죽어라. 흡수는 그 후에 하겠다.]
찌이이익……!
본격적으로 압박해 오기 시작하는 망혼.
성지한은 그런 그를 마주하며, 묵묵히 반가면을 썼다.
그러자, 증폭하는 공허.
‘흡수는, 너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성화를 떠올린 그는, 태극의 망혼에게 먼저 나아갔다.
* * *
배틀튜브가 켜진 지, 1시간째.
-와…… 이거 실제 상황이지?
-성지한 몸 저렇게 터져 나가는 거 처음 보는 거 같은데…….
-거인도 재생력 장난 아니네.
붉은 눈의 거인과 성지한의 격돌은, 방송이 시작된 지 1시간밖에 흐르지 않았음에도 전 인류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물론 원래도 성지한의 방송은, 가장 주목도가 높긴 했지만.
지금 그의 전투는 평소보다도 훨씬 더 많은 시청자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서 성지한 지면 인류 멸망임? ㄷㄷㄷㄷ
-에이, 설마…… ㅡㅡ
-설마로 치부할 문제냐 ㅋㅋㅋㅋ 지금 이게 우리의 마지막 배틀튜브 방송일지도 모름…….
성지한의 상대가 인류 멸망 시나리오의 보스로 악명 높았던 어비스의 주인이었기에.
현 상황이 사람들로선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거인의 눈알에서 붉은빛이 번뜩이더니.
치이이익……!
거기서 강렬한 레이저가 뿜어져 나오자.
성지한의 팔이 이를 버티는 듯싶다가 잘려 나갔다.
-아! 서, 성지한 팔 또 날아갔어!
-휴 그래도 금방 재생함…….
-햐 씨 저 거인 저번이랑 달리 완전 필사적으로 싸운다…….
몇 번이고, 서로가 박살 나고 재생하고를 반복하는 전투.
하나 몸뚱아리의 차이가 워낙 커서, 거인은 몇 군데가 터져도 재생하면 그렇게 티가 안 나는 데 반해.
성지한의 몸은 어디 한군데가 폭발하면, 티가 확 났다.
콰쾅!
‘또, 터졌군.’
성지한은 상대의 폭발 공격에 터진 오른쪽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형체조차 알 수 없이 사라져 버린 다리.
하나.
스으으으…….
영원을 잔뜩 품은 내부의 세계수가 활성화되자, 사라졌던 신체는 금방 재생이 되었다.
그간 영원의 능력이 향상해서 그런가.
사라지면 거의 동시에 원래대로 돌아올 정도로, 엄청난 재생력을 얻게 된 성지한.
태극의 망혼은 이를 보면서 질린 듯 말했다.
[너…… 재생력이 뛰어나도 너무 뛰어나군. 설마 엘프로 전향한 거냐? 이그드라실에게 넘어가서?]
“넘어가긴. 그냥 걔네 능력도 얻었을 뿐이지.”
[……허.]
“그러는 너도.”
펑! 펑!
성지한의 검이 한 줄기 궤적을 그리자, 일제히 터져 나가는 거인의 눈과 몸뚱어리.
하나 그렇게 사라진 거인의 신체에선.
스으으으…….
영체가 나와 사라진 부위를 감싸더니, 곧 몸을 수복했다.
“재생력은 끔찍할 정도군.”
[그래. 네 공격은 소용없다.]
성지한은 멀쩡한 상태인 거인을 보며, 저번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시스템은 어비스의 주인의 약점이, 머리라고 했지.
‘몇 번이고 저길 노려 보았지만, 소용없었지.’
미션에서의 수동적인 어비스의 주인과는 달리.
또 다른 성지한이 장악한 거인은 머리를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서로가 자잘한 출혈만 입힐 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지는 못한 채 지나간 1시간.
-힘들겠는데 이거.
-관리자의 손도 장악한 그가, 어비스의 주인 하나도 못 이겨 낸다고?
-참…… 배틀넷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SPACEBET134413*&*$에서 지금 사설 베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얼른 들어와서 이 전투의 승자가 누가 될지 걸어 보세요~~~!!
-헐…… 사설베팅업체에서 다룰 정도임? 이 채널 주인이?
-난 성지한에게 건다. 이놈은 매번 벌어 주더라고.
-눈 어따 둠? 당연히 거인한테 걸어야지;
-그러니까 딱 보면 모르나?
외계인들은 이미 태극의 망혼 쪽으로 승부의 추가 기울어졌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하나 정작 태극의 망혼은.
스으으으…….
거세게 끌어올렸던 기세를 가라앉히고 있었다.
[이대로면, 끝이 안 나겠군. 그것을 꺼내기 전까지는.]
“그것이라면.”
[태극마검.]
스으으으…….
거인의 눈이 일제히 돌아가며, 태극을 그렸다.
[하나 이걸 꺼내면, 모든 것이 붕괴된다…… 내가 흡수하려는 너도, 흔적조차 남지 않겠지.]
“그러겠지.”
[……정말 그런 끝을 보고 싶은가? 태극마검이 발동하면, 누가 이기든 우리는 결국 패배자가 된다.]
상대 입장에서야, 태극마검을 꺼내면 전리품이 사라지는 셈이니.
결국 힘만 쓰고 아무것도 못 얻는 꼴이다.
성지한이 물끄러미 망혼을 바라보자, 그가 말문을 이어 나갔다.
[너의 계획은 어떤 것인가.]
“왜, 협조라도 해 주려고?”
[경우에 따라서는. 태극마검을 한 번 발동하면, 모든 것이 파멸되니까. 둘 다 죽느니, 하나가 가져가는 게 그나마 낫겠지…….]
결국 둘 다 잃는 전투를 하느니, 성지한의 계획을 듣겠다는 건가.
‘나는 나네. 확실히.’
성지한은 그리 생각하면서, 현재의 대치를 유지하는 대신 대화를 해 보려 했지만.
[……아니, 잠깐.]
위이이잉……!
거인의 눈에서 그려지던 태극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