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벨로 회귀한 무신 408화>
이그드라실이 적색의 관리자를 도와줬다니.
성지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구에 세계수가 있던 거랑 관련이 있었나.’
[맞아요. 제가 도와주었죠!]
지이이잉.
성지한의 눈앞에, 하나의 화면이 나타났다.
피라미드 구조를 형상화한 그것은.
맨 위에 관리자가 있었고.
아래에는 수많은 대성좌와, 그 아래에는 성좌들이 포진했다.
성좌들의 피라미드 구조에서, 관리자는 완벽히 정점이었다.
[보다시피 관리자는 배틀넷의 정점이지만…… 위에는 또 위가 있었습니다.]
툭.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피라미드의 구조 위에 하나의 칸이 더 생성되었다.
상시 관리자 칸이었다.
[흑과 백, 상시 관리자가 가진 권력은 임기제 관리자를 월등히 상회했죠. 사실상 임기제 관리자는 상시 관리자가 귀찮아하는 잡무나 처리하는 수준…… 적색의 관리자와 저는 더 위로 올라가려 했습니다.]
‘임기제에서, 상시로 말인가.’
[맞아요. 특히 임기가 저보다 더 빨리 끝나 가는 적색의 관리자는 상황이 급했죠. 그래서 그는 저에게, 비밀리에 제안을 했습니다. 상시 관리자가 되기 위해서 서로 협력하자구요.]
‘욕심이 참 끝이 없군. 배틀넷에서 2등까지 올랐는데 기어코 1등에 올라가고 싶은 건가.’
[그런 마음가짐 때문에 2등까지라도 올라온 거랍니다. 살아 있는 한, 계속 위로 올라가야죠.]
배틀넷 세계의 2등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야망이 철철 넘쳐흐르는 이그드라실.
적색의 관리자도, 이런 마인드였나.
‘……그래. 네 향상심은 그렇다 치고. 인류가 적색의 관리자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적색의 관리자는 저랑 달리 임기가 끝나 가고 있었죠. 그래서 그는 흑백의 관리자의 감시망에 걸리지 않는, 최하급 종족 속으로 숨으려 했습니다.]
배틀넷의 대다수를 차지한다는 최하급 종족.
흑백의 관리자는 효율성을 위해, 이들을 감시하지 않는다고 했지.
그 맹점을 이용하여, 적색의 관리자는 최하급 종족 속에 숨어 힘을 기르려 했던 건가.
‘하지만 어떻게 인류 종족이 관리자가 될 수 있지?’
[자세한 방법까진 저도 모르죠. 제가 제공한 건 세계수와 지구 행성, 그리고 엘프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최하급 종족 자체에 숨으려고 했던 건 이미 파악하고 있었어요. 거기에 인류에게 종족의 진화 한계가 없다고 했을 때부터 이 종족이구나 싶었죠. 그건 제대로 ‘설계’된 종족이 아니고선 나올 수 없는 결과거든요.]
성지한은 적의 일족이 길가메시를 실험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때 행했던 적의 일족의 실험이, 사실은 적색의 관리자를 인류에 놓는 과정이었던 건가.
‘……그럼 길가메시가 적색의 관리자야?’
성지한은 잠시 그렇게 의문을 지녔으나, 금방 아닐 거라고 판단 내렸다.
그가 적색의 관리자라고 하기에는, 영 무게감이 없었으니까.
‘네 말이 사실이라면, 적의 일족이나 인류나 다 같이 적색의 관리자의 것인데…… 왜 인류가 적의 일족을 친 거지?’
[적의 일족…… 그 종족은 인류를 완성한 것만 해도 쓰임새가 다 했으니 폐기처분 한 거겠죠.]
‘자신의 동족을 정리했단 말인가?’
[동족이라니. 그들은 단지 관리자의 수단일 뿐이죠. 쓸모가 없으면 정리해야 한답니다.]
관리자가 되면 다 저러는 건가.
출신 종족에게도 가차 없군.
‘그는 단지 숨으려고 인류 속에 들어가는 걸 택한 것인가?’
[그럴 리가요. 그럴 거면 진화 한계를 없애도록 설계하진 않았겠죠. 저는, 그의 계획을 대강 알 것 같아요.]
‘그래?’
[네. 제가 하나하나 알려 줄게요.]
그러면서 맨 처음, 무신의 별 투성을 화면에 띄우는 이그드라실.
[제가 판단한 바로는, 적색의 관리자가 사용할 카드는 두 장이에요. 하나는 무신.]
이그드라실이 처음 띄운 피라미드에서, 무신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의 위치는 상층부.
관리자 아래, 대성좌의 이름이 쓰여 있는 칸의 중간쯤에 있었다.
[지금 드러난 바로는 대성좌 급의 힘을 지니고 있지만, 수상한 구석이 많더군요. 특히 그의 별 투성에는 거대한 힘이 은닉되어 있어요. 위장 중인데도 이 정도면, 실제로는 더 강한 권능이 잠들어 있겠죠.]
아직 무신의 무한회귀까지는 파악하지 못한 것 같지만.
그래도 이그드라실은 투성에 강력한 힘이 잠들어 있다는 건 포착한 것 같았다.
이렇게 관리자 측에서 감지해 나가고 있다가, 무신이 회귀하면 다시 모르는 상태로 돌아가는 건가.
‘무한회귀가 사기긴 하네.’
성지한은 그리 생각하면서 이그드라실의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적색의 두 번째 카드는, 인류의 진화예요.]
‘……인류의 진화라고?’
[최하급 종족 때는 발현되지 않던 적의 인자는, 하급 종족 때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죠. 이것이 계속 성장하면, 적의 인자는 크게 발현할 테고.]
바뀌는 화면.
최하급 종족 때는 비리비리했던 인류가 점차 진화하며 건장해지고.
최하급 때에는 작디작던 미약한 불꽃이 인류가 진화함에 따라, 점차 커져 갔다.
그리고 상급에 도달하자, 인간은 불꽃에 완전히 집어삼켜져서 하나의 거대한 불길로 뭉쳐버렸다.
[종족이 계속 진화해 나가면, 인류 속 적의 인자가 성장하며…… 그들은 결국 하나가 되어 적색의 관리자를 부활시킬 겁니다.]
‘상급 종족이 되면…… 인류가 모조리 불타서 적색의 관리자가 된다고?’
[네. 그것도, 상시 관리자가 될 만한 힘을 갖춘 존재로 탈바꿈되겠죠.]
‘그럼 진화 안 하면 되겠네.’
이놈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사실이라고 친다면, 중급쯤에서 진화를 멈추면 되지 않나?
[하지만 당신, 무신이랑 싸울 거 아닌가요?]
‘그게 왜?’
[만에 하나 당신이 무신을 이긴다면, 대성좌를 제거한 업적 때문에 당신뿐만이 아니라 인류종 전체가 혜택을 봅니다. 그러면 당신이 원하지 않아도 종족 진화가 강제로 진행될지 모르죠.]
‘업적 보상, 내가 안 받으면 그만이지 않나.’
[업적 보상은 단지 주어질 뿐입니다. 수령을 거절할 순 없죠.]
그러면서 이그드라실은 업적 보상 하나를 보여 주었다.
[업적 ‘별을 무너뜨린 짐승’을 클리어했습니다.]
[조건 - 중급 이하 종족 출신의 플레이어가 대성좌를 제거했을 때 주어짐.]
[보상 - 출신 종족을 상급으로 진화]
[적색의 관리자가 관리자 시절 미리 만들어 둔 업적입니다. 실현 가능성이 없는 업적이라 보상이 과하게 측정이 되어도 승인되었는데, 이제 보니 그가 보험으로 들어 둔 것 같네요.]
‘녹색의 관리자가 저거 지울 순 없나.’
[적색이 다룬 파트라, 수정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요. 그 전에 당신과 무신의 싸움은 결판나 있을 겁니다.]
성지한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신한테 지면 그놈은 계속 무한회귀로 힘을 쌓다가 관리자가 되고.
무신을 이겨도, 인류 전체가 상급 종족으로 올라가면서 불타올라 적색의 관리자가 된다는 거잖아?
‘무신도 적색의 관리자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면…… 결과는 뭐가 되든 적색의 관리자만 득을 보는 결과군.’
[맞아요.]
‘근데 그를 내가 어떻게 막지? 나도 네 말에 따르면 적색의 관리자의 일부 아닌가.’
[그렇죠. 하지만, 아직 그에게 통제받고 있지는 않죠.]
이그드라실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감돌았다.
[가장 쉬운 방법은, 당신이 저에게 오는 거예요. 이그드라실의 정원사가 되면, 당신 종족도 챙겨 주도록 하죠.]
‘그거 말고.’
[굳이 쉬운 길을 돌아가네요. 그럼…… 그래. ‘놀라운 업적’을 보이세요.]
‘업적?’
[흑백의 관리자마저, 당신을 인정하게 할 만한 업적요. 적어도, ‘임시 관리자’로 임명해도 될 만큼 뛰어난 업적을 말이에요.]
* * *
성지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임시 관리자라니.
지금 성좌도 안 됐는데 뭔 몇 단계를 점프하라는 거야.
‘……무슨 업적을 쌓아야 그게 되나?’
[그건 당신에게 달렸죠. 다만, 성좌가 되기 전에 성과를 보여야 할 거예요. 성좌 후에는 아무래도 업적의 평가치가 깎이니까.]
‘어쨌든 임시 관리자가 되면, 적색의 굴레에서 벗어날 순 있나?’
[당신이 관리자가 되어서 편집하면 되죠. 아무리 임시라도 출신 종족에게 그 정도는 할 수 있거든요.]
그러면서 이그드라실은 말을 덧붙였다.
[임시 관리자 임명에 있어선 관리자 다수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그건 제가 적극적으로 찬성할게요. 정식은 반대할 거지만.]
‘정식은 왜?’
[당신이 정식 관리자가 될 정도면 제가 피곤해질 테니까요.]
알긴 아네.
‘그래…… 어쨌든 참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군. 도무지 이 사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야.’
[후후, 왜 그러겠어요?]
성지한의 의문에 이그드라실은 웃으며 답했다.
[이대로 가다간, 적색의 관리자가 저보다 먼저 상시 관리자가 될 것 같거든요.]
‘…….’
[그가 올라가면, 절 방해할 게 뻔하죠. 그 전에 제가 훼방을 놓아야 하지 않겠어요?]
언제는 협력 관계라고 하더니.
바로 서로의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고 있는 게 위쪽 세계인가.
‘하나 이러니 오히려 이그드라실의 말에 신뢰가 가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완전히 믿을 건 아니겠지만.
적색이 순순히 올라가지 못하도록 방해하겠다는 이그드라실의 스탠스 자체는 사실로 보였다.
[그럼 언제든, 쉬운 길을 택하고 싶으시다면 절 부르세요. 엘프로 개조해서 그들처럼 아껴 줄 테니.]
‘가는 건가.’
[흑백에게 안 들킨 상태로 이렇게 대화하는 거, 생각보다 쉽지 않답니다. 저니까 한 거예요.]
슈우우우…….
이그드라실의 목소리가 옅어지고.
성지한 내부의 세계수에서, 이물감이 사라졌다.
내부로 들어와서, 진짜 대화만 하다가 간 그녀.
그리고 세상은 다시, 원래 세계수 엘프 55와 싸우던 전장.
하늘숲으로 되돌아왔다.
‘…….’
1경기가 곧 종료된다는 메시지와 함께 끝나지 않았던 게임은.
[1경기가 종료됩니다.]
이제 확실히 종료된다고 뜨면서, 끝이 났다.
[‘세계수 이그드라실의 아바타’를 소멸시켰습니다.]
[레벨이 20 오릅니다.]
한편 레벨 업을 시켜 주겠다는 제안까지, 죽으면서 완벽하게 지킨 이그드라실.
[레벨이 스타 리그의 상한선을 넘습니다.]
[플레이어의 수준이 소속 리그를 훌쩍 뛰어넘은 상태입니다. 상위 리그로 즉시 편입됩니다.]
[‘챌린저 리그 - 9’에 소속됩니다.]
이젠 승급전도 없이 올려 주네.
20 레벨 업이 그대로 보전되는 건 좋지만, 승급전 보상이 사라진 걸 보고 아쉬워하던 성지한은.
‘…….’
사라지는 세상에서, 완전히 말라 비틀어진 하늘숲과.
심장이 터지고 먼지가 되어 사라진 엘프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엘프처럼 아껴 준다던 결과가 저건가. 이그드라실의 밑에 가면 나도 결국 저 꼴이 되겠군.’
이그드라실과 ‘대화’한 거야, 쓸 만한 정보를 많이 얻었기에 성지한도 수확이 있었다고 평가했지만.
대화를 위해 세계수 엘프 55를 터뜨려 버린 모습을 보면, 역시 그녀 밑에 들어가는 건 미친 짓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2경기 시작합니다! 어…… 엘프들, 몸이 왜 저러죠?
=다 공장에서 뽑아낸 듯한 모습이 아니라, 말라 비틀어져 있군요.
=어…… 아니. 우리 선수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픽픽 쓰러집니다!
바로 다음에 열린 두 번째 경기에서.
성지한은 이그드라실이 아바타로 강림한 결과가 어떤 건지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바퀴벌레 저리 가라 할 재생력을 선보이던 엘프들은, 이제 홀로 서 있지도 못하고 픽픽 쓰러졌으며.
“이그드라실이시여…… 멸족이 당신의 뜻이라면, 이를 따르겠나이다.”
감독이자 밴에서 풀려 2경기에 출전한 엘프 대신관은, 어떻게든 서 보려다가 쓰러지고는.
땅바닥에서 힘겹게 기도하다가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뭐야…….”
“이, 이대로 끝?”
“스페이스 리그 경기 중에 제일 허무한데.”
공격하기도 전에, 먼저 쓰러져 버리다니.
리그 내 최강 종족인 엘프답지 않는 최후에, 플레이어들이 찝찝한 듯 2경기 종료 결과를 맞이하고 있을 때.
=3경기는…… 왜 시작이 안 되죠?
=상대 팀 감독, 아직도 나오질 않고 있습니다만…….
감독실에서 밴, 셀렉트 카드를 나누고 3경기를 준비해야 할 엘프 대신관이 나오질 않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어…… 어?
=저, 저희…… 부전승입니다?
해설자들의 황당해하는 목소리와 함께.
3경기는 스페이스 리그 최초로, 부전승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