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벨로 회귀한 무신 403화>
불태오르는 공허의 수련장 내부.
스으으윽.
아레나의 주인은 주변을 바라보았다.
백색의 성화에서 어느덧 붉게 변한 불꽃이, 공허를 갉아먹고 있었다.
“관리자의 손을 얻더니, 바로 활용하셨군요. 수련장이 붕괴하고 있습니다.”
“……나도 저게 저렇게 셀 줄은 몰랐다.”
“방화범이 흔히들 하는 변명이로군요.”
“불붙을 게 없는데 저리 타올랐잖아.”
성화가 한 번 번진 이후로는, 생명의 기운은 공급하지 않은 지 오래.
그런데도 미친 듯이 활활 타오르는 홍염을 보면서, 성지한은 뭐 때문에 저리 타는지 의아해했다.
공허의 수련장 내부는, 맵 설정도 하지 않아서 어두컴컴한 무無의 상태.
뭐 불이 붙을 건덕지가 없었으니까.
하나, 아레나의 주인은 무슨 소리 하냐는 듯 대꾸했다.
“불붙일 게 없다니요. 공허가 있지 않습니까?”
“공허에?”
“예. 관리자의 불은 공허마저도 연소시키죠.”
스스스…….
그러면서, 순식간에 커지는 아레나의 주인의 얼굴.
우주의 형상이 금방 이 공간을 메우더니.
한층 더 강렬한 공허가 이곳을 자욱하게 뒤덮기 시작했다.
“하지만 훨씬 더 많은 양의 공허를 투입하면, 이 불도 진화할 수 있습니다.”
슈우우우…….
그 말대로,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는 공허에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하는 불길.
성지한은 아레나의 주인이 내보인 힘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공허에서 고위 서열이라더니, 그럴 법하네.’
평소엔 수련장 유지 보수 같은 일로 와 줘서, 딱히 그의 힘에 대해 체감이 잘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강렬하게 쏟아 내는 공허를 보니, 그가 상위 서열임이 확실히 느껴졌다.
불은 그렇게 아레나의 주인 덕에 꺼졌지만.
“이제 여긴 못 쓰겠군요…….”
다시 공허를 갈무리하여, 우주 얼굴로 돌아온 그는.
주변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제가 직접 힘을 들여 업그레이드한 수련실이, 이렇게 타 버리다니…… 참으로 아쉽습니다.”
“불도 껐는데, 다시 쓸 수 있지 않나?”
“그렇지 않습니다. 수련장의 내부 시스템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거든요. 고치느니 새로 만드는 게 나을 정도입니다.”
그래?
성지한은 수련장을 둘러보았다.
불이 꺼진 이곳은, 예전이랑 똑같이 어두컴컴한 무의 공간일 뿐인데.
성화는 아무래도 자신도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망가뜨린 것 같았다.
그때.
[공허가 50 오릅니다.]
“50…….”
공허 수치가 갑자기 폭등하더니.
[공허 한계치를 넘었습니다. 지금부터 플레이어의 육체가 공허에 잠식당할 수 있습니다.]
[신체가 공허에 잠식당합니다.]
슈우우우……!
성지한의 육체가 손끝부터,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무슨…… 공허에 귀의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별로 그러고 싶진 않은데.”
성지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갑자기 왜 이렇게 능력이 대폭 상승했어.
그때.
[?? 설마 성화로 공허 흡수함?]
눈에서 황급히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아니 그걸 대체 어떻게…… 성화로 태웠다고 해도 공허를 무슨 수로 먹음?]
“몰라 나도. 갑자기 늘어난 거야.”
[모를 리가 없음! 성화로 공허를 먹다니. 그건, 이론적으로 가능하지 실제론 불가능한 거나 다름없음! 전성기의 본체도 이렇게 빨리는 못 먹을 텐데…… 대체 어케 한 거임??]
“아 시끄러워. 모른다고.”
휙휙.
성지한은 손으로 문자를 흐트러뜨리곤, 미간을 찌푸렸다.
성화를 통해 에너지를 약탈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공허까지 먹어 치울 줄은 몰랐다.
손끝부터 보라색으로 잠식되는 공허의 기운.
공허가 200을 갓 돌파한 것도 아니고, 50 증가로 순식간에 245가 되다 보니 공허에 귀속되는 건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래서 그런가.
“흠. 제 후임으로 당신이 오면, 나쁘지는 않겠군요. 다만, 지금처럼 사고를 안 치게 철저하게 교육을 해야겠습니다. 그때는 평소의 저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를 보게 될 겁니다.”
아레나의 주인은 이미 성지한이 공허의 존재가 될 거라 확신하고는, 스파르타 교육을 예고한 상태였다.
지금까지 예의를 갖춘 건, 공허 소속이 아니니까 그런 거고.
공허 소속되면 굴릴 거라 이거지.
“아레나의 주인. 그럼 여기는 폐기할 거지?”
“뭐, 그래야겠지요.”
“그럼 내가 더 부숴도 되겠네?”
“……또, 또 뭘 하려고 그럽니까?”
“공허 어떻게든 없애 봐야지.”
스스스…….
성지한의 등 뒤에서, 태극이 떠오르고.
“공허 삭제 간다.”
그는 그 안에다, 지닌 공허의 기운을 마구 쏟아부었다.
태극마검의 생성을 통해, 공허를 삭제하려는 성지한의 시도.
아레나의 주인은 그걸 보고는, 두 손을 들었다.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당신 교육은 제가 안 시킬 겁니다.”
“왜?”
“말년에 신입 사고 뒤치다꺼리하긴 싫거든요.”
그러면서 서서히 사라지는 아레나의 주인.
“그럼, 끝나면 로그아웃하십시오. 그 기능은 살아 있으니까요.”
“알았어.”
슈우우우우!
태극의 안에서, 공허가 폭발하기 시작하고.
[공허가 10 감소합니다.]
공허 수치가 10이나 떨어지며, 태극의 안에서 마검이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추었는데도.
‘검의 태는 완성되었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냐. 공허 털어 버리는 게 중요하지.’
성지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단검보다 조금 더 커진 마검에 공허를 미친 듯이 불어넣었다.
어디까지나 목표는, 공허 삭제.
그렇게 공허를 퍼붓고, 또 퍼붓자.
스으으으…….
‘응?’
오히려 검의 형태는 잘 유지되면서, 안에서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공허가 10 감소합니다.]
그렇게 공허가 10씩 2번 감소해서, 225가 되었을 때.
[신체가 공허에 잠식당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잠식이 멈추었다는 알림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됐군.’
여기까지 왔는데, 공허에 귀속돼서 끝이 날 순 없지.
성지한은 안도하면서, 태극에서 마검을 꺼냈다.
그렇게 검의 형을 무시하고 공허를 퍼부어서 생성한 마검은.
‘오히려 더 성장했네.’
얼마 전 단검 시절에 비해, 더 커져 있었다.
무의식중에, 태극마검이니까 검의 형상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관념이.
마검이 더욱 발전할 여지를 가로막고 있었던 건가.
‘이러면 전화위복이군.’
성지한은 그리 생각하면서, 마검을 한차례 휘둘렀다.
그러자 단번에 찢겨나가는, 어둠의 공간.
이에 그치지 않고, 검흔이 남은 자리가 일그러지더니 세상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로그아웃하자.’
여기 더 있다간, 빠져나가기도 힘들겠어.
성지한은 그리 생각하고는, 재빨리 흑색의 보관함에 붉은 눈을 집어넣었다.
이번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밖에 더 놔 달라고 하지는 않는 관리자의 손.
대신.
[흑색의 검을 공허에 물들지 않기 위해 사용한다니…… 생각이 바뀌었음. 넌 공허 소속 미끼가 아님.]
“그걸 이제 알았냐.”
[……님. 솔직히 말하셈.]
“뭐? 지금 로그아웃할 거니, 할 말 있음 빨리 해라.”
[님 본체 아님?]
“본체면 적색의 관리자…… 장난하냐.”
자리 내려놓기 싫어서 도주한 적색의 관리자.
아무리 봐도, 지금 관리자와 가장 연관이 깊은 건 바로 무신이었다.
근데 갑자기 왜 자신한테 갔다 대고 있는 건가.
[나 감 잡음. 본체. 빨리 합체 ㄱㄱ]
“그런다고 팔 이식 안 한다.”
[아…… 아직 준비가 안 됨? 이해함 이해함. 연기 굳. 기다리겠음. 나중에 합체하고 상시 관리자 ㄱㄱ]
말 들을 생각을 안 하네.
성지한은 이쯤 되니까 손이 왜 이렇게 나오는지 궁금해졌다.
“왜 내가 본체라고 생각하냐?”
[성화 코드는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님. 특히 님같이 약한 상태에서 그 정도 완성도를 보이는 건 불가능함. 딱 하나. 코드 만들어 낸 본체를 제외하면…….]
수련장까지 불태워 버렸던 성화 코드.
확실히, 어비스의 주인이 직접 나서서 진화해야 할 정도로.
겁화로 진화한 성화 코드는 상당히 강력한 힘을 보였다.
거기에다, 불태운 잔해에서 능력을 흡수하는 특성까지 지녔으니까.
확실히 성화 코드는 다른 코드에 비해서도, 빼어난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근데.
‘피티아는 이런 성화를 어떻게 쓴 거지?’
피티아가 후원 성좌일 때 소피아에게 나눠 줬다가, 다시 회수해 갔던 성화.
물론 지금 성지한이 작성했던 성화 코드의 화력이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긴 했지만.
그 안에 담긴 기본 개념은, 지금 생각해 보니 비슷했다.
성지한은 그렇게 소피아가 피워 냈던 성화를 생각하다가.
‘……아니. 애초에 난 어떻게 이리 쉽게 쓰는 거지.’
의문이 자신에게로 도달했다.
생각해 보면 코드를 막힘없이 읽는 것도 그렇고.
눈이 띄워 낸 특수한 문자를, 마치 모국어처럼 해석하는 것도 명백히 이상했다.
‘딱히 출생의 비밀은 없지 않나, 나.’
근데 누나인 성지아도 신안을 지녀 공허의 마녀가 되긴 했어.
이거, 알고 보면 부모님이나 선조에 뭐 비범한 혈통이라도 있는 건가?
성지한은 잠깐 고민해 봤지만.
슈우우우욱!
마검이 새긴 검흔이, 이 세상을 더욱 우그러뜨리고 있었다.
지금 여기선 계속 있어 봤자, 답을 찾을 수 없는 상황.
“……일단, 간다.”
[기다리겠음. 본체!]
스윽.
성지한은 끝까지 본체 타령하는 눈알을 봉인함에 넣고.
찝찝한 마음으로, 로그아웃했다.
* * *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성지한은 조금 전 일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음 같아선 적색의 손을 꺼내서 자세히 캐내고 싶지만…….’
수련장 안도 아니고, 현실 세계에서 함부로 그 위험한 물건을 꺼내긴 그랬다.
조금 전이야 본체 본체 하면서 호의적으로 나왔다지만.
막상 이 세계 튀어나오면 다르게 행동할지도 몰랐으니까.
‘그러고 보면, 예전에 누나가 핏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긴 했지.’
서큐버스 퀸이 만귀봉신에 봉인되어 소멸하려 할 때.
성지아는 현신해서 성지한의 행동을 막으며 ‘혈통’과 관련된 이야기를 했다.
-선택받은 혈통이 뭐야?
-……지금 설명하긴 복잡하다. 간단히 말하자면, 공허를 담기 쉬운 존재야. 나처럼.
서큐버스 퀸이 처음 거론한 선택받은 혈통에 대해 묻자, 이렇게만 대답하며 자세한 정보는 주지 않았던 성지아.
그때는 언젠간 알려 주겠지 하면서 넘어갔지만.
‘이젠 그렇게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니. 세아한테, 한 번 누나한테 물어보라고 해야겠어.’
성지한은 그리 생각하면서, 방을 나섰다.
거실로 향하자, 때마침 요리 중인지 고소한 음식의 풍미가 느껴졌다.
평소라면 입맛을 다실 법한, 맛있는 냄새였지만.
‘세계수의 과육을 먹어서 그런지 영 입맛이 당기질 않네.’
스탯 올린다고 인벤토리에 있던 세계수의 과육을 다 비워 버린 덕에.
입맛이 돌아오질 않고 있었다.
이거 계속 이러면, 세계수 과일만 먹고 살아야겠는데.
성지한이 그리 생각하면서 부엌 쪽으로 가니.
“어, 삼촌! 옥상정원 둘러보고 온다더니, 빨리 왔네?”
“……무슨 소리야?”
윤세아가 성지한을 보면서, 영문 모를 말을 했다.
“응? 아까 그랬잖아. 오랜만에 내 요리 먹고 싶다고. 그래서 요리에 시간 좀 걸린다고 하니까 옥상 갔다 온다며.”
“내가 언제?”
그때.
“맞아.”
뚜벅. 뚜벅.
집 안쪽에서, 한 사람이 걸어왔다.
그리고 거기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내가 부탁했지.”
성지한의 것과, 일치했다.
“엥? 뭐야?”
이를 들은 윤세아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앞으로 내밀더니.
집 안에서 걸어오는 사람을 보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사, 삼촌이…… 두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