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벨로 회귀한 무신 394화>
‘투성의 비밀을 알려 주겠다더니, 진짜였군. 정보는 얻었네.’
성좌의 무구.
그것이 무신의 힘을 증폭시켜 준다는 사실은 성지한으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거기에, 성좌의 무구에 인류가 배틀넷에 진입했을 때부터 멸망할 때까지의 기록이 새겨져 있다니.
‘……태극의 망혼 속, 수없이 죽어 갔던 내가 떠오른다.’
여러 가지,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다.
태극마검에 갈려서, 어비스의 주인 안에 섞여 있는 성지한의 잔해.
그리고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지녔던, 세 번째 종의 금륜적보…….
‘힘은 성좌의 무구에 봉인하고. 인류가 멸망했을 때, 시간을 되돌린다…… 그러한 과정을 수백, 수천 번 반복하면. 지금의 투성의 하늘에 놓인 성좌의 무구처럼 숫자가 많아지겠지.’
무신이 어떻게 일을 진행하는지는 아직 정확히 알진 못했지만.
성지한은 대략적으로 그런 프로세스로 진행되지 않을까 추측했다.
한편.
성지한이 그렇게 생각에 잠겨 대답을 하지 않자.
[물론 내가 협력하자고 해도, 쉽게 믿긴 힘들겠지.]
그가 거절하는 줄 알고, 길가메시가 다시 운을 떼었다.
“그거야 그렇지.”
[하나 우리의 다툼은 사소한 것. 공동의 적인 무신의 힘은, 이미 한 명이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강력하다. 그래. 내가 신뢰를 위해, 세계수가 봉인된 봉인지를 알려 주지.]
큰맘 먹고 내가 먼저 정보 풀겠다는 길가메시.
[너희 나라가 있는 자리와 가까운 곳이다.]
하나 성지한은 그 말을 듣자마자 피식 웃었다.
“거긴 이미 아는데?”
[……그런가? 음. 생명의 기운을 어디서 더 얻었나 했더니…… 거기서 지배 코드를 더 완성할 수 있었던 건가.]
성지한의 대답에, 종족 진화 당시 지배 코드가 완성된 이유를 알게 된 길가메시는.
[그럼…… 봉인지 안의 세계수를 지배할 용어를 알려 주지.]
스릉. 스릉.
팔을 묶었던 사슬이 요동치고.
성지한의 눈앞에, 문자가 떠올랐다.
지배 코드를 이루던 문자와 비슷한 류의 글자는.
[뱀의 목을 벨 시간이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세계수에 이것을 작성하면, 봉인을 쉽게 해제할 수 있을 것이다.]
“뱀은…….”
[무신이지.]
스르릉…….
길가메시의 사슬이 점차 풀리고.
그의 음성이 점점 미약하게 들려왔다.
[세간에 퍼진 나의 서사시에선, 뱀이 불로초를 가져갔다고 나와 있다만. 오히려 실상은 반대였지. 나는 뱀에게 불로불사를 받았다…….]
“…….”
[세계수의 봉인을 풀어, 거기서 너는 힘을 얻어라. 그 후, 협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길가메시의 사슬은, 그렇게 용건을 다 전하고는 사라졌다.
‘이거 그냥 지가 세계수의 봉인을 풀고 싶은 거 같은데.’
말로는 협력을 위해, 내가 먼저 정보를 알려 준 거다라고 했지만.
길가메시의 진짜 목적은 세계수의 봉인을 푸는 데 있는 거 아닌가.
성지한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일단은 봉인 해제 문구를 기억해 두었다.
그리고.
“…….”
“끝…… 인가?”
그렇게 기껏 5명이 희생해서 만들어 낸 사슬이 사라지자.
그저 멀뚱멀뚱 성지한만을 바라보고 있는 중국 선수들.
=아, 방금은 뭐였을까요?
=아까 마법진 안에서 나온 건 바벨탑…… 인가요? 그건 분명 길가메시의 것 아니었습니까?
=그를 추종하는 세력이 아직 있는 것도 마음에 걸리는데, 중국 대표팀 안에 5명이나 있을 줄이야……!
=그런데 그렇게 소환한 것치고는, 너무 쉽게 사라졌군요.
=성지한 선수를 얽매기보다는, 오히려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였습니다.
=예. 무슨 말을 했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요…… 입이 움직였었죠?
해설자들이 2경기 상황을 보면서 그리 의문을 표하고.
-쟤네 왜 공격 안 함? 성지한 잡혀 있었는데
-잡혀 있긴 팔 한쪽만 감긴 채 편안히 대화 나누더만 ㅋㅋㅋ
-거기에 애초에 공격해도 데미지 1도 안 박힘 ㅋㅋㅋㅋ
-ㄹㅇ 딜이 박혀야 딜을 넣죠.
-근데 무슨 이야기 한 걸까?
-성지한이 개인방송을 안 틀어서 아쉽네; 중계화면으론 도저히 모르겠음.
시청자들도 성지한이 입술을 달싹이는 걸 보면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해했다.
스으윽.
성지한은 바벨탑과 마법진이 사라지는 걸 보더니.
“다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하군요.”
나머지 중국 선수들을 스윽 돌아보았다.
“그럼, 일단 2경기부터 끝낼까요?”
슈우우우…….
성지한의 팔에서 암검이 생성되자.
“사슬에 피해를 전혀 안 입었나……?”
“마, 막아……!”
중국 선수들이 이에 얼른 대처하려고 했지만.
휙!
검이 횡을 벤 것이 먼저였다.
툭. 툭…….
일제히 두 동강이 난 채, 떨어지는 중국 선수의 신체.
그리고 동시에.
쿵! 쿵!
대수림 안의 나무들이 모조리 쓰러지기 시작했다.
[2경기가 종료됩니다.]
그리고 바로, 경기 종료 메시지가 떠올랐다.
* * *
2경기가 끝난 후.
=2경기 종료됩니다!
=중국 선수들, 단 한 명도 성지한 선수의 일검을 막지 못합니다……!
=사슬에 묶였을 때만 해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하는 결과가 나왔네요!
=1, 2경기 모두, 한국이 승리하며 유리한 고지를 점합니다!
해설자들은 당연하다는 어투로 승리를 이야기했다.
-키야…… 역시 일검!
-1분 만에 끝내진 못했지만, 저 사슬 아니었으면 30초도 가능했을 듯.
-중국 선수들 너무 게임 빨리 포기한 거 아님?
-ㄴㄴ 나름 막아 보려고 함 막질 못했을 뿐이지.
-국가대표 경기에서 성지한 카드는 너무 치트키네 ㅋㅋㅋ
시청자도, 해설자도.
심지어 중국 대표팀 선수들까지 모두 다 예상한, 일방적인 게임.
‘이 정도면 됐겠지.’
성지한은 이쯤에서 국가대표 경기의 개입을 그만두기로 했다.
1, 2경기를 승리로 이끌었으니, 나머지 경기에선 한국 국가대표팀이 알아서 해 줘야지.
거기에.
‘세계수의 봉인, 빨리 살펴봐야지.’
이제 역천혼류도 이겨 냈겠다.
세계수를 지배할 문자도 배웠겠다.
준비는 끝났으니, 조금이라도 더 빨리 심해의 구궁팔괘도를 더 공략해야 할 것 같았다.
“삼촌, 가게?”
“어, 남은 3게임 중 하난 이길 수 있지?”
“당연하지!”
“좋아.”
성지한은 자신만만해하는 윤세아에게 손을 뻗었다.
슈우우우우…….
그러자, 그녀를 언데드화했던 공허의 힘, 불사의 축복이 성지한에게로 다시 회수되었다.
“이거 없이도 가능하지?”
“다, 당연하지. 1게임은 이기겠지……?”
그러자 급격하게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윤세아.
그때. 윤세진이 뒤에서 나와서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세아야, 자신감을 가져. 저번에도 우리가 이긴 상대잖아. 당연히 이길 수 있지.”
“그렇지! 삼촌, 걱정 마. 우리가 마무리할게.”
“그래. 믿는다.”
성지한은 손을 흔들곤, 노영준 감독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감독님,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지한아. 더 있기는…… 좀 그렇겠지?”
“예, 감독님. 더 이상 개입하기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걸려서요.”
“그래그래. 중국전을 2경기나 승리하게 만들어 준 것만으로도 고맙지…….”
감독 입장에서야 이왕 중국전 참여한 거, 마지막까지 부탁하고 싶었지만.
‘본인이 안 나가겠다는데 어쩔 수 없지…….’
성지한한테, 노영준 감독은 철저히 을의 입장이었다.
“그럼.”
휙!
그렇게 성지한이 배틀넷 센터를 나서자.
노영준 감독은 아쉬운 눈으로 그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더니, 선수들을 둘러보았다.
“……그래. 지금껏 지한이한테 너무 많이 의존했지. 다음 경기는 우리끼리 해서 승리해 보자.”
“네, 감독님!”
“아직 중국 쪽에서 우리한테 지한이가 있는 줄 알 때가 기회야. 3경기에 게임을 끝내자.”
“알겠습니다!”
그렇게 3경기에 총력을 다하기로 한 한국 대표팀이었지만.
=이번엔 성지한 선수를 밴한 중국. 하지만 윤세아 선수는 살아 있습니다. 1경기의 재림이 될까요?
=어…… 근데 윤세아 선수. 1경기 때처럼 언데드화가 되어 있질 않군요?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성지한 선수가 다시 부재중인가 봅니다!
윤세아의 언데드 화가 풀리면서, 성지한이 자리를 비운 게 드러나고.
“성지한이 없어……?”
“지금이 기회다!”
“이제부터 역전하면 이길 수 있어……!”
중국 대표팀은 1,2경기의 무력한 모습은 어디 갔는지, 거센 반격을 시작했다.
=3, 3경기. 패배합니다!
=아. 제갈헌 선수 진짜 강하네요……!
=이래서야, 저희도 제갈헌 선수만 콕 집어 밴해야 할 것 같아요……!
성지한이 사라지자, 급격하게 바뀌는 경기 분위기.
-아니 성지한 님 어디 가심? ㅠㅠㅠㅠ
-길가메시랑 뭔 이야기 나눈 거 같더니, 급한 용무가 생기셨나…….
-아 성지한 캐리 받다가 못 받으니까 완전 체감되네.
-으으, 설마 지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3경기부터 치열하게 전개되던 게임은.
=아. 배, 밴 카드…… 적중. 적중합니다! 중국의 키 플레이어 둘이 밴당했어요!
=반면에 저희는 살았습니다! 1-10위 밴에 성지한 선수가 걸려 줬어요!
=마, 마지막 경기. 기대할 만합니다……!
결국 5경기에 들어서서, 한국이 겨우 1승을 거머쥐면서 끝이 났다.
=3, 3:2…… 초반 2경기만 해도 쉽게 이길 것 같았는데, 참으로 힘든 경기였습니다!
=그래도 이겼다는 게 중요하죠! 대한민국, 세계 2위 중국을 꺾고 지역리그 1위로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합니다!
그렇게 한국이 겨우겨우 조 1위로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확정지을 때.
‘들어가 볼까.’
성지한은 해저에 도착하여, 구궁팔괘도에 들어갈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 * *
슈우우우…….
구궁팔괘도 안에 들어선 성지한은, 세상이 뒤바뀌는 걸 느꼈다.
그리고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자마자.
‘음…… 이건, 역천혼류인가?’
동방삭이 가했던, 공간을 봉쇄하는 점혈법.
역천혼류가 저절로 걸렸다.
‘이래서 그가 나보고 해혈법을 터득하라고 한 건가.’
평소에 자신에게 셀프로 가했을 때보다, 역천혼류의 압박감이 더 강하긴 했지만.
해혈법을 알고 있던 성지한은 이를 간단히 파훼했다.
그러자.
휘이이익!
하늘 위에서, 성지한을 향해 날아오던 검이.
그의 눈앞에서 그대로 멈추었다.
‘역천혼류를 해제하지 않았다면, 검이 날 찔렀겠군.’
검은 그렇게 가만히 성지한의 눈앞에 있다가.
휙!
하늘 위로 다시 날아갔다.
‘흠.’
성지한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저번 외진의 풍경은, 강이 옆에 흐르고 녹음이 우거진 숲이었는데.
여기는 대지가 말라서 쩍쩍 갈라진 채, 황량하기 짝이 없는 황무지였다.
‘하늘 위에는, 검이 총 10자루가 떠다니고 있고…….’
아까의 검이 지닌 기세야 강력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지금 성지한이 지닌 힘으로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일단은, 부딪치지 말고 둘러볼까.’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앞을 향해 나아가는 성지한.
십 분 정도를 걸었을까.
그의 눈에 곧, 거대한 나무가 눈에 띄었다.
‘품고 있는 기운을 보니 세계수 같은데…… 저번처럼 지키는 이는 없군.’
거대한 나무에서 풍기는 막대한 생명력.
이건 저번 세계수가 지닌 힘과 비슷했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은.
‘이번 세계수는 전반적으로 다 붉은빛이네.’
나무뿌리부터 기둥, 가지에 잎까지.
이번 세계수는 전체가 섬뜩한 핏빛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색을 보니, 여기에는 적의 힘이 깃들어 있는 건가?’
성지한이 보다 더 자세히 살피려고 붉은 세계수에 접근했을 때.
쿠르르르…….
땅바닥에서 뿌리가 올라오더니.
그것이 서로 끊기며, 허공에 글자를 만들었다.
[봉인을 해제하시겠습니까?]
슈욱!
그러면서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거대한 나무 판자.
허공에 만들어졌던 글자가, 변형되었다.
[여기에 봉인 해제 문구를 입력하십시오.]
길가메시에게 배운 걸, 여기에 바로 써먹으라는 건가.
하나 봉인을 바로 해제하면, 너무 녀석의 의도대로 따라가는 꼴.
“나중에 쓸게.”
성지한이 일단 이 세계를 둘러보기 위해, 그리 대답하자.
[알겠습니다.]
뿌리의 글자는 이를 순순히 긍정했다.
‘붉은 세계수…… 딱히 내게 적의를 가지지는 않는군.’
성지한은 이를 신기하게 생각하며, 세계수에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니, 크기가 더 실감 나는 나무.
규모가 얼마나 큰지 사람도 수백 명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어디 본격적으로 살펴볼까…….’
성지한이 그렇게 붉은 세계수에 손을 뻗었을 때.
[주의. 주의. 감시자 접근 중.]
갑자기 그의 눈앞에 붉은 글자가 떠오르더니.
쿠르르르!
세계수의 기둥 한 곳에 구멍이 뚫리며, 붉은 화살표가 허공에 떠오르며 이를 가리켰다.
[이쪽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뭔데 이렇게 친절해? 아니, 함정인가.’
성지한은 잠깐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안에서 이걸 흡수하는 게 더 괜찮을지도 모르겠어.’
함정이면 자신이 역으로 세계수를 집어삼키기로 생각하고는, 기둥 안으로 들어갔다.
함정은 아니었는지, 오히려 편안하기 짝이 없는 기둥 안쪽.
분명 나무통 안에 세로로 있을 텐데, 등이 푹신푹신한 게 침대에 누운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뚜벅. 뚜벅.
붉은 세계수를 향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
“분명, 침입자가 있었는데…….”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기둥 너머로 들렸다.
성지한으로서는, 귀에 익은 소리였다.
[감시자를 지켜보시겠습니까?]
마치 상태창 메시지를 따라 한 듯, 허공에 글자가 올라오는 기둥 안.
성지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툭. 툭.
기둥의 벽에 구멍이 뚫리며.
밖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드러난 감시자는.
‘역시…… 그였나.’
퀭한 얼굴의 동방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