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벨로 회귀한 무신 385화>
공허의 수련장.
“오셨군요.”
우주 형태의 얼굴에, 중절모를 쓴 아레나의 주인은 성지한을 반겼다.
“수리가 생각보다 일찍 됐군.”
“위에서 이를 최우선적으로 처리하라고 명령이 내려왔거든요.”
“위라면, 흑색의 관리자?”
“맞습니다. 거기에…….”
아레나의 주인이 손을 펼치자.
슈우우욱!
어두컴컴하던 바닥에, 보랏빛으로 원형 경기장 모형이 올라왔다.
“레벨 500을 수월하게 찍으실 수 있도록, 특별 아레나도 개최될 예정입니다.”
“레벨 업을 도와주는 아레나를 개최한다고…….”
“예. 공허의 수련장을 하루라도 빨리 업그레이드할 수 있게 말이죠.”
“이것도 흑색의 관리자가 명한 건가.”
“그렇습니다.”
“그럼 굳이 아레나를 개최할 필요 없이, 그냥 바로 업그레이드해 주지 그래.”
“그건 절차상 불가능합니다. 레벨 500도 최소 요건이라서요.”
관리자가 뭔가 사정을 많이 봐주는 것 같아 한 단계 더 나아가 봤는데 아쉽군.
성지한은 그리 생각하면서 아레나의 주인에게 물어보았다.
“근데 흑색이고, 백색이고…… 왜 날 도와주는 거지?”
물론 도와주니까 좋긴 하다만,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지 않은가.
특히 사정을 봐주는 상대가 관리자라면, 대우를 받아도 뭔가 찜찜하긴 했다.
“그건…….”
아레나의 주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
“……윗분께서 말씀드려도 된다고 하시니, 이야기하지요. 관리자께서는 오래전부터, 사라진 적색의 관리자를 추적해 왔습니다.”
“적색의 관리자를?”
“예. 임기를 끝마치고 은퇴해야 할 그가, 관리자 직을 내려놓지 않았으니까요.”
스으으윽.
아레나의 주인이 손바닥을 펼치자, 지구의 모형이 아레나의 주인의 손 위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흔적은, 행성 지구에서 발견되었지요. 처음에는 관리자가 직접 이곳에 개입하려고 했지만, 저도 모르는 사정으로 인해 우리는 간접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간접적이라면.”
“적의 일족의 실험체 역할을 하던 길가메시에게 힘을 부여하는 것이었지요.”
성지한은 지구 모형 위에 길가메시의 얼굴이 떠오르는 걸 보고.
예전에 아레나의 주인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공허의 소명을 저버린 배신자. 그의 원죄는 NO.4212 인류 모두가 갚아야 합니다.
-임무를 다 끝마친 그는, 주어진 수명을 누리고 죽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죠.
-그게 배신입니다.
적의 일족을 토벌했음에도, 죽지 않고 영생을 살았던 길가메시.
공허 입장에선, 그게 배신이었던 건가.
“길가메시에게 주어졌던 힘은, 적색의 관리자를 없애기 위해 관리자들이 특별히 부여한 권능이었습니다. 이 권능은 다시 반납이 되어야 했지만, 길가메시는 영생을 살며 이를 은폐해 버렸죠. 거기에…….”
지구와 길가메시의 형상이 사라지고.
이번에는 거대한 무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희는 방랑하는 무신에게, 이 권능이 일부 주어진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무신에게?”
“예. 거기에, 아직은 조사 단계입니다만. 적색의 관리자와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 중이지요.”
“흠…… 근데 그거랑 날 도와주는 게 무슨 상관인가.”
“관리자께서 관측할 수 있는 사람은, 인류에서 당신이 유일하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아레나의 주인은 자신의 얼굴, 우주 형상을 잡더니.
이를 좌우로 쭈욱 당겼다.
그러자.
파아아앗!
순식간에 공허의 수련장 전체로 확장되는 우주 형상.
“한없이 광활한 우주. 이 안에서 관리자께서 관리하는 배틀넷 종족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래. 무한하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요.”
“…….”
“이들을 모두 관리하는 건 아무리 관리자라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하여 관측대상을 분류하기로 하셨죠. 배틀넷 종족의 95퍼센트를 차지하는 최하급 종족은 아예 관측을 안 하고. 4퍼센트를 차지하는 하급 종족에는 매우 특수한 자에게만, 제한적인 관측을 하기로 하셨습니다.”
최하급 종족은 아예 보지도 않고.
하급도 성지한 같은 케이스 정도가 아니면 보지 않는 건가.
이번에 인류가 종족 진화하지 않았다면, 관리자의 눈길은 여전히 계속 오지 않았겠어.
“근데 녹색의 관리자는 시도 때도 없이 채팅창 들어오던데.”
“그는 임기가 정해진 관리자니까요. 제가 말한 관리자 관측 분류는 어디까지나 흑색과 백색의 관리자에게만 적용되는 기준입니다.”
임기가 있는 관리자와, 없는 관리자.
역시 둘 간의 급은 확실히 다른가 보군.
“어쨌든, 백색과 흑색.”
“흠흠. 흑을 먼저 이야기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그래. 흑색과 백색의 관리자는, 관측을 위해 날 도와주는 거라 이거군.”
“맞습니다. 성지한 님은 관리자께서 이 세계를 직접 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관측 결과. 이 세계는, 그리고 무신은 매우 많이 어긋나 있었습니다.”
“어긋나?”
“예. 매우, 많이…….”
아레나의 주인은 그렇게 말끝을 흐리더니,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 이유로, 관리자께서 성지한 님을 지원하시는 거니 이를 최대한 활용하십시오.”
“……알겠다.”
“공허의 수련장도 한도 내에선 최대한 업그레이드해 드렸습니다. 이젠 시간의 흐름 비율이, 지구에서의 1일당 100일로 바뀝니다. 대신 비율을 확대하기 위해, 이제는 이 시간 축이 고정되죠.”
“비율을 줄였다 늘렸다는 못 한다는 거지?”
“예.”
공허의 수련장에서 100일을 보내도, 이제 지구에선 하루만 지나는 건가.
대신 이 시간 비율을 조절할 수는 없다지만, 어차피 100일이 맥스치면 100일로 계속해 놨을 테니까.
좋은 업그레이드 방향이다.
‘역천혼류의 해혈을 여기서 끝내야겠어.’
동방삭이 구궁팔괘도에 들어가기 전, 극복하라고 부여했던 역천혼류.
아소카와의 만남으로 태극마검의 운용을 한층 더 깨닫고 나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이 오긴 했지만.
완벽히 이를 제어할 때까지는 수련장에 있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스으으으…….
공허의 수련장을 가득 메웠던 우주 배경이 다시 중절모 아래로 들어가고.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특별 아레나는 일주일 후에 개최될 예정이니, 그때 초대장을 받아 주십시오.”
아레나의 주인이 돌아가려고 하자, 성지한이 그를 잡고 질문을 던졌다.
“아, 잠깐. 여기서 배틀튜브 틀어도 방영되나?”
“배틀튜브요…… 이곳은 방송이 제한된 장소입니다만. 특히 이렇게 업그레이드된 공허의 수련장은, 공허의 내부 깊숙한 곳에 있습니다. 배틀튜브의 접근은 원천 봉쇄되어 있지요.”
“빛의 눈이 있어도 안 보여?”
“빛의 눈이라면…… 아. 백색의 관리자가 부여한 걸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거라면…… 보이긴 할 겁니다. 왜곡된 시간 축의 흐름을 보정해서, 백배속으로 나가긴 할 테지만요.”
백배속으로 나가는 수련 방송이라.
‘실시간 시청자가 다 떨어져 나가서, 스타 버프가 그거 때문에 끊기겠군.’
거기에 사실 수련 장면도 외부에 보여 줄 필요는 없었으니.
성지한은 여기서 방송이 잘되는지 테스트만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시험방송만 해 보도록 하지.”
“예. 자유롭게 하십시오. 그럼, 일주일 후에 아레나에서 뵙겠습니다…….”
스으으…….
아레나의 주인의 모습이 사라지자.
‘빛의 눈이 되는지만 확인하고 끄자.’
성지한은 바로 배틀튜브를 켰다.
* * *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테스트 방송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
성지한은 배틀튜브를 켜보았다.
“이곳은 배틀튜브가 차단되는 공허의 수련장입니다. 빛의 눈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보기 위해 틀었습니다.”
성지한은 시간 축 조절을 감안해서, 말을 천천히 해 보았지만.
-뭐지 이거…….
-방송사고?
-뭐라고 말하는질 모르겠음;
-백배속 고정 옵션이 박혀 있네 뭐야 이거 ㅋㅋㅋㅋ
-이거 느리게 못 함??
-생방 때는 안 되나 봐 ㄷㄷ
아무리 천천히 해도 영상 속도가 백배속이 되니, 일반 사람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뭐야 이거?
-백배속 고정이라니?
-공허의 수련장이군
-진짜 있었어 이거? 풍문인 줄 알았더니…….
-방영이 되는 게 놀랍네. 이게 빛의 눈이 지닌 힘인가.
-아니 진짜로 관리자들이 뒤를 봐주고 있었어? 이놈이 뭐라고?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인류의 시청자들과는 달리, 외계의 존재들은 이를 캐치했다.
-하급 종족 주제에 강한 이유가 여기 있었던 건가.
-에이 그래 봤자 쟤 장수족들이 누려 온 시간에 비하면 시간 쓴 거 얼마 안 될걸?
-오래 수련한다고 다 강해지면 드래곤이 우주를 지배해야지.
-?? 무슨 소리야 용이 이미 우주 지배하고 있는데?
-도마뱀 하나 바로 튀어나왔네 ㅋㅋㅋ 엘프한테 맨날 튀는 놈들이.
-뭐? 너 이 새끼 무슨 종족이야? 당장 좌표 불러라.
-또 엘프한테 얻어맞고 엄한 데서 화풀이하죠?
‘이놈들은 또 이러네.’
성지한은 익숙한 눈으로 평소처럼 싸움 난 채팅창을 바라보았다.
여러 종족이 모여 있어서 그런지, 뭐만 하면 싸우자고 하는 외계 종족들.
그때.
[‘스타’ 버프가 활성화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빛의 눈이 확실히 효과는 있나 보군.’
이럼 테스트는 끝이네.
성지한은 스타 버프가 활성화된 걸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영상이 잘 송출되나 보군요. 그럼 오늘은 이만 종료하겠습니다.”
-뭐? 끝?
-아니 공허의 수련장 더 보여 줘야지! 소개 컨텐츠 아니었어?
-야야 지금 100배속이라서 금방 끝난다고! 이번 영상 수익창출 안 할 거야??
“수익창출 안 해도 괜찮아요. 애초에 여기, 보여 줄 게 없거든요.”
스으윽.
성지한은 공허의 수련장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아직 맵 설정을 안 해서 그런지, 어둡기만 한 수련장 공간.
설정을 바꾸면 예전에 플레이했던 맵으로 바꿀 수 있었지만.
‘예전처럼 채널 성장을 위해 컨텐츠 뽑아낼 단계는 지났으니, 안 한다.’
관리자가 나타난 이후로, 관심이 상당히 집중된 성지한 채널.
이걸 조금 더 성장시킨다고, 공허의 수련장 리뷰 영상을 찍고 싶진 않았다.
스타 버프의 성장도 막혔을뿐더러.
‘역천혼류를 풀어야 해.’
지금은 할 일이 있었으니까.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삑.
방송 송출을 끈 성지한은, 곧바로 수련에 들어갔다.
‘일단 점혈부터 하고.’
툭! 툭!
그는 자신에게 셀프로 역천혼류를 사용한 후.
무혼이 봉쇄된 걸 느끼곤, 천천히 이를 살펴보았다.
‘역천혼류…… 확실히 태극마검의 1단계와 연관이 있군.’
아소카가 금륜을 돌려 수련을 시켜 준 덕에, 태극을 운용하는 1단계는 익숙해진 성지한.
그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역천혼류를 해혈해 나갔다.
‘하루에 100일씩 시간을 주니까, 금방 끝내고 나가겠어.’
처음에 성지한은 그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했지만.
‘이런…… 여기에 이런 묘수가 숨겨져 있었군.’
‘아니, 여기서 막힌다고?’
‘……역천혼류. 이 안에 대체 뭘 담은 거야?’
막상 해 보니 태극마검의 1단계 경험은, 역천혼류의 해혈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질 못 했다.
오히려 계속 수련을 하면 할수록, 부족한 점만 눈에 띄게 된 성지한.
‘빨리 끝내고, 초대장 오기 전에 구궁팔괘도에 갈까 했는데…….’
일주일 후에 오기로 한, 특별 아레나 초대장.
수련장 시간으론 700일 후니, 그 전에 빨리 끝내고 서해의 구궁팔괘도에 방문하려 했는데.
‘그럴 여유가 없어졌군.’
100일이 지나자, 성지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풀릴 듯 풀리지 않는 역천혼류.
이걸 계속 붙잡고 있으니, 갑자기 아소카가 자신을 가리켜 재능이 애매하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확실히, 동방삭 급의 무재는 따라가기가 힘들군.
‘그럼, 뭐 시간으로 밀어야지…….’
성지한은 그렇게 공허의 수련장에서, 역천혼류를 계속 공략해 나갔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시간이 흘러.
“……드디어, 됐군.”
그가 역천혼류를 완벽하게 파훼했을 때.
[아레나의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현실로는 일주일의 시간.
공허의 수련장에서는 700일이 지났음을 알리는 메시지가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