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벨로 회귀한 무신 370화>
투성의 탑 내부, 길가메시의 왕좌.
“아니……!”
쾅!
길가메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평소의 여유로운 미소는 사라진 채,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말도 안 된다!”
그가 띄워 놓은 화면을 통해 본 것은, 성지한이 지배 코드를 작성하여 왕의 명령을 제거하는 모습이었다.
저번에는 지배 코드가 완성되지 않아 실패했는데.
이번에 작성한 그의 코드는 확실히 마무리가 되어 있었다.
왕의 명령보다 우선시될 정도로.
“며칠 사이에, 저걸 어떻게 완성한단 말인가!”
지상에 내린 왕의 명령.
길가메시 입장에서도, 이건 상당히 출혈이 큰 투자였다.
투성에 위치한 황금의 탑의 규모가 반이나 줄었을 정도였으니까.
한데 써먹을 대로 써먹다가, 마지막 날에 이렇게 버프를 제거한다고?
눈이 뒤집힌 길가메시는 왕좌를 걷어찼다.
콰쾅!
그러자 대번에 파괴되는 황금의 왕좌.
평소 성질을 잘 부리지 않던 그였지만.
이번에 소모된 힘은 화가 머리끝까지 날만큼 컸다.
그렇게 왕좌가 가루가 되어 갈 때쯤.
스으윽.
길가메시의 옆에, 동방삭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깐 자리를 비운 새에, 그새 또 수작을 부렸나.”
그러다 그는 길가메시가 화를 참지 못하는 걸 보고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근데 실패한 모양이로군.”
“동방삭……!”
“무슨 일인데 그러나?”
길가메시는 이를 악물더니, 띄워 놓은 화면에 손가락을 가리켰다.
“또 저 녀석인가. 호오…… 저 문자를 완성했군. 막대한 생명력이 필요할 텐데.”
“……그래. 저 녀석의 수준으론, 저걸 지금 완성할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글자를 완성한 거지?”
“저 녀석이 부쩍 성장하는 게 한두 번인가.”
동방삭은 그리 말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수염의 가운데 쪽을 매만졌다.
몇 번을 그러던 그는.
“음…….”
자신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끼곤, 다시 원래대로 수염을 위에서 아래로 쓸었다.
수천 년간 수염을 만지는 방식이 있었는데, 왜 요즘 자꾸 가운데를 만지는 거지?
‘……이상하군.’
그것도 꼭 저놈을 볼 때 이러는군.
동방삭은 착 가라앉은 눈으로 성지한을 바라보고 있을 때.
“이러면…… 인류 진화라도 완성해야 한다. 되겠지?”
“네가 힘을 써 준 덕분에, 진화야 되지 않겠는가.”
“큭…….”
으드득.
길가메시는 이를 갈면서, 인류의 마지막 진화 미션을 지켜보았다.
성지한의 버프로 인해, 승률 60퍼센트를 겨우 넘은 인류가 결국 진화를 거머쥐자.
“성공했군!”
쿠르르르…….
투성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길가메시가 만들어 낸 황금의 탑이 금이 가 파괴되더니.
기초부터 새로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흐음…… 인류 진화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았나 싶더니, 상당히 강해졌구나. 길가메시.”
부서진 탑 위, 허공에 선 채.
동방삭은 길가메시를 바라보았다.
황금의 빛이 반짝이고 있는 그에게선, 생명의 힘이 예전보다 훨씬 강렬하게 나오고 있었다.
“그래. 나는 인류의 왕…… 그들이 강해지면 나도 강해지지.”
조금 전의 화는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자신의 상태를 살피던 길가메시는 입가에 씩 웃음을 지었다.
“인류가 만약 중급으로 도약한다면, 너도 이길 수 있을지도.”
“그럼 좋겠군. 좋은 대전 상대가 생길 테니 말이야.”
스으윽.
동방삭은 길가메시의 위아래를 훑더니, 등을 돌렸다.
“하지만 발전해 봤자 그 정도면, 중급으로 올라가도 내 상대가 안 될 거네.”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알겠지.”
“기대하도록 하지. 그러면 탑을 재건할 땐 방해하지 않도록 하겠네.”
휙!
자리에서 사라지는 동방삭.
길가메시는 그가 떠난 방향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생겼나? 날 지독하게 감시하던 놈이, 요즘 알아서 물러나는군.’
성좌였기에 망정이지.
사람이었다면 잠잘 때나 화장실 갈 때나 죄다 따라다녔을 것 같은 동방삭.
하지만 요 근래에는 일부러 의도한 건지, 꽤 감시가 허술해져 있었다.
‘의도가 있는 것 같지만, 주어진 기회를 놓칠 순 없지.’
길가메시는 탑을 증축하며, 화면을 띄웠다.
그 안에는, 진화된 인류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어디 보자…….’
그중에서도 그는.
귀가 살짝 튀어나온 이들을 주목했다.
‘생각보다 많구나.’
사람들을 보던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지어졌다.
* * *
[진화한 인류, 실질적인 변화상은? 스탯의 효율 증가, 20~40퍼센트선으로 측정 중.]
[신체가 변화한 케이스는 귀가 압도적으로 많아. 눈의 색이 변하거나 송곳니가 튀어나오는 등의 케이스도 간혹 보고돼.]
[병원이 텅텅 비었다? 진화가 진행되던 때, 수많은 환자들이 자연치유되어 퇴원.]
최하급 종족에서 하급 종족으로 진화한 인류.
겉으로 보기에, 변화한 것은 몇몇 케이스를 제외하곤 크게 없어 보였다.
-뭔가 변하긴 변했는데, 플레이어가 아니라서 체감이 덜 되는 건가…….
-일반인은 체력 오를 때랑 느낌상 큰 차이가 안 나는 듯?
-ㄴㄴ 진화 대박이야 나 골절된 다리가 바로 회복됐어 ㅋㅋㅋㅋ 입원비 굳음 개꿀.
-병 치료가 오히려 메인 아니냐고 하더라 ㅋㅋ
-근데 귀 튀어나온 플레이어들도 은근 많던데?
-ㅇㅇ 일반인은 없는데 플레이어들 중에선 꽤 보이더라.
일반인 입장에선, 병 치료가 가장 몸에 와닿는 변화였던 이번 진화.
하나 직접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들은 대부분 부쩍 강화된 스탯 효율 증가를 체험하며, 만족감을 보이고 있는 상태였다.
다만.
많은 이들이 이번 진화에 만족하는 것과는 달리.
귀가 늘어난 사람들은 울상을 짓고 있었다.
“에휴…… 이 귀, 적응이 안 되네…….”
그리고 그중 한 명인 윤세아.
그녀는 거울 앞에서 자신의 귀를 움직였다.
그러자 쫑긋거리며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두 귀.
윤세아는 이를 보면서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허…… 삼촌. 이것 봐라? 귀로 부채질도 할 수 있어!”
“그래. 참 대단한데, 그만 움직이고 이리로 와 봐.”
펜트하우스의 거실.
이곳엔, 성지한 가족을 비롯하여 그림자여왕이 현신해 있었다.
“여왕. 좀 봐 줄 수 있어? 세아가 엘프랑 무슨 관련이 있는 건가?”
“흠…… 잠깐 살펴보겠다.”
그림자여왕이 윤세아의 귀에 손을 가져가 댄 채, 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주 미약하지만, 세계수 엘프의 흔적이 느껴지는군.”
“……그래?”
“세계수 엘프가 예전에 이곳에 실험을 했다고 했었나.”
“맞아요! 그, 가면 쓴 엘프가 건너오려다가 실패했잖아요. 실험 진행되었던 세계라고.”
윤세아는 얼른 그림자여왕의 말에 대답했다.
이 사실은, 워낙 고엘프가 대대적으로 광고를 해 버려서.
인류의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물론 자세한 내막까지 아는 사람은 성지한 정도를 제외하곤 거의 없었지만.
어쨌거나 뭔가가 행해졌다는 사실 자체는 알고 있어서.
지금 귀가 튀어나온 사람들을 가지고 그때 실험 때문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이미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그때 실험의 여파가 있는 것 같다. 인류라는 종 중 일부에, 엘프와 관련된 유전 인자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군. 한번 실험해 보겠나.”
치이익!
그러면서 그림자여왕은 윤세아의 손등을 손톱으로 살짝 베었다.
“앗!”
그러자 그녀의 손등에 혈선이 그어졌지만.
스으으으…….
그 얕은 찰과상은, 눈 깜짝할 사이에 재생되었다.
‘세계수 엘프의 재생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하군.’
이 정도면 탈인간은 확실하네.
성지한이 그걸 보며 그리 생각했을 때.
“뭐, 뭐야…… 나 엘프의 후손이었어? 근데 왜.”
슥.
윤세아는 윤세진과 성지한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왜 아빠나 삼촌은 발현되질 않았지…… 설마 나…… 주워 온 거 아니죠?”
“무슨 소리야! 산부인과에서 직접 우리 세아 안았는데!”
“나도 매형이랑 같이 갔어. 그때.”
“유전 인자의 발현 확률은 혈통과는 큰 관계가 없다. 출생의 비밀은 고민하지 않아도 될 거다.”
“그래요…….”
그 말에 좀 안도하는 윤세아.
윤세진은 그런 딸에게 안심하라는 듯, 여러 케이스들을 보여 주었다.
“세아야. 너 말고도 귀 살짝 튀어나온 사람들은 많아. 그리고 어금니 안 튀어나온 게 어디야? 이 사람은 생니를 뽑고 임플란트 한다더라.”
그러면서 그가 보여 주는 건 극단적인 케이스들.
귀가 튀어나온 건 그나마 약과라는 듯, 어금니가 맹수처럼 튀어나오거나 동공이 사라진다거나 하는 경우가 보였다.
“흠, 이빨은 웨어울프의 흔적인가. 눈은…… 여러 종족이 떠오르는군. 직접 보기 전에는 어느 누구에게 영향받았는지 특정하질 못하겠어.”
“어. 그럼, 인류에 그러면 엘프 말고도 저런 종족의 유전 인자도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런 것 같군. 신기한 일이야. 인류와 크게 연관이 없어 보이는 종족들의 흔적이, 이렇게 숨겨져 있을 줄이야.”
그림자여왕은 그러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이러면 중급 종족으로 진화할 때, 또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겠어.”
“……여기서 더 변화한다구요?”
“그래. 네 귀도 더 길어질지도 모르지.”
“으, 엘프처럼 길어지긴 싫은데…….”
세계수 엘프의 패악질 이후로, 엘프에 대한 이미지는 바닥을 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근데 그들처럼 귀가 길어질 수도 있다니.
당사자 입장에선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저, 그림자여왕님. 저거 되돌릴 방법은 없겠습니까?”
“종의 유전 인자가 발현된 현상인데, 이걸 되돌릴 순 없지. 튀어나온 귀가 보기 흉하다고 생각한다면, 신체를 변형시키는 아티팩트를 착용해서 귀를 원래 모습으로 바꾸는 게 해결책일 거다.”
“아티팩트…….”
그림자여왕에게 답을 들은 윤세진은, 바로 경매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편.
‘이거, 인류를 가지고 했던 실험과 연관이 있는 건가.’
성지한은 그림자여왕의 말을 듣고 태초의 일을 떠올렸다.
적의 일족이 한계가 없는 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 인류를 테스트하고.
거기서 이런저런 실험을 했었지.
인류에게 현재 발현되는 타종족의 유전 인자는, 그때 같이 넣어졌던 건가.
‘정말 중급으로 올라가면, 지금보다 더 다양한 종으로 분화될지도 모르겠어…….’
지금이야, 이렇게 모습이 바뀐 사람이 인구 비율로 따지면 0.001퍼센트도 되지 않기에 그래도 큰 문제가 되질 않았지만.
중급 종족으로 올라서면서 유전 인자가 더 발현되면, 인류라는 종은 여러 갈래로 분화할지도 몰랐다.
“여왕. 차라리 배틀넷에서 탈출하면 저거 초기화될까?”
“그건 나도 모르겠군. 종의 진화까지 경험한 종족이 배틀넷을 탈출하는 경우는 보질 못해서.”
“그래…….”
“그래. 진화를 경험한 종족이 뭐 하러 배틀넷을 나가겠나.”
이미 진화 맛을 봤는데, 탈출할 리는 없다는 건가.
“그래…… 누가 탈출하겠어? 꿀피부에 수명 연장 포기하긴 아깝잖아. 차라리 귀 좀 나오고 말지.”
“음…… 나야 세아 귀만 제대로 돌아오면 당장이라도 탈출하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반대가 심할 거야.”
“아무래도 그런가요.”
배틀넷 덕에 받은 진화 보너스.
이게 바꿔 놓은 인류의 사회상은 이미 상당했다.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해졌으며, 질병의 태반은 강화된 인류의 육신을 넘지 못했다.
백세 시대를 넘어서, 백오십을 추측하는 사람들까지 생길 정도로.
배틀넷이 가져온 인류의 변화는, 축복 그 자체였다.
이 정도 신체 변화상이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모래 위에 쌓아 올린 성이지.’
인류의 진화상은, 모두 성지한이 얻어 왔기에 가능한 것.
만약 성지한이 사라진다면, 이건 금방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신기루였다.
비록 지금은 하급 종족이 되었다지만, 아직도 인류는 배틀넷 세계를 헤쳐 나가기에는 허약했으니.
탈출할 기회가 생기면, 이 게임에서 빠져나오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렇게 성지한은 진화를 보고도 기존에 지녔던 생각에 변화가 없었지만.
며칠 후 열린 스페이스 리그 경기에선,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 연출되고 있었다.
=아…… 1경기, 성지한 선수 밴당합니다!
=이제는 저희 상대로, 1위 밴이 상수가 된 느낌이에요!
=세계수 엘프에서 소문이라도 낸 건가요! 처음 만나는 종족들이 어떻게 대처법을 이리 잘 아는지 모르겠군요!
성지한이 밴을 당하면서, 게임을 불리하게 시작했던 인류는.
=어…….
=선수들, 상대를 몰아붙입니다……!
오히려 전황을 유리하게 끌고 가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