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벨로 회귀한 무신 368화>
“……흐음, 싱겁군그래.”
길가메시는 다리를 꼬았다.
예전에, 동방삭의 검에 목줄이 잡혀 있던 모습과는 달리.
지금 그는 황금 왕좌에 앉아 여유로운 얼굴로 인류의 플레이를 관전하고 있는 상태였다.
“동방삭. 생각할 게 많아 보이는데, 이제 좀 딴 데 가면 안 되겠나?”
“왜,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나?”
“무슨 짓이라니. 무신도 긴급히 허락하지 않았는가. 인류 진화를 도우라고.”
“…….”
그 말에 수염을 쓰다듬던 동방삭의 손이 멈추었다.
인류 진화.
성지한이 야기한 폭풍은, 투성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친 상태였다.
‘무신께서 인류의 진화에 관심이 있을 줄이야.’
동방삭은 얼마 전 일을 떠올렸다.
여느 때와 같이 길가메시의 목에 검을 대고, 그를 감시하고 있을 무렵.
-인류가 진화를 한다고……!?
목줄이 잡힌 채로 배틀튜브를 보던 길가메시가 갑자기 화들짝 놀랐다.
-동방삭,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우린 진화를 도와야 한다!
-진화를? 우리가 그걸 왜 돕나. 어차피 오래전에 성좌가 된 몸. 인류가 진화를 하더라도 우리에게 변화는 없을 것이다.
인류가 최하급에서 하급으로 뒤바뀐다고 해도.
이미 예전에 성좌가 되었던 이들에, 획기적인 변화가 있을 리 없지.
동방삭은 왜 호들갑이냐는 듯 길가메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혹여나 지상에 영향력을 끼칠 생각은 하지 말아라. 네가 허튼짓을 하지 않는 게 무신께서 바라는 일이니까.
-이 기회를 보고도 무신의 명 타령인가…… 그래. 만약 무신의 명이 철회된다면, 날 방해하진 않겠지?
-무신께서 명을 거두신다면야 이에 따르겠다만. 잠들어 계신 무신께서 명을 거둘 리가 있겠는가.
-후후…… 기다려 보아라.
목줄이 잡힌 길가메시는 자신만만하게 웃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길가메시가 인류의 진화를 돕는 걸 허락한다. 동방삭, 그가 지상에 힘을 사용하는 것을 막지 마라. 다만, 그의 권능은 어디까지나 진화를 도울 때만 사용해야 한다.]
세 번째 종을 봉인하고 잠들어 있던 무신은, 직접 목소리를 내 이 일을 허락했다.
그리하여, 지상에 왕의 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길가메시.
그는 배틀튜브에서 활약하는 인류 플레이어 들을 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라는 명에, 모두 참으로 잘 따르고 있어. 이들의 숭고한 노력을 좀 지켜보고 싶은데, 옆에 감시자가 있으니 영 흥이 깬단 말이지.”
“그런 소리 해도 나갈 생각 없다. 네가 사용한 왕의 명령…… 얼마든지 뒤바꿔서 지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 않느냐.”
“후후…… 자네도 나의 탑이 줄어든 걸 보지 않았나. 이번 명령으로 힘을 너무 많이 썼어. 소소한 이득 정도는 챙겨도 되지 않겠나.”
동방삭에 의해 반으로 쪼개졌던 바벨탑은.
지상에 왕의 명령이 내려진 후부터, 원래 크기에 비해 반 넘게 쪼그라져 있었다.
그만큼 인류 플레이어 500에게 7일간 항구적으로 유지되는 버프는, 요구하는 대가도 상당했다.
“어쨌든 인류가 진화하면 득을 보니까, 너도 나선 것 아니냐. 소소한 이득은 거기서나 챙겨라.”
“그래서…… 꼭 날 감시하겠다고?”
“그래.”
스르릉.
그러면서, 자신의 검을 꺼내 묵묵히 이를 바라보는 동방삭.
길가메시는 그 모습을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성가시군. 이러면 정말 도와주는 선에서 끝나 버리겠는데.’
물론 주목적은 어디까지나 인류 진화였으니.
이거만 성공적으로 해도, 길가메시는 인류의 왕으로서 얻어가는 게 많았다.
하지만.
이왕 힘을 쓴 거, 이걸 더 자신에게 이득이 되도록 활용해야 했는데.
잠도 한숨 자지 않는 동방삭이 옆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고 있으니, 왕의 명령을 제대로 활용하긴 힘들어 보였다.
‘뭔 일이 터져서 어디 좀, 가 줬으면 좋겠군…….’
길가메시는 띄워 놓은 화면을 통해, 진화 에어리어에서 인류 선수들이 플레이하는 걸 지켜보면서도.
한 눈으로는 계속 동방삭을 곁눈질했다.
* * *
구궁팔괘도의 외진.
붕괴되어 가는 세상 속에서, 몸이 반으로 잘린 채 땅에 누워 있던 강상은.
그 어느 때보다 기운차게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태극이 커져 가는 걸 더 이상 방관하지 말게! 자네가 펼친 무공이야. 왜 계속 지켜보고 있나?”
“하고는 있습니다만.”
“태극을 제어해야, 마검을 생성할 수 있네. 기본이 되지 않았는데, 태극마검을 만들어 낼 순 없어. 일단 태극부터 갈무리하게. 내,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던가?”
‘알려 주기야 했다만.’
태극을 이루는 음기와 양기의 조절.
강상은 이걸 나름 친절하게 알려 준 상태였다.
음기와 양기를 동등하게 50:50으로 맞추어 조절하지 말고.
오히려 음기를 90으로 실었다가, 조금 있다간 양기에 90으로 실으며 힘의 균형을 오히려 의도적으로 깨 보라는 게 강상의 해법이었다.
‘그렇게 음기와 양기의 균형을 의도적으로 깨면, 오히려 태극이 더 커질 것 같은데…….’
처음에는 성지한도 그게 진짜 되겠나 싶어서 잠시 주저했지만.
‘이러다 또 계속 커지겠네. 일단 하자.’
태극이 주체할 수 없이 커지자, 일단은 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의 조언대로 힘을 운용해 보니.
스으으으…….
무한정 팽창하려던 태극은, 어느 순간부터 확장을 멈추고 있었다.
그걸 본 강상이 만족스럽다는 듯 말했다.
“흠…… 그래 이제 더 이상 커지지 않는군. 이렇게 잘 하면서, 왜 지금까지 그냥 두고 보고 있었나? 아. 설마. 자네, 할 줄 알면서 나를 놀린 겐가?”
“놀리다니. 그게 뭔 소립니까.”
“날 반으로 베어 넘기고, 태극마검을 사용하려는 강자가 이런 기본도 모르다니 이해가 안 돼서 말일세.”
“하늘에서 뚝 떨어진 무공이라서요. 모르는 게 많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다음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하늘에서 태극마검이 떨어졌다고……? 허 참, 특이하군. 그래도 무지를 인정하고 가르침을 청하는 건 좋은 자세일세.”
강상은 성지한의 말에 다 납득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세상에 나올 세계수의 파편을 부수기 위해, 일단은 협력할 태세였다.
“태극의 힘으로도 웬만한 것은 모두 빨려 들어가 소멸할 테지만, 저 흉물은 그 안에서도 살아남을 것이네. 태극을 무극無極으로 환원하여, 그 안에서 혼을 멸할 검을 꺼내야 하네.”
“무극에서 검을…… 그것이 마검입니까?”
“그러네. 여기서는 나도 이론상으로 생각했을 뿐, 실행에 옮기진 못한 단계지. 이건 말로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군…….”
마검을 꺼내는 단계에 대해선, 구상만 해 두고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현재의 강상.
그는 이걸 어떻게 알려 줘야 할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걸 받게.”
성지한에게 조금 전 자신이 썼던 봉을 던졌다.
휘리리릭!
봉은 날아가는 도중 채찍으로 변하며, 성지한의 손안에 빨려 들어가듯 잡혔다.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움직이는 채찍.
그것은 동방삭의 힘이 응축된, 타신편이었다.
“태극을 압축시켜, 그 안에 타신편을 넣어 보게. 그러면 마검의 흉내는 낼 수 있을 거야.”
“타신편을…….”
“타신편도 내가 멸혼을 위해 만들었던 무구. 하지만 힘이 부족하여 저 흉물을 제거하진 못했네. 하나 태극의 안에서 힘을 얻는다면 다르겠지…….”
타신편을 건네고 나서부터, 점점 힘이 빠져 가는 강상의 목소리.
이에 성지한이 슬쩍 뒤를 바라보니, 그의 육신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타신편에, 모든 힘을 담은 겁니까.”
“흉물을 없앨 수 있는 기회인데, 당연히 그래야지…… 진을 부순 자네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우습네만, 뒷일을 부탁하네…….”
스으으으…….
그 말을 끝으로, 몸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강상.
성지한은 묵묵히 이를 지켜보다가 자신의 손에서 꿈틀거리는 타신편을 태극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음과 양으로 나뉜 태극의 문양이, 일제히 타신편에 모이며.
채찍 전체가 일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급격히 뭉치는 음양의 기운.
‘타신편이 매개가 되어, 음과 양으로 나뉘었던 태극이 하나가 된다…….’
성지한은 그 안의 흐름을 보며, 이에 압도당했다.
강상이 비록 힘이 부족하여 자신에게 패배했지만.
그가 지니고 있는 무에 대한 깨달음은 감히 범접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힘이 동등했다면 그냥 압살당했겠군.’
공허의 수련장에서 힘을 비슷하게 설정하고, 동등하게 싸웠던 것도 수련장의 강상이 진짜가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지.
현실에서 그랬다면, 진작에 패배했을 것이다.
한 인간이 지닌 무리武理가 이 정도라니.
정말, 이자야말로 무신 아닌가……?
성지한은 이걸 보고 마음속 한편에, 무인의 한 명으로서 패배감이 들었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일단 배우는 데 집중하자.’
그는 잡생각은 집어 둔 채, 타신편이 야기하는 기운의 흐름에만 집중했다.
한 점으로 뭉치는 태극.
그 속에서, 타신편은 파괴되고.
하나의 검이 대신 만들어졌다.
보고, 느끼고도 이해할 수 없는 흐름이 무극 속에서 움직이고.
‘이건…….’
백색의 검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동방삭이 태극마검을 사용했을 때에 비하면 불완전하기 짝이 없고.
크기조차 훨씬 작은, 단검 정도 크기의 검.
하지만, 그것은 확실히 태극마검이 추구하던 ‘마검’이었다.
그리고.
백색의 검이 한 번 번뜩이자.
빛이 어둠을 토해 냈다.
어둠에 순식간에 잠기는 세상.
그것은 봉인된 세계수의 파편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잉. 지이잉……!
태극마검이 토해 내는 어둠에 의해, 모든 게 단번에 사라졌던 것과는 달리.
세계수의 파편은 나름대로 저항을 하기 위해, 녹색의 빛을 뿜어냈다.
하지만, 그렇게 버티는 것도 잠시.
세계수는 어둠에 잠식되고.
[‘봉인된 세계수의 파편-1’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 위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 *
‘……다시 돌아왔군. 해저로.’
성지한은 주변을 바라보았다.
만귀봉신의 문양이 작게 그려져 있는, 서해의 밑바닥.
외진이 태극마검에 의해 붕괴되자, 이곳으로 다시 역소환된 것 같았다.
‘만귀봉신 속 구궁팔괘도는, 확실히 바깥 부분이 사라졌군…….’
외진이 붕괴되었다더니.
구궁팔괘도의 외곽 부분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성지한이 이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자.
[봉인된 세계수의 파괴로 인해, 내진으로 향하는 길이 재생성됩니다. 현재 재생성 중입니다…….]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건 저번보다 재생 속도가 더 느려 보이는데. 최소한 한 달은 걸리겠어.’
이러면 내진에는 한 달 뒤에나 진입할 수 있나.
성지한은 물끄러미 구궁팔괘도를 바라보았다.
영원 스탯 얻으러 왔다가, 예상치 못하게 태극마검에 대한 가르침을 전수받았군.
‘가르침을 받아도 모르겠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지.’
성지한도 인류에겐 압도적인 무력으로 추앙받는 존재였지만.
동방삭 관련해서 그의 무를 견식할 때면, 자신이 꼭 바보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있는지 신기하단 말이야.
그때.
[붕괴된 세계수에서, 힘을 일부 흡수합니다.]
[스탯 영원이 7 오릅니다.]
‘오. 7이나?’
세계수를 완전히 없애서 그런지, 1씩 오르던 영원이 단번에 7이나 올랐다.
‘이러면 여기 온 목적도 달성했군.’
영원 스탯을 조금밖에 얻지 못해서, 지배 코드도 다 완성하지 못할 것 같았는데.
7이 더 추가되면, 이제 뒷글자도 쓰는 게 가능해진다.
‘그럼 이제 돌아가자.’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어쨌든 많은 걸 얻고 돌아간 구궁팔괘도.
성지한은 산뜻한 마음으로, 배틀넷 센터로 복귀했다.
‘벌써 아침이네.’
구궁팔괘도 안에 그렇게 오래 있었나.
성지한은 해가 뜨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센터 쪽에 도착할 수 잇었다.
‘오늘은 왕의 명령을 없애고, 성좌 후원을 시작해야겠군.’
왕의 명령 버프 효과가 좋긴 하지만, 길가메시 걸 남겨 둘 수야 없지.
그렇게 마음먹은 성지한은 배틀넷 커넥터가 있는 공간으로 이동했다.
“어…… 서, 성지한 님!?”
“드디어 오셨다!”
‘드디어?’
어제도 봤는데 왜 이렇게 반기지?
성지한은 고개를 갸웃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사, 삼촌……! 어디 갔었어?”
사람들 사이에서, 윤세아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왜? 하루 만에 무슨 일 생겼어?”
“하루……? 삼촌이 사라진 지 5일이나 지났다고!”
“5일?”
성지한은 그 말을 들으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구궁팔괘도 안에서, 시간이 왜곡된 건가?
“이런…… 승률은, 승률은 어떻게 나왔어?”
성지한이 심각한 표정으로 묻자, 윤세아는 눈을 깜박였다.
“승률…… 70%인데?”
“……그래?”
뭐야.
‘끝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