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벨로 회귀한 무신 359화>
“누나가 이걸 줬다고?”
“응.”
성지한은 윤세아가 준 책을 보고는 눈빛을 가라앉혔다.
고서처럼 낡은 표지 위에 써 있는 4글자의 한자, 태극마검.
이 책을 어떻게 누나가 준 거지?
“누가 줬다고 이야기하진 않고?”
“그게…… 어비스의 주인이 줬다는데?”
윤세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어비스의 주인에 대해선, 그녀도 성지한이 수행했던 종말 미션 때 방송으로 본 적이 있었기에.
그 눈알이 가득 붙은 거인의 이미지와, 태극마검은 생소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태극의 망혼 속의 내가 보낸 건가. 이거.’
성지한은 그 말을 듣고 태극마검의 출처에 대해 짐작할 수 있었다.
태극의 망혼 속에 있는, 패배한 성지한의 파편.
그들은 자신에게도 같이 하자고, 그래서 어비스의 주인 육체를 완전히 지배하자고 제안했었지.
미션 수행할 때도 보면 태극마검의 힘을 비슷하게 사용하더니.
이런 책까지 줄 정도로 그 검에 대한 숙련도가 있었나?
‘살펴나 볼까.’
스르륵.
성지한은 책을 넘겨보았다.
옛날 조선시대 고서 같은 책은, 막상 다음 장으로 책장을 넘겨보니 아무런 내용이 없었다.
“뭐야 이거. 텅 비어 있는데?”
옆에서 이를 신기하게 지켜보던 윤세아가 김 샜다는 듯 투덜거렸지만.
“아니. 형식만 고서일 뿐, 여니까 글자가 뜨네.”
“삼촌만?”
“그런가 봐.”
성지한은 텅 빈 책 페이지 위로 떠오르는 글자를 바라보았다.
[봉인된 세계수를 발견했군. 너는 우리 중, 가장 빠르다.]
어비스의 주인이 말하는 ‘우리’는 당연히, 성지한 자신이겠지.
성지한은 다음장을 넘겼다.
[하지만 아무리 빨라도 태극마검은 뛰어넘지 못한다. 그게 우리의 모습으로 증명된, ‘성지한’의 한계다.]
태극마검의 벽을 넘지 못하고 수없이 패배했던 성지한의 잔해.
성지한은 조각조각 나 있던 자신의 얼굴을 떠올리며, 페이지를 넘겼다.
[하나 너는 이를 인정하지 않겠지. 태극마검에 도전하고, 결국 패배할 것이다. 그 전에 우리가 먼저 마검을 보내겠다. 한번 터득해 보아라.]
동방삭에게 패배하기 전에, 미리 대비하라고 마검을 건네준다고?
어비스의 주인이 이렇게 이해심이 넓은 상대였나.
하나 뒷장을 펼치자, 그의 본심이 드러났다.
[하나 태극마검을 얻지 못한다면…… 넌 온전한 형상으로 우리와 합세하리라.]
그러면서, 성지한 눈앞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기프트 – 마검의 낙인을 받으시겠습니까?]
-기프트 - 마검의 낙인 (등급 ??)
-어비스의 주인 ‘태극의 망혼’이 부여한 조건부 기프트.
-미완성된 태극마검을 계승,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1년간 검의 숙련도가 유의미하게 상승하지 않거나, 플레이어가 완전히 사망하게 된다면 어비스의 주인 ‘태극의 망혼’에게 강제적으로 플레이어의 혼이 귀속됩니다.
-이 기프트는 어비스의 주인 ‘태극의 망혼’이 소멸할 경우, 같이 사라집니다.
등급이 ?로 나온 마검의 낙인 기프트.
미완성한 태극마검을 계승, 사용할 수 있다는 효과만 보면 등급 SSS를 줘도 모자랐지만.
눈에 걸리는 부가 조건이 아래 있었다.
‘1년간 검의 숙련도가 제자리거나, 내가 죽으면 태극의 망혼에 나도 들어가는 거군.’
이건 다른 성지한처럼, 동방삭한테 죽어서 파편으로 오지 말고.
온전한 형상으로 와서 태극의 망혼에 합세하라는 의도인가.
이런 거 보낼 거면 진작 보내지, 왜 지금 보냈지?
그동안 특이할 만한 일이라면…….
‘봉인된 세계수를 발견한 게 그에겐 그렇게 큰 건이었나.’
성지한은 이번에 있었던 일을 되짚어 보면서, 기프트에 대해서 생각했다.
마검의 낙인.
이름부터 받기 싫게 생긴 데다가, 이런저런 조건이 까다로운 기프트였지만.
‘1년 동안 마검의 숙련도도 올리지 못할 거면, 어차피 동방삭에게 죽는 건 마찬가지겠지. 그리고 죽고 나서의 혼이 귀속되는 건…….’
죽으면 어차피 끝이지.
리스크를 따져 보던 성지한은 굳이 이를 안 받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받겠다.”
그가 그렇게 대답하자.
파스스스…….
금방 바스러지는 책.
그와 동시에.
[‘기프트 – 마검의 낙인’을 받았습니다.]
[스킬 – 태극마검 (미완성)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 창에선,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렇게 간단히?’
성지한은 바로 스킬창을 확인해 보았다.
[태극마검太極魔劍]
-스킬 등급 : EX
-순리를 역으로 돌려, 세상을 멸하는 검.
-미완성 상태로, 사용시 스탯 ‘무혼’이 일부 소모될 수 있다.
미완성 상태임에도 등급이 EX로 측정된 태극마검.
검에 대한 설명은 짧았지만, 등급만으로도 위력이 압도적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성지한의 이목을 끈 건 뒷부분이었으니.
‘……무혼을 쓸 수도 있다고?’
아니, 아무리 미완성이라고 해도 그렇지 무슨 스탯을 깎아먹어?
그나마 다행인 건, 스킬창의 설명이 ‘소모된다’가 아닌, ‘소모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스킬 한 번 썼다가 힘들게 올린 스탯이 사라질 수 있다는 리스크는 너무 컸다.
거기에.
[태극마검을 공개된 장소에서 사용하다 동방삭의 이목에 띄면, 바로 그가 널 죽이러 올 것이다.]
먼지가 되던 책의 마지막 장에는.
태극의 망혼이 남긴 마지막 글귀가 떠오르고 있었다.
이러면 뭐 스페이스 리그 같은 데서 이걸 쓰진 못하겠네.
‘공허의 수련장에서나 쓰면서 수련을 해야겠군.’
이래서야 지금은 온전히 수련용에 불과한 태극마검.
그래도 성지한은 만족했다.
‘어차피 스페이스 리그에선 지금 나와 대적할 상대도 없으니 굳이 꺼낼 필요도 없지. 최강의 적인 동방삭을 대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아.’
거기에 태극마검을 발전시키면, 다른 무공에도 시너지 효과가 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성지한은 얼른 수련장에 가서, 이 검을 뽑아보고 싶었다.
“세아야. 나 수련 좀 하러 갈게.”
“어…… 또?”
“응. 일정 뭐 없지?”
“스페이스 리그가 한 15일 남긴 했을걸.”
“그럼 넉넉하네.”
“삼촌…… 근데 레벨 업은 안 해?”
“지금 더 급한 게 있어서. 간다.”
슉!
손을 가볍게 흔든 성지한이 보랏빛 연기에 물들며 사라지자.
윤세아는 눈만 깜빡거렸다.
‘태극마검 써 보려고 간 건가…… 그게 뭔데 삼촌답지 않게 저렇게 급하지?’
수련실에 있다가 나왔으면 숨 좀 돌릴 법 한데.
한국 슈퍼컵만 따 주고 다시 들어가네.
윤세아는 그렇게 삼촌이 사라진 자리를 보다가.
“1등이 저러는데, 나도 트레이닝해야지…….”
기지개를 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인류의 궁수를 통틀어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가 된 그녀였지만.
집안에 너무 괴물들이 많아서, 이렇게 앉아서 놀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빠는 전사 2등. 엄마는 성좌. 삼촌은 인류 1등…….”
뭐 이런 가족이 다 있어?
윤세아는 피식 웃으면서 일어나, 트레이닝 룸으로 걸어갔지만.
툭!
그녀가 거실을 나오기도 전에.
보랏빛 포탈이 열리며, 성지한이 거기서 떨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1분? 삼촌 왜 벌써 왔어?”
“수련장 부서졌다.”
성지한은 표정을 굳히며, 조금 전 일을 떠올렸다.
* * *
EX급 스킬, 태극마검.
조건이 이리저리 붙긴 했지만, 어쨌거나 이 스킬을 손쉽게 얻은 성지한은 빨리 이걸 사용해 보고 싶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도 이렇게 두근거리진 않겠어.’
그렇게 기대감을 가득 품은 채 수련실로 들어온 성지한은.
“태극마검.”
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자.
스으으으…….
그의 등 뒤로, 저절로 떠오르는 태극.
이는 동방삭이 대만 플레이어에게 강림했을 때와 비슷한 현상이었지만.
‘언제까지 커지는 거야?’
등 뒤의 태극은 끝없이 확장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커지면서, 정방향으로 돌아가는 태극의 문양.
슈우우우…….
공허의 수련장에서 띄워 놓았던 맵이, 태극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태극이 한 바퀴도 안 돌아갔는데, 힘의 소모가 엄청나군…….’
끝도 없이 확장하면서, 몸 안의 힘을 싹 다 써 버리고 있는 태극마검.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사라지는 건 공허였다.
성지한은 동방삭이 예전에 전수해 준 자하신공을 운용하면서 생각했다.
‘근데 동방삭 자신은, 공허 안 다룬다고 하지 않았나.’
공허 다루면 영생을 살지 못한다고 하면서.
자하신공도 직접 운용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만든거니 쓸 만할 거라고 전수해 줬었지.
그리고 동방삭의 말대로, 자하신공은 상당히 쓸만해서 성지한이 공허를 운용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태극마검에도, 공허가 사용되면 안 될 거 같은데.
‘흠…… 어비스의 주인이 따라 한 태극마검이라 그런 건가?’
동방삭 버전의 태극마검을 따라 할 거면, 공허를 제약하는 게 나은가.
성지한은 자하신공을 통해, 일부러 공허의 사용을 억제해 보았다.
그러자 에너지원으로 대신 사용되는 건 나머지 스탯들.
거기서도 특히 무혼과, 스탯 영원이 지닌 생명의 기운이 대신 합세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들어가자, 공허 때와는 달리 확장이 멈춘 태극은.
이제 서서히 회전 속도를 빠르게 돌리고 있었다.
[무혼이 1 감소합니다.]
‘……투자다. 투자.’
그리고 사라지는 스탯 무혼.
성지한은 아쉬운 마음을 다잡으며, 태극의 회전을 분석하려 했다.
능력치도 소모한 지금, 최대한 터득해서 발전시켜야지.
그렇게 그는 태극에 빨려 들어가는 세상을 지켜보며, 마검에 대한 이해도를 넓혀 나갔지만.
슈우우욱……!
태극이 계속 돌아가자, 세상의 붕괴가 급격히 빨라지기 시작했다.
“맵 설정, 바꾸겠다.”
태극에 집중하던 성지한이, 사라지는 세상을 보곤 맵을 다른 거로 바꾸려고 했지만.
[공허의 수련장이 붕괴 직전입니다.]
[설정 변경이 불가능합니다.]
맵이 아니라, 수련장 자체가 붕괴하고 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니, 태극만 띄웠는데 수련장이 부서지고 있다고?
‘여길 잃을 순 없지.’
시간의 흐름을 조절할 수 있는 공허의 수련장.
이곳을 통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발전을 이루어 냈던가.
이 장소를 태극마검으로 날려 버렸다간,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할 거다.
성지한은 태극의 힘을 거둬들이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슈우…….
태극의 회전은 느려졌을 뿐, 계속 돌아가고는 있었다.
‘일을 벌이는 것보다 수습하는 게 더 힘들군.’
스킬 써서 태극 띄우는 거보다, 이걸 없애는 게 더 힘든 성지한.
그가 필사적으로 태극의 흐름을 저지하고 있자니.
[……뭐 하고 계십니까.]
붕괴하던 세상의 하늘 위에.
별 두 개와 초승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입처럼 위치한 초승달과, 두 눈처럼 위치한 별.
이것은, 성지한이 예전에 본 적 있는 현상이었다.
“아레나의 주인인가.”
[네. 수련장이 파괴되고 있기에 와 보았습니다.]
“수련장 관리까지 하는 줄은 몰랐군.”
[이런 적이 극히 드물어서요. 한데 그 힘은…….]
번쩍!
태극을 보자, 번쩍 빛나는 두 별.
[……위험한 것을 손에 넣으셨군요. 그 힘은 당신을 안에서 붕괴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좀 아나?”
[어느 정도는요.]
“공허의 존재인 네가 안다니…… 태극마검, 동방삭의 깨달음만으로 완성된 건 아닌 건가?”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럼 간략하게라도 해 봐.”
[한 인간의 깨달음만으로는 불가능하죠. 제가 드릴 수 있는 정보는 여기까지입니다.]
성지한은 그 말에 눈을 빛냈다.
태극마검.
아무리 괴물인 동방삭이라고 해도, 이 힘을 홀로 완성시킨 건 아니었나.
[여하튼, 그 힘. 더 이상 여기서 사용하지 마십시오.]
“왜?”
[보시다시피, 수련장이 붕괴됩니다.]
성지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태극을 결국 멈추지 못해, 모두 다 빨려 들어가 버린 세상.
여기에 유일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건 아레나의 주인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특별히 제 직권으로 수리해 드리겠습니다만…… 다음에도 이러면 수련장이 회수됩니다.]
“……공허의 수련장이 회수된다고?”
[네.]
“허. 이럼 태극마검 수련할 곳이 없는데…….”
[레벨 500이 되면 공허의 수련장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수련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성지한은 그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뭔 놈의 무공이 이렇게 세?
수련 한번 하기도 힘들군.
[그럼 수리해야 하니까, 잠시 로그아웃해 주십시오. 수리가 끝나면 메시지를 보내겠습니다.]
“아, 알겠다…….”
성지한은 그렇게, 결국 자신의 수련장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태극마검…… 스킬은 얻었는데 쓸 수가 없네.’
한 번 더 썼다간 공허의 수련장을 잃을 기세니.
성지한은 아레나의 주인이 말한, 업그레이드 조건을 충족시키기로 했다.
‘아무래도 레벨 업을 해야겠군.’
그는 요 근래 접속하지 않았던 배틀넷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