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벨로 회귀한 무신 353화>
뭔가 보았냐니.
‘충격적인 걸 보긴 했지.’
성지한은 어비스의 주인, ‘태극의 망혼’을 떠올렸다.
거인의 머리 영체를 지나고 나니, 그 안에는 그간 태극마검에 갈렸던 성지한이 있었지.
‘하나 그 안에 내가 있다고 이야기하긴 좀 그렇군.’
그간 피티아가 성지한에게 많은 도움을 주긴 했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무신의 종이었으니 모든 사실을 밝히기는 꺼려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는다면 저쪽의 정보도 기대하긴 힘들겠지.
“붉은 눈의 거인과, 나무 거인의 머리가 있더군.”
성지한은 자기 건만 빼고, 적의 일족과 목신족의 머리를 본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거인의 머리라……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기본적으로는 영체의 형태였다.”
그렇게 말문을 연 성지한이 거인의 머리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 주자, 피티아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초의 존재로 추정되는 두 종류의 거인이군요…….”
“그들에 대해 아나?”
“네. 당신이 종말 미션을 수행한 이후부터, 예언…… 아니, 종말한 세계의 데이터를 읽을 때 종종 나오기 시작했어요.”
지이이잉…….
피티아가 손을 펼치자, 그 위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처음 나타난 건, 붉은 눈의 거인.
드래곤 로드가 적의 일족이라고 칭한 이들은.
각자 생김새는 달라도, 특지적인 붉은색 눈을 지니고 있었다.
“붉은 눈의 거인…… 이들은 지금은 행방불명된 ‘적색의 관리자’를 모시는 ‘적의 일족’입니다.”
적의 일족.
그들에 대해서는 성지한도 본 적이 있었다.
길가메시가 이끄는 세력에 의해 잡혀서, 십자가에 매달려 혈족의 창에 의해 처형을 당했었지.
그리고.
‘길가메시를 탄생시킨 붉은 눈도, 그들이 지닌 눈과 비슷했다.’
길가메시가 성지한에게 보여 주었던 영상에선.
거대한 붉은 눈이 소용돌이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인류의 성장 한계를 없애고, 이들에게 수액을 먹이며 테스트하던 붉은 눈.
그들의 눈 모양새는 적의 일족이 지닌 것과 매우 흡사했다.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수액’을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지만, 길가메시 한 명만 이를 견디고 살아남았다.
“적의 일족이라…… 대체 뭐 하는 놈들이지?”
“적의 일족…… 이들의 목적에 대해선 저도 완전히는 몰라요. 다만, 데이터를 읽은 바에 따르면.”
지이이잉…….
붉은 눈의 거인 모습이 사라지고, 새롭게 떠오르는 나무 거인.
“그들의 목표는 이 나무 거인이 되는 것이었어요. 목신족이라고 불리는, 세계수로 만들어진 거인. 이들은 이를 위해 지구에 심어졌던 세계수를 장악하고 온갖 실험을 자행했죠.”
“세계수라 하면…… 엘프의 세계수를 말하는 건가?”
“네, 맞아요. 엘프 측의 세계수 실험소장이, 적의 일족을 끌어들였죠.”
성지한은 그 말에 예전에 지점장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지구의 실험소장은 세계수와 자신을 융합시켰습니다. 거기에 강력한 종족들의 데이터까지 섞었지요.
-지구 쪽과는 연락이 끊겼고, 나중에 연합의 조사단이 그쪽에 파견되었습니다만…… ‘특급 에러 발생’이란 메시지만 보내고 실종되었죠.
세계수와 자신을 융합시켰던 지구의 실험소장.
그와 적의 일족이 협력해서 만들어 낸 결과물이 바로 저 목신족인 건가.
“그럼 적의 일족이 죄다 목신족으로 변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비스의 주인 안엔, 둘 다 존재하던데.”
“그러기엔, 자원이 부족했거든요.”
“자원?”
“네.”
피티아는 그러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모두가 목신족이 되기엔, 인간의 숫자가 부족했어요.”
“……인간이 목신족이 되기 위한 자원이었나?”
“예. 그것도, 길가메시의 재능을 이어받은 인간…… 세계수의 힘을 견딜 수 있는 이들이 주요 자원이었죠. 인류는, 그들의 가축이었습니다.”
인류의 성장 한계를 없애고, 실험체로 실험하던 게 이것 때문이었나.
성지한은 피티아를 통해, 태초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한 단계 더 알아 갈 수 있었다.
“그렇군…… 거인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네 덕에 어느 정도 알겠다. 하지만…… 이게 중요한가?”
“네?”
“그들은 결국 지금 다 사라진 상황이잖아. 머리들이 어비스의 안에 남긴 했다만.”
적의 일족이 인류를 지배했건, 또 다른 외계인이 지배했건.
중요한 건 현재 상황.
성지한이 현실주의적인 이야기를 꺼내자, 피티아는 눈을 반짝였다.
“그 거인들 머리만 남은 사실이 중요해요.”
“머리가?”
“네. 지한 님, 엘프들 재생력 기억하시죠?”
“그래. 바퀴벌레 저리 가라 할 녀석들이지.”
“세계수 연합의 말단이라고 할 수 있는 엘프들의 재생력도 그렇게 강한데…… 적의 일족이나 목신족 같이, 세계수와 융합을 시도하던 이들은 어떻겠어요?”
“뭐, 강하긴 하겠지.”
성지한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혈족의 창에 찔렸던 거인들을 떠올렸다.
아무리 재생력이 뛰어나다 한들, 소멸코드가 적혀 있던 창까지는 견디지 못했던 적의 일족.
여기서 그들은 일단락 난 거 아닌가?
하나.
“비록 그들의 육체는 이미 사라졌지만, 지한 님이 봤듯이…… 그들의 혼은 완전히 없애지 못했어요.”
“머리만 남은 영체를 말하는 건가?”
“네. 처음에는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지만, 두 종족의 혼은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합치며 규합하더니 서서히 수복해 나갔죠.”
“혼이…….”
“낮과 밤의 경계가 무너지고, 신족의 혼은 오히려 육신에 갇혀 있을 때보다 널리 퍼져 역병처럼 창궐했죠. 이윽고 세상엔, 만귀가 날뛰었어요.”
“만귀?”
성지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단어에, 연상되는 것이 있었다.
“만귀봉신과 이 상황…… 관련이 있나?”
* * *
“네.”
멸신결 만귀봉신.
영체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힘을 자랑하는 이것은, 원래는 동방삭의 업이어야 했을 무공이었다.
하나 무신에게 강탈당한 후, 그는 만귀봉신 대신 구궁팔괘도를 대신해서 펼쳤었지.
“인류를 구원했던 길가메시가 종적을 감추고. 사람들이 거인의 혼에 의해 고통받을 때…… 동방삭이 나타나 이들을 봉인했습니다.”
“그의 업은 무신에게 빼앗긴 게 아니었나?”
“제가 본 데이터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는 세계를 다니며, 거인의 혼을 봉인시키는 데 몰두했죠…… 봉인을 하는 주체는 분명히 동방삭이었습니다. 다만.”
피티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봉인엔 한계가 있었어요. 두 종족의 재생력이 워낙 탁월했기 때문에, 봉인진 안에서도 그들의 혼은 꿈틀거렸죠…….”
“그래서?”
“동방삭은 무신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일은 데이터가 전혀 읽히질 않았어요.”
번쩍. 번쩍.
피티아의 눈에서 몇 번이고 빛이 뿜어졌지만.
아무리 시도해도 무신과 만난 이후의 동방삭에 대해선 정보가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결론은 결국 못 봤다는 거냐.”
“네…… 그의 이후 행적, 중요한데 말이에요.”
“그가 무신과 만나서 했던 일? 결국 만귀봉신의 업을 빼앗기고, 영생을 받은 거 아닌가.”
“음…… 하지만 동방삭은 무신의 종 중에서도 수준이 달라요. 투성에서 한참 성좌 사냥을 나섰을 때, 그는 무신보다도 공포의 대상이었죠.”
“무신보다도?”
성지한은 그 말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우주천마라고 자기를 자칭할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는데.
주인인 무신보다 악명이 높았다고?
“진짜 동방삭은 수준이 다르다니까요? 엄~~~청나게 강해요. 그가 무신의 종을 계속 자처하는 한, 당신에겐 좋을 게 없어요. 무신을 넘을 가능성이 아예 사라진다구요.”
“넌 무신의 종이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저는…… 하아.”
피티아는 성지한의 반문에 한숨을 쉬었다
“데이터 로딩을 하면서, 멸망한 세계에서의 제 운명도 볼 수 있었어요. 어땠는지 아세요?”
“아니.”
“하나같이 성화를 피워 올리며, 종말구현을 사용했어요. 죄다 분신자살했다고요!”
“그래?”
“아니, 뭐 그래요. 그게 내 운명이라면, 나의 업이라면 받아들이겠어요. 하지만, 매번 죽으면서. ‘아…… 이게 아닌데.’하고 죽더라니까요?”
피티아는 그렇게 자신의 죽음을 보고는 열변을 토해 냈다.
“무신은 분명히, 절 속였어요.”
“뭘 속인 거 같은데?”
“그건 아직 모르겠지만…… 종말구현 때 제가 울부짖던 걸 보면 분명 뭔가 있어요.”
“……알겠다. 그럼 앞으로는 어쩔 생각인데?”
“동방삭은 아직도 무신에게 확고한 충성을 보이고 있어요. 그 자신은 영생을 주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야기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많죠.”
씨익.
피티아는 입꼬리 한쪽을 올렸다.
“동방삭이 그에게 충성하는 이유를 찾아서, 그 요인을 없애야 해요. 무신을 제압하기 위해선, 무신의 검이나 다름없는 그를 떼어 놓아야 한다구요.”
“말은 좋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찾아?”
“아까 말한, 읽히지 않았던 데이터를 더듬어 봐야죠.”
동방삭과 무신이 만났을 때를 말함인가.
성지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안 읽히는 걸 어떻게 알아보나?”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그냥 손 놓고 있을 순 없죠! 일단 그 둘이 만난 그 장소로 가 보자구요.”
“그게 어딘데?”
“제 진짜 권능 좀 써 보세요.”
“빙천검우? 알았어. 그럼 밖으로 나가자.”
성지한이 창문을 열면서 손짓하자.
피티아가 그에게 두 손을 뻗었다.
“혼자 가지 말고, 저 좀 안아 줘요.”
“……내가 왜?”
“밖에 날아가서 쓸 거잖아요. 저 지금 못 날아요. 투성에서 몰래 나온 거라구요. 힘쓰면 안 돼요.”
“…….”
두둥실.
성지한은 소피아의 몸을 띄운 채로 밖으로 나갔다.
“절 무슨 물건 띄우듯이 띄우고…… 사람이 참 정이 없네요.”
“그거 네 몸도 아니잖아.”
“제 후원 플레이어도 기뻐할걸요?”
뒤에서 둥둥 떠오른 상태로, 한소리 하던 피티아는.
혼원신공混元神功
멸신결滅神訣
빙천검우氷天劍雨
성지한이 빙천검우를 쓰자,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저 좀 검우에 태워 주실 수 있을까요?”
“그야 쉽지.”
툭.
거대한 얼음 검 위에 올라서는 피티아.
그녀가 그 위에 무언가를 그리자.
슈우우욱……!
검우 한 가닥이 급속도로 팽창하여, 하늘을 주파하기 시작했다.
‘어디 가는 거지?’
고개를 갸웃하며, 하늘을 가르는 검우 뒤를 따라가는 성지한.
“저 떨어지지 않게 잡아 주세요!”
“그래.”
피티아의 몸을 검우와 밀착시킨 상태로, 그는 오랜 시간을 쭉 날아갔다.
“……어디까지 가는 거야? 서해 바다 나왔는데?”
“조금만 더 가면 될 거 같아요!”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그 소리만 벌써 몇 번째인지.
‘이러다가 중국까지 가겠군.’
성지한은 한숨을 쉬며, 어디 끝까지 가 보기로 했다.
그렇게 해안선을 넘어, 서해 한복판에 다다른 피티아는.
“여기예요!”
바닷물만 찰랑이는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제대로 찾은 거 맞아?”
“……아마도요?”
자기가 안내해 놓고도 너무 바다 한복판이라, 확신하지 못하는 피티아.
‘가 보자.’
성지한은 그녀를 데리고 바다 쪽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물 위에 다다르기 전까지만 해도, 심드렁한 그였지만.
‘……음?’
점차 물과 가까워질 수록, 그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바다 아래에서.
그에게는 익숙한 기운이, 미약하게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거, 생명의 기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