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벨로 회귀한 무신 290화>
“길가메시를 죽이라고?”
“그렇습니다.”
성지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길가메시.
무신의 5번째 종이자, 성좌명 ‘태초의 왕’인 그는.
겉으로 드러난 것만 따지면 성지한에게 우호적이었다.
롱기누스에 대해 경고해 준 것은 물론, 천수강신의 운용법 - 엔키두까지 알려 주었으니까.
물론 그 속내야 알 수는 없었지만, 아레나의 주인 말만 듣고 그를 적대할 수는 없는 노릇.
성지한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길가메시가 살아 있는 한, 배틀넷을 클리어해도 초대장이 날아든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지이이잉.
우주 형태의 아레나의 주인 얼굴이 또다시 변했다.
이번에 드러난 얼굴은.
[지구인을 배틀넷에 초대합니다.]
2010년, 인류가 배틀넷에게 받았던 초대장이었다.
“인류는 형편없이 약합니다. 그들에게 배틀넷 초대장을 날리는 행위는, 종의 절멸을 뜻합니다. 우리는 그러기에 신중합니다. 인류라는 종이 저희가 정한 선을 한참 넘어야만 초대장이 갑니다.”
“그리고 그 선을 넘은 건 길가메시고? 하나 그는 오래전 사람이다. 초대장 날릴 거면, 진작 날려야 했지 않나?”
“그는 지금까지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공허의 눈을 피한 채, 숨어 있었지요. 하나 그가 살아 있음이 밝혀지고, 배신자임이 확인된 이상. 초대장은 계속 날아갈 겁니다.”
“그렇게 배신자를 잡고 싶으면, 공허 너희들이 길가메시가 있는 투성에 가면 되잖아. 왜 지구를 쳐들어오는 거지?”
“투성…….”
아레나의 주인의 얼굴이 이번에는 투성으로 변했다.
수많은 성좌의 무구가 둥둥 떠 있는 그 삭막한 행성을 보자.
성지한은 아레나의 주인이 투성에 대해서도 파악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곳에는 저희가 개입하지 못합니다. 투성의 주인인 ‘방랑하는 무신’과, 윗분 사이에는 저희도 알지 못하는 협약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지구를?”
“예. 길가메시의 근간은 결국 지구의 인류. 그들이 멸절하면, 그도 바탕이 사라져 힘을 잃게 됩니다.”
“……당신은 어떻게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지?”
드르르륵.
성지한의 물음에, 아레나의 주인의 등 뒤에 보랏빛으로 이루어진 사슬들이 튀어나왔다.
천수강신의 사슬에 비하면, 생명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지만.
그보다 훨씬 강력한 공허의 힘이 느껴지는 사슬.
“‘공허의 구속구’. 제가 길가메시에게 알려 준 권능입니다. 원형과는 달리, 그에게 맞게. 특수한 변형을 거쳤지만 말입니다. 이런 인연이 있으니, 그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고 있지요.”
“당신은 그럼 공허 측인 거군.”
“맞습니다. 그것도 꽤 고위직이죠. 아레나를 관리하고 있으니까요.”
자기 입으로 자신을 공허의 고위직이라 소개하는 아레나의 주인.
성지한은 그 말에 누나 성지아가 떠올랐다.
“그러면 혹시, 공허의 마녀가 어떻게 하면 원래대로 돌아오는지 알고 있나?”
“공허의 마녀?”
길가메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공허의 마녀가 튀어나오자, 잠깐 침묵을 지키던 아레나의 주인은 또다시 얼굴을 변형했다.
석화된 성지아의 모습이었다.
“지구의 마녀…… 꽤 괜찮은 소질을 지닌 마녀군요. 이 정도면, 공허에서도 중히 쓰일 터입니다만.”
스으윽.
아레나의 주인이 손을 뻗자, 보랏빛의 열쇠가 허공에서 생성되었다.
“길가메시를 처리해 주신다면, 제 권한으로 열쇠를 드리지요.”
“열쇠를?”
“그렇습니다. 마녀의 자물쇠를 풀면, 원래대로 돌아갈 겁니다.”
‘뜻밖의 곳에서, 누나를 풀어 줄 실마리를 잡았군.’
성지한은 가만히 열쇠를 바라보았다.
인류의 해방에, 누나의 귀환까지.
길가메시를 처리함으로써 주어지는 보상은 상당했다.
다만.
‘저 말을 믿을 수 있냐가 문제지.’
스페이스 리그에서 튀어나온 존재들의 말은, 다들 한 번쯤은 거르고 들어야 했다.
특히 얼굴이 우주 배경인 아레나의 주인은 겉으로만 봐도 수상쩍기 그지없어서.
저 말을 온전히 신뢰할 수는 없었다.
성지한은 일단은 유보적인 태도를 내보였다.
“난 이제 다이아에서 마스터 리그로 올라가는 플레이어에 불과하다. 아직 그에게 대항하기는 힘들어.”
“후후. 물론 지금 당장 죽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당신의 능력으로는, 죽일 수도 없겠죠.”
뚜벅. 뚜벅.
아레나의 주인은 고개를 끄덕인 채, 뒤로 물러섰다.
“다만 인류를 배틀넷에서 해방시키고 싶다면, 그리고 공허의 마녀를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다면…… 이를 기억해 두시라는 겁니다.”
“참고는 하지.”
“함부로 믿지 않는 것. 좋은 자세입니다.”
스으으윽…….
아레나의 주인의 육체가 서서히 어둠 속으로 물들고.
“그리고 저는 눈감아 드리겠습니다만…… 앞으로 적색의 관리자의 능력을 드러내는 데 있어 신중하시지요. 대성좌에게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꽤 곤욕을 치를 겁니다.”
“충고 고맙군.”
“별말씀을. 오래 살아남아, 계속 ‘변수’로 남아 주시길 기원하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레나의 주인은 사라졌다.
[승급전이 종료됩니다.]
[플레이어 성지한이 마스터 리그로 승급합니다.]
[로그아웃됩니다.]
* * *
[최초의 마스터, 성지한.]
[수련의 성과는 불? 성지한의 능력, 기존과 달랐다.]
[게임 영상의 반 이상이 보이지 않았던 성지한 승급전.]
[번역은 왜 안 돼? 배틀튜브에 대한 시청자들의 불만이 폭주하다.]
성지한이 홀로 마스터 리그 승급전을 치르고 올라가자, 모든 뉴스는 성지한의 승급 소식을 다루었다.
한 선수에게 쏟아지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엄청난 스포트라이트.
하나 인류의 배틀넷 전력 중 성지한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 본다면, 이는 결코 과하지 않았다.
-왜 자꾸 화면이 안 보임?
-뭔가 초월적인 존재들 나올 때마다 송출 중지되더라.
-성지한이 멈추는 건가?
-아닐걸? 성지한 상대들이 다 영상 차단하는 걸 거야.
-그 불이랑 이야기 나누는 것도 번역이 안 되더라.
-ㄹㅇ 맨날 자동번역 된 거 듣다가 외계어 나오니까 뭔가 싶었음 ㅋㅋ
“이번 승급전은 좀 심하긴 했어.”
성지한 뉴스만 나오면 정독하는 윤세아도 리플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삼촌이 잡몹들 쓸어버리는 것만 나오고. 맨 마지막에는 영상 거의 안 나왔거든. 거기에 그 불덩이도 뭐라고 말하는지 번역도 안 되고.”
“나도 그놈 말 처음엔 안 들렸다.”
화신의 힘을 흡수하고 나서야 들렸던 화신의 언어.
성지한은 그래도 결국엔 듣긴 했지만, 시청자들은 계속 번역이 안 된 채로 화신의 말을 들었던 건가.
성지한은 자신의 배틀튜브 영상을 빠르게 쭉 재생해 보았다.
화신의 잔재가 본신을 드러낸 장면부터, 완전히 삭제된 영상.
그리고 시커먼 화면 위에는.
[아레나의 주인에 의해 삭제된 영상입니다.]
보랏빛의 글자가 은밀히 새겨져 있었다.
성지한은 옆에 있는 윤세아에게 물어보았다.
“너 저 글자 보이냐?”
“응? 검은 화면에 뭔 글자?”
“공허의 힘으로 은폐되어 있는데, 자세히 봐 봐.”
“공허로? 어. 잠깐만. 인벤토리.”
윤세아는 인벤토리에서 활을 꺼낸 채.
자신이 지닌 공허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예전에 비하면, 확실히 강하게 느껴지는 힘.
‘녀석, 꽤 강해졌네.’
성지한이 조카의 성장을 보고 눈에 이채를 발하는 사이.
윤세아는 온 힘을 끌어내고는.
“아!”
그제야 글자를 봤는지 화들짝 놀랐다.
“아레나의 주인에 의해 삭제되었다고 나오네? 와. 이런 글자가 숨겨져 있었어?”
“어. 공허 능력이 없다면, 안 보이는 문자네.”
“신기하네…… 어?”
검은 화면 속 글자를 신기하게 쳐다보던 윤세아는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엄마가 삼촌보고 아레나의 주인 만났냐고 묻는데?”
“봤지. 그가 날 아레나의 루키로 선정했거든.”
“어…….‘아레나의 주인. 그는 공허 순환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절대자다. 혹시나 그의 심기를 거스른 건 아니지?’라고 물어보신다?”
아레나의 주인, 공허에서 그 정도 비중을 지닌 절대자였나.
성지한은 성지아에게 그녀의 해방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까 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다.’
그는 이 사실을 지금 당장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성지아에게 말해 봤자 그럴 필요 없다며 반대할 게 뻔하니까.
거기에.
‘길가메시에 관한 사실을 더 파악하는 게 먼저다. 아직 적인지 아닌지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적의를 드러낼 순 없지.’
이번에 처음 본 아레나의 주인 말도, 어떻게 다 믿겠는가.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일단 추이를 지켜봐야 했다.
그래서 그는 길가메시에 대한 이야기 대신, 다른 걸 꺼냈다.
“아레나의 주인 심기를 거스를 게 뭐 있어. 그냥 스페이스 아레나 루키로만 선정해 주던데?”
“루키? 루키가 되면 뭐가 좋지……? 아. 엄마가 아레나 참가 비용이 싸진다고 하네.”
아레나 참가 비용 할인.
그게 끝인가?
‘에픽 퀘스트 보상이라기엔 너무 별론데.’
성좌 후보자 기간을 100일 단축하고, 스페이스 아레나의 루키로 자신을 선정한 이번 에픽 퀘스트 보상.
실질적으로 강해지는 내용은 없어서, 진짜 보상은 화신을 흡수하며 스탯 적을 올린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에픽 퀘스트 보상에도 나름 부수적인 효과는 있는 줄 알았다.
근데 아레나 참가 비용 할인으로 끝이라니.
이건 너무 짠데?
“엄마가 스페이스 아레나 참가 비용 얼만지 봐 보라는데?”
성지한은 그 말에 시스템 창을 열어 보았다.
그러자, 거기에는 스페이스 아레나 항목이 새로 생겨 있었다.
스페이스 아레나 항목에 들어서자.
[스페이스 아레나에 참가하시겠습니까?]
[스페이스 아레나의 루키입니다. 루키 혜택을 얻습니다.]
[스페이스 아레나 루키 혜택.]
-100일에 한 번, 플레이어 전용의 아레나 무료이용권 지급
-참가비 상시 30% 할인.
-1회 패배 페널티 면제, 단 패배 시 루키 자격 상실.
아레나에 참가하겠냐는 메시지와 함께, 루키의 혜택까지 쭉 떠올랐다.
능력치나 성장 보정 같은 건 없고.
오로지 아레나 참여와 관련된 것만 있는 루키 혜택.
‘플레이어 전용이면 어디다가 팔 수도 없겠군.’
성지한은 처음에 이 조건이 좋은 건가 의구심이 들었지만.
‘참가비가…… 1000억 GP?’
참가비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서큐버스 퀸이 준, 환락의 궁전 입장권과 동일한 가격의 참가비.
30% 할인해도 한 번 게임하는 데 700억 GP다.
뭐가 이렇게 비싸?
“……아레나 참가하면 뭐가 좋은 거지?”
“고속 성장이 가능하대. 특별한 능력을 주는 경우도 있고. 하지만 강적이 튀어나올 확률이 높으니, 조심해서 참가하라고 하는데?”
강적이라.
성지한은 조금 전 경기를 떠올려 보았다.
다들 자기의 세계에서는 한 가닥 해 보였지만.
성지한의 불에는 대번에 타올랐던, 싱거운 적들.
‘그나마 화신의 잔재가 좀 버텼지.’
물론 그도 성지한을 집어삼키려다 역으로 능력치가 되어 버렸지만.
어쨌든 아레나의 상대들은, 성지한에게 그냥 일반 게임 잡몹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은 부담이 되지 않지만, 참가비가 부담이군.’
뇌신에게서 GP를 강탈하며 한때는 독보적인 재산을 지니고 있던 성지한이었지만.
용염 스탯을 올리기 위해 배틀넷 경매장에 있던 화속성 아이템을 싹쓸이하고 난 이후부터는, GP가 예전처럼 남아나진 않았다.
“아레나는 무료이용권 받으면 가 봐야겠네.”
“참가비 얼만데?”
“1000억 GP.”
“……GP라고?”
“응. 할인하면 700억이네.”
“무료로만 가자. 삼촌.”
터무니없는 참가비에, 바로 결론을 낸 윤세아.
성지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스페이스 아레나 창을 끄고.
시스템 창에 새로 추가된, 그 아래 항목을 바라보았다.
[배틀넷 커뮤니티]
인류가 브론즈 리그에 속해서 잠겨 있던 기능, 커뮤니티.
스페이스 아레나 5라운드를 클리어하면서 부분 개방된 이 기능을 보고, 성지한은 윤세아에게 물어보았다.
“너도 시스템에 커뮤니티 기능 있어?”
“그게 뭐야?”
“시스템 창 열어 봐.”
“난 없는데?”
커뮤니티 기능이 해제된 건, 아레나를 클리어한 자신만 그런 건가.
‘한 번 봐야겠네.’
성지한은 배틀넷 커뮤니티를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