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벨로 회귀한 무신 244화〉
성지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실험이 진행되었다고?’
개조된 생명의 씨앗.
이게 어떤 작용을 하는지 완전히 밝혀진 바는 없었지만.
청혈 마족의 경우에서 비추어 볼 때, 이 세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물건은 아니었다.
‘저번의 생명의 씨앗이 발아한 건 아니다. 그때의 기운은 내가 확실히 다 흡수했으니까.’
그게 요인이 아니라면, 이전에 이미 실험이 진행되었던 건가?
대체 언제?
성지한이 의문을 품고 있을 때.
[주인. 여왕께 이야기를 들었다.]
“뭐래?”
성지한의 왼팔에서, 보고를 마친 아리엘이 목소리를 내보냈다.
[가면의 고엘프는 세계수의 원로 중 무력을 집행하는 엘프로, 가장 성격이 급한 거로 유명하다더군. 진짜 씨앗 넘기면, 쳐들어올 거 같다는데? 일단은 씨앗을 내버려 두는 게 낫지 않겠냐 말씀하셨다.]
“아. 근데 이미 반납했어.”
[바, 반납했다고?]
“어. 지 혼자 타 버리길래 어쩔 수 없었지.”
[그, 그럼 위험한데.]
아리엘은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럼 고엘프의 침공을 대비해야 할 거다. 그의 무력은 성좌 중에서도 강력한 편.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거야.]
“그 정도냐?”
[그래. 그냥 씨앗이 없어지게 내버려 두지…… 이 세계, 그의 손에 멸망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리엘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이이잉…….
[역시 약속을 어겼구나.]
성지한의 눈앞에, 커다란 화면이 떠올랐다.
그 안에는 아까의 고엘프가 팔짱을 낀 채, 살기 가득한 눈을 하고 있었다.
[인류의 상위 플레이어여. 너희들에게 모두 고한다. 조금 전 나를 능멸한 플레이어의 목을 베어 바쳐라. 너희들이 직접 목을 바치기 전까지, 내가 직접 강림해 인류를 척살할 것이다.]
그 말을 하고 등을 돌린 가면의 엘프는, 한눈에 보아도 복잡한 기계 장치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이이잉…….
엘프의 앞에, 거대한 포탈이 열렸다 사라지고를 반복했다.
[좌표 설정까지 3분……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씨앗 넘긴 지 얼마나 되었다고, 바로 쳐들어올 거라고 고지한 가면의 엘프.
성지한이 하이드아웃 상태라서 정체가 드러나지 않아서 그런지.
인류의 상위권 플레이어에게 모두 통신을 보낸 그는, 너희 스스로 성지한의 목을 바치라고 명령한 상태였다.
[……저 고엘프, 성격이 급하단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벌써 쳐들어온다고 할 줄은 몰랐군. 주인. 빨리 대비해야겠는데?]
“그러게. 미친놈한테 걸렸군. 근데 어떻게 벌써 안 거지?”
[아까의 씨앗이 증거 자료로 채택이 되냐 안 되냐를 지켜본 거 아니겠어?]
“결과가 참 바로바로 나오는 군 그래.”
[배틀넷 통신망이 워낙 빠르긴 하지.]
배틀넷의 초광속 일 처리, 이번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군.
성지한은 그리 생각하며, 일단 집으로 다시 들어왔다.
그러자 그에게로, 윤세아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사, 삼촌. 이거 뭐야!”
“어. 화면 떴네? 너도 상위권 플레이어구나?”
“아니, 지금 심각한 상황인데 그런 말이 나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 엘프…… 지금 난리도 아냐! 뉴스 속보도 쫙 떴어!”
“이거, 상위 플레이어만 볼 수 있는 거 아니었어?”
“화면은 같이 볼 수 있잖아! 삼촌 왜 이렇게 태평해?”
윤세아는 자기 앞에 뜬 화면을 툭툭 치면서 답답한 듯 이야기했다.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존재가 직접 지구로 강림하겠다고.
죽기 싫으면 성지한의 목을 내놓으라고 선언한 판국에.
당사자는 왜 이리 태평한 건가.
“글쎄다. 이상하게 걱정이 안 되네.”
지구로 쳐들어온다는 고엘프.
성좌급의 강자가 여기서 난동을 피운다면 얼마나 많은 피해가 야기될지, 예상하기 힘들 정도였지만.
성지한은 그런 고엘프의 침공 선언에도, 이상하게 이게 별로 걱정이 되질 않았다.
“생각보다 싸울 만해 보여서 그런가?”
“삼촌…… 아까 공격 피했다고 너무 안심하는 거 아니야?”
“아니, 진짜 상대할 만해 보여.”
성지한은 그러며, 인벤토리에서 봉황기를 꺼내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어느덧 3분이 다 지나가고.
[이제 곧, 가겠구나.]
지이이잉……!
고엘프가 띄운 화면 안에서, 거대한 포탈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이번 포탈은 여태껏 나왔던 것과는 달리.
포탈의 겉에, 푸른 행성의 모습이 비쳐 있었다.
“저거, 지구…….”
윤세아가 그걸 보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말문을 흐렸을 때.
뚜벅. 뚜벅.
계속 기계를 조작하던 고엘프는, 거기서 손을 떼고.
포탈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갔다 올게.”
“사, 삼촌. 나도 갈게!”
“지금 넌 짐이야, 짐.”
“아니. 나도 공허의 장막 있다고……! 숨어서 화살 쏘면 되잖아!”
짐 취급에 발끈한 윤세아가 어떻게든 자신의 쓸모를 어필했지만.
“됐고, 쉬고 있어라.”
툭. 투툭.
성지한은 윤세아에게 다가가, 점혈을 짚었다.
“윽…… 사, 삼촌…… 뭐 한 거야?”
“오. 좀 버티네? 다시.”
나름 고레벨이라 이건가?
성지한은 점혈을 다시 짚어, 딱딱하게 굳은 윤세아를 소파에 눕혔다.
“좀 자고 있어. 일어나면 다 끝나 있을 테니까.”
“…….”
[저러다가 주인 지면 어떻게 하려고?]
“어차피 한 시간 있음 풀려.”
[아하.]
“그럼 가 볼까?”
그렇게 윤세아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고엘프와 전투를 치르기 위해 창밖으로 나선 성지한은.
[아, 아니…… 왜?]
팅!
여전히 띄워져 있는 화면에서, 고엘프가 포탈에서 튕겨 나가는 걸 보았다.
“……뭐야?”
* * *
인류의 상위 플레이어에게, 성지한의 목을 내놓으라고 선전 포고를 하면서 위협적인 분위기를 잡던 가면의 엘프.
-쟤…… 아까 멸망전 대장이었지?
-와, 상위권 플레이어들한테 통신을 다 보내다니…… 이게 가능한 일이냐 진짜?
-아까 씨앗 가지고 발광하던데. 성지한이 처리했나 보네;
-제까짓 게 지구까지 어떻게 오나 싶었는데 ㅡㅡ; 바로 포탈 열고 있네.
긴급뉴스를 통해 이를 같이 보게 된 사람들은, 겁만 줄 거 같았던 고엘프가 진짜 쳐들어올 거 같아 보이자 긴장감에 휩싸였다.
-혼자 와 봤자 다구리 치면 그만 아님?
-으 근데 아까 성지한 포위 공격하는 애들은 그냥 플레이어 참가자였잖아. 쟤는 태양 진영 대장이고. 존나 센 거 아냐??
-ㅇㅇ 촉수도 발차기 한 방에 없애 버렸드만…… 생명력 끈질기던 놈을.
-그러게; 공허 진영 대장도 성좌였잖아. 쟤도 성좌임?
-그런가? 별의 주인들이 뭐 이렇게 성깔대로 사냐;
-오히려 별에서 1등이니까 성깔대로 살 수 있는 거지.
태양 진영의 대장이었던 고엘프.
그의 힘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것밖에 보질 못했지만.
무지막지하게 강력할 거란 예측에는 큰 반론이 없는 상태였다.
-설마 성지한 목. 주자고 하는 거 아니겠지…….
-미쳤음? 성지한 없으면 어차피 스페이스 리그에서 개망하고 인류 멸망임 ㅇㅇ;
-하긴, 성지한 없었으면 벌써 2패로 꼴찌였을 듯.
-랭커들 싹 다 모아서 지키러 가야 함.
-으아악……! 내 주식 폭락했네 젠장 ㅋㅋㅋㅋ
-아 던지지 말라고 성지한이 지켜 준다고!!
3분 뒤 고엘프의 강림 소식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세계 경제마저 크게 출렁이는 상황.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한 채, 상위 랭커들이 공유하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럴 리가……!?]
위엄있게 포탈 안으로 들어가던 고엘프가 튕겨 나가는 장면을.
모두 시청하게 되었다.
-……쟤 뭐함??
-아니 똥폼 개 잡더니 팅겨 나가는 거 실화?? ㅋㅋㅋㅋ-으아아 주식 던졌는데[email protected]#ㄸ&%[email protected]$!&$
-난 성지한 믿고 샀지롱 ㅎㅎ
인류의 상위권 플레이어에게 모두 화면을 띄웠던, 압도적인 존재 고엘프.
그는 포탈에서 튕겨 나가며, 바닥을 굴렀다가 벌떡 일어났다.
[마, 말도 안 된다!]
고엘프 정도의 실력자라면 사실 바닥을 구를 필요도 없었지만.
튕겨 나갈 거라고 전혀 예상을 못 해서 그런 건지.
땅바닥을 한 번 휩쓸고, 일어난 그는 또다시 지구로 향하는 포탈에 달려들었다.
하지만.
팅!
[대체 왜……!]
또다시 입장이 거부된 그는.
이번엔 바닥을 구르지 않고, 포탈 앞에서 하염없이 서 있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소드 팰리스 위에서 둥둥 떠 있던 성지한은 아리엘에게 말했다.
“야. 저런 게 세계수 연합의 원로냐? 영 별론데?”
[아, 아니…… 고엘프는 원래 저런 존재가 아닌데…… ]
“흠, 근데 지구 포탈까지 띄웠는데 왜 못 들어오는 거야?”
[나도 영문을 전혀 모르겠다. 어, 잠깐…… 포탈 위에, 글자가 뜬다!]
아리엘의 말대로.
고엘프를 튕겨 냈던 포탈 위에, 글자가 뜨기 시작했다.
조금 전, 연기가 만들어 냈던 글자와 모양새가 언뜻 비슷했지만.
‘이번에는 안 읽히네.’
이번 글자는, 아까처럼 저절로 해석이 되질 않았다.
[엘프어군.]
“뭐라고 써 있지?”
[이미 오래전에 실험이 진행된 세계로, 새로 진입할 수 없습니다…… 라는데?]
“실험이 진행되었다고?”
연기가 만들어 냈던 글자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포탈의 문자.
그나마 아까와의 차이점이라면 ‘오래전’이라고 시점을 알려 준 것뿐이었다.
[허. 이 행성…… 실험이, 이미 진행된 세계였다고…… 그러기에는 종족이 너무 형편없는데…….]
그리고.
포탈의 글자를 본 고엘프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다가.
[……어쨌든. 들어갈 수가 없겠군. 하찮은 목숨을 조금 더 부지했구나. 인간. 두고 보자…….]
뒤돌아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픽!
그러자, 상위권 플레이어들에게 떠올랐던 화면이 일제히 꺼졌다.
포탈에서 튕겨 나가 체면을 구기긴 했지만.
그래도 플레이어들에게 화면을 모두 띄우고 끄면서, 막강한 권능을 보여 준 고엘프.
하지만.
-새끼…… 튕겨 나간 주제에 마지막까지 개폼 잡는 거 보소 ㅋㅋㅋㅋ-이제 와서 그래 봤자 안 무섭거든요?
-두고 보자 멘트를 진짜로 내뱉네 ㅋㅋㅋㅋ
-이제 저놈, 나중에 시즌 174번째 두고 보자 내뱉을 예정임 ㅋㅋㅋㅋ마지막으로 그가 내뱉은 ‘두고 보자’에, 채팅창은 그를 향한 비웃음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3분간 인류를 긴장시킨 고엘프의 선전 포고는, 마지막엔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성지한은 고엘프의 포탈에 새겨진 문자를 다시 복기하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미 실험이 진행되어서, 새로 진입할 수 없다니. 영 찝찝한 이야기로군.”
[……나도 예전부터 의아하게 생각하긴 했다. 인류, 이런 약해빠진 종족이 어떻게 배틀넷에 진입했는지 궁금했지.]
“인류가 설마. 엘프의 실험과 관련이 있는 건가?”
[아마도 그렇지 않겠어?]
개조된 생명의 씨앗에서 나온 문자도 그렇고.
자신만만하게 쳐들어오려던 고엘프가 튕겨 나간 것도 그렇고.
오늘 나온 증거는 모두, 엘프의 실험과 인류가 연관이 있다는 걸 추측하게끔 해 주었다.
하지만.
“인류 중에서 그렇게 영생을 누리는 존재는 없는데. 무신의 종 빼고.”
[그렇지만 무신의 종이 문제였다면, 배틀넷이 천 년 전부터 열렸겠지.]
“흐음…….”
[아무리 봐도 인류 중에선 주인이 가장 초월적인데. 혹시 출생의 비밀이라도 있는 거 아닌가?]
“전혀 짚이는 건 없다만…….”
이상한 글자가 저절로 해석되는 것도 그렇고.
설마 진짜 뭐 있는 건가?
‘나중에 누나한테 물어봐야겠군.’
성지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툭. 툭.
소파에 누워 있던 윤세아의 점혈을 풀어 주었다.
“잘 쉬었니?”
“푸, 하. 아 진짜……! 너무해!”
“야. 너도 객관적으로 생각해 봐라. 니가 나 따라오면 발목을 잡겠니, 안 잡겠니?”
“으. 으으…… 그, 그건. 그래도!”
성지한의 뼈 때리는 말에, 뭐라 반박하지 못하는 윤세아.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가 진짜 도움 될 정도로 성장하면, 안 가겠다고 해도 끌고 갈게.”
“크읏…… 삼촌. 두고 봐. 나중에 내가 직접 삼촌 구해 줄 거야. 그때 되면 말이지. 나한테 진짜 눈물 콧물 흘리며 고맙다고 해야 한다?”
“콧물은 좀 그런데.”
“콧물 포함!”
“알았어. 알았어.”
성지한은 콧물에 집착하는 윤세아에게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아, 근데…… 너. 누나랑 이야기하고 있어?”
“엄마? 다 들어주시는 건 아닌데…… 그래도 종종. 꿈 타령하면서 말씀하셔.”
“그래? 하고는 있는 거네.”
“응.”
“그럼 누나한테 혹시 나한테 출생의 비밀 있나 물어볼래?”
“……뭐?”
성지아에게 직접, 조금 전의 의문점을 풀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