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벨로 회귀한 무신 130화>
포탈 너머의 풍경은 살풍경한 실험 구역과는 전혀 달랐다.
녹음이 우거진 아늑한 공간.
‘정원 같군.’
정중앙에는 원목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그 앞에 한 폭의 그림 같은 미녀가 앉아 있었다.
금발의 녹안을 지닌, 백색 로브를 입은 여인은 테이블 위 수정구에서 마나를 불어넣다가.
“……어?”
성지한이 포탈 너머로 튀어나온 걸 보고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빠르게 신색을 회복하고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손님이 오셨군요.”
그녀의 입이 서서히 열리며 고운 음성이 들려오자 시청자들의 감탄 섞인 댓글이 이어졌다.
-오오... 대박...
-헤...헤으으으응...!!!!
-이 정도면 예전 시즈루급 아님?
-ㅇㅇ; 또 다른 여신의 출현이네 ㄷㄷㄷ
-이 채널 은근 눈 호강할 기회가 많다니깐ㅋㅋ
-근데 엘프 맞나? 귀가 기네.
-엘프 맞는 듯. 근데 콜로세움에서 본 엘프보다 더 예쁜데?
-ㄹㅇ 말로만 듣던 하이 엘프라도 되나?
상식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이토 시즈루.
그녀의 얼굴이 공개된 이후, 대중들은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그녀가 세계 최고의 미녀일 거라고 칭송했다.
그런데 이번에 게임에서 나온 엘프는 그런 시즈루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모습은, 성지한이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예전에 네가 보여 줬던 엘프군.’
[그래. 저게 진짜 엘프다.]
세계수 연맹의 엘프는 모두 이렇게 생겼다면서, 아리엘이 보여 준 엘프 형상.
눈앞의 여인은 그것과 딱 일치했다.
“실험체가 포탈을 통해 탈출하다니…… 참 신기한 케이스군요.”
성지한을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던 엘프는.
스으윽.
수정구를 로브 소매로 쓸어 이를 수거했다.
그리고 텅 빈 책상을 가리키며.
“인간 분. 차 한 잔, 하시겠어요?”
온화한 어조로 성지한에게 티타임을 권유했다.
툭툭.
그녀가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리자.
원목 테이블에서 나무로 만들어진 찻잔이 두 개 불쑥 올라왔다.
찻잔에서는 어느새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맑고 깊은 향의 차가 차올라 있었다.
-분위기 미쳤네
-밑에서는 지옥의 혈전을 치르고 있는데 여기만 천국이구만 -남자라면 이건 거절할 수가 없따-ㄹㅇ머리로는 뭔가 이상한 걸 알아도 몸이 움직일 듯 ㅋㅋㅋㅋ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분위기.
하지만.
[저 잡것이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차향을 주의해라. 주인.]
아리엘이 팔 안에서 급히 경고를 보내 왔다.
그녀 말대로, 차의 향이 퍼져 나가자.
정신이 몽롱해지며, 기분이 고양되고 있었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있었군.’
어째 보니 안 그래도 아름다운 눈앞의 엘프가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흐읍-
성지한은 호흡을 고르며 몸의 이상 현상을 정상으로 돌렸다.
무혼으로 몸을 완벽하게 컨트롤하는 상태라, 이 얄팍한 간계 정도는 가볍게 파훼할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단칼에 베어 버리고 싶군.’
엘프에게는 저번 생에 쌓인 원한이 컸기에 이를 게임에서라도 풀어 버리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지만.
‘퀘스트…… 깨야지.’
성지한은 에픽 퀘스트의 내용을 떠올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실험 구역을 만든 주체와, 실험 목적을 알아내라는 퀘스트.
여기서 전자는 이미 해결했지만, 실험 목적에 관해서는 아직 실마리도 찾을 수 없었다.
[주인. 무지개 잎의 향은 그 아무리 뛰어난 전사라도 오래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저 잡것의 목을 단번에 쳐 버리는 게 어떻겠는가.]
‘아니, 잠깐 장단에 맞춰 주자.’ 털썩-
성지한이 원목 테이블의 건너편 자리에 앉자.
이를 본 엘프의 미소가 좀 더 짙어졌다.
“제 요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그래. 이 장소를 만든 게 당신이었나? 왜 이런 걸 만들었지?”
성지한은 자리에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여나 대답해 주면 바로 퀘스트가 클리어될 거라 기대하고 질문한 것이었지만.
“후후…… 성질이 급하시군요. 차 한잔 들면서 천천히 이야기해요.”
엘프는 대답을 피하며, 자기 찻잔을 우아하게 입에 가져다 댔다.
“안 드시려나요? 차가 잘 우려졌는데.”
차를 마신 후, 성지한에게도 권유하는 엘프.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차향이 조금 전보다 더욱 짙어졌다.
성지한이 예전 수준이었으면,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을 정도로.
그 향기는 은밀하고 집요하게 그에게 개입하려 들었다.
-왜 자꾸 차를 먹이려고 들지?
-뭔가 수상한데 ㅋㅋㅋㅋ
향과는 영향이 없는 시청자들은, 이에 이상함을 느끼고.
[만렙일등이가 10,000GP를 후원했습니다.]
[성지한님 조심하세요!! 차 자꾸 먹이려고 들어요! 1등 사수해야죠!!]
채팅을 못 보는 성지한을 위해서, 1만 GP나 들여서 후원을 하는 극성팬까지 생겼다.
채널 구독자가 수백만이 되면서, 성지한이 설정해 둔 최소 금액 1만 GP를 넘겨 후원하는 케이스가 종종 나타났는데.
이번에도 열성팬 한 명이 발을 동동 구르다가 정신 차리라고 거금을 투척한 것이다.
‘좀 미안한데.’
하지만 이미 자리에 앉아서, 장단을 맞춰 주기로 한 이상, 상대방에게 넘어가는 척은 해 주어야 했다.
성지한은 후원 메시지에 나중에 응답하기로 하고.
찻잔에 손을 뻗어 이를 단번에 마셨다.
청량한 느낌이 온몸에 퍼져 나가더니.
‘호오…….’
몸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신체의 제어권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
물론 성지한이야 무혼을 통해 한 호흡만에 이를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었지만.
‘뭐 하나 보자.’
일단 이 상태를 내버려 두기로 결정했다.
“후훗…….”
엘프는 딱딱하게 굳은 성지한을 보곤,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그에게 다가가, 몸을 주물럭거렸다.
“특이한 개체네…… 레벨은, 그다지 높지 않은데.”
엘프가 신기하다는 듯이 성지한을 쳐다보았다.
“이 신체 능력…… 이런 폐급 종 출신으로 가능한 건가?”
툭. 툭.
성지한을 만지던 엘프는 그의 몸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그곳에 피가 슬쩍 묻자, 이를 햝은 그녀는.
“……이거.”
대번에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연구소로 보낼 재목이다.”
그녀는 로브자락 안에서, 수정구를 꺼내더니.
원목 테이블에 내던졌다.
피시시시-
테이블에 녹색 불꽃이 피어오르더니.
엘프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움직인 그녀는.
“&!$!#.”
조금 전과는, 내뱉는 음성이 판이하게 달랐다.
아까는 게임 속에서 자동으로 번역이 되는 언어였다면, 이번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음성이었다.
‘뭐라고 하는지 혹시 아나?’
[엘프어다. 상위 실험체, 찾았다…… 라고 하는군. 근데 어떻게…….]
아리엘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어 가려고 할 때.
[생존자가 50명 남았습니다.]
[게임이 곧 종료됩니다.]
‘뭐야. 벌써 다 죽었어?’ 서바이벌의 게임이 종료되었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니, 무슨 게임이 벌써 끝나?
그런 기분은 성지한만 느낀 게 아니었는지.
“#$&!#!#$&$!#.”
[쓰레기 종족. 서바이벌이 뭐 벌써 끝나냐고 욕하고 있다.]
엘프들이야 재생력이 미친 수준이니.
인간처럼 서바이벌이 이렇게 순식간에 끝나진 않겠지.
그녀는 로브 소매에 손을 집어넣더니, 손바닥만 한 나뭇잎을 꺼냈다.
“!##@#!…….”
엘프가 빠르게 주문을 외우자, 스스로 초록색의 빛을 내는 나뭇잎.
그녀는 그 걸 성지한의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스르르르-
순식간에 나뭇잎은 성지한의 몸에 빨려 들어가고.
“네 주인이 명한다.”
엘프의 언어가, 갑작스럽게 이해되며 들리기 시작했다.
“다음 게임 때, 시작하자마자 바로 이리로 와라. 방송은 끄고.”
그리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서바이벌 맵에서 1위를 달성했습니다.]
시스템 창에서 1등 메시지가 떠오르며, 그대로 로그아웃되었다.
* * *
원래의 방으로 돌아온 성지한은 아쉬움을 삼켰다.
‘에픽 퀘스트 깨나 했더니.’
서바이벌은 이게 문제야.
50명 죽으면 끝나니까.
일부러 당한 척해 주며 적의 의도를 알 수 있나 했는데.
‘근데 아까 나뭇잎은…….’
성지한은 윗옷을 벗었다.
탄탄한 상체 위, 가슴 정중앙에.
녹색의 나뭇잎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스으으윽-
“괜찮나. 주인?”
성지한의 팔에서 빠져나온 아리엘이, 성지한에게 급히 물었다.
“멀쩡한데.”
“흠…… 아까 엘프를 떠올려 봐.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그러진 않나?”
아리엘은 엘프의 형상까지 다시 띄워 주면서, 성지한을 테스트했지만.
“아니. 전혀.”
그는 미동도 없었다.
“주인도 참 대단하군그래…… 쉐도우 엘프조차도 세계수의 잎사귀가 찍히면, 대부분이 엘프에게 무한한 호감을 느끼는데. 어떻게 영향이 없지?”
“이게 세계수의 잎사귀라고?”
“그렇다.”
성지한은 놀란 눈으로 가슴의 나뭇잎 문양을 바라보았다.
모든 상태이상을 해제한다는 세계수.
가지든 잎사귀든, 세계수랑 관련만 되면 된다고 아리엘이 저번에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이걸 매형한테 먹이면, 매료가 풀리나?”
“아. 그 상태이상 걸린 사람 말인가? 지금은 네 몸과 일체화돼서 안 된다. 엘프가 다시 회수할 때를 노려서 챙기면 가능하겠지.”
“호오…….”
세계수의 파편.
구하기가 상당히 힘들 줄 알았는데, 뜻밖의 맵에서 얻을 기회를 잡았다.
“사, 삼촌!”
한편.
방송이 끝나자마자, 윤세아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괜찮아? 아까 게임. 완전히 이상했어! 갑자기 엘프가 이상한 말을 하질 않나. 분위기가 이상해서 사람들도 엄청 걱정했다니까! 어. 뭐야. 가슴에 그 문양은……?”
“아. 엘프가 준 선물이야.”
“뭐?”
“세계수의 잎이래. 이거 잘만 챙기면, 매형을 제정신으로 돌릴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윤세아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아빠를?”
“그래. 세계수의 잎이 완전한 상태로 나온다면 상태이상 매료는 충분히 제거할 수 있다. 먹이는 게 문제겠지만.”
“대표팀 경기에서 먹여도 효과 있나?”
“리그 경기? 당연히 영향이 있다.”
“그럼 나중에 강제로 먹이면 되겠군.”
세계 최강의 전사인 검왕을 이기고, 강제로 나뭇잎을 먹이면 된다니.
성지한은 이 엄청난 일을 마치 마실이라도 나가자는 듯 이야기했다.
“아빠가……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어. 일단 이걸 적출해야 하지만.”
“그. 무리하는 건 아니지……? 삼촌. 난 괜찮아. 이제 와서 뭐. 아빠 없어도…….”
“아니. 내가 안 괜찮으니까.”
성지한은 가슴팍의 나뭇잎 무늬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매형을…… 그래. 네 크리스마스 선물로 줄게.”
* * *
인천 공항.
모자를 푹 눌러쓴 여인이 가벼운 캐리어를 끌고 나섰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젊은 여성.
“이거 본체랑 멀어지니 쉽지 않네…….”
일본어로 계속 투덜거리면서, 걸어가는 그녀는.
“아. 이제 한국말 해야지.”
금세 말을 한국어로 바꾸고는, 공항을 빠져나와 택시를 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소드 팰리스요.”
“아…… 그 강남 소드 팰리스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맞아요. 거기서 좀 숙박할 거라.”
그녀는 택시기사와 원활히 한국말을 주고받고는.
스마트폰을 열었다.
“그런데 소드 팰리스에서 숙박도 되나요?”
“오피스텔 방 한 달 빌렸어요.”
“아하. 소드 팰리스 하면 그 유명한 성지한 님 있지 않습니까! 한 달이면 그분 얼굴 뵐 수도 있겠네요.”
“그러게요. 근데 전…….”
스윽. 스윽.
그녀는 폰에서 사진을 넘기면서 대답했다.
거기에는, 윤세아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그보다 다른 사람이 더 보고 싶네요.”
“다른 사람이요?”
“네. 제 딸이 될 아이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