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벨로 회귀한 무신 125화>
“왜 굳이 삶을 마다하려는 겐가? 생각을 고쳐 보게.”
동방삭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저길 보게. 하늘 위에 놓인 수많은 무구들. 저건 모두 무신께 패배한 성좌의 흔적이라네. 별의 주인이라며 스스로의 강함을 자신하던 성좌들은, 모두 무신께 제압당했지.”
“아, 그렇군요.”
“……그런데 자네가 아무리 무혼을 얻었다 한들 무신님을 이길 수 있겠나? 불가능하네. 괜히 무혼의 힘을 아까워했다간, 결국 저들과 같은 꼴이 될 뿐이야.”
동방삭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성좌를 사냥하는 방랑하는 무신.
그를 어찌 한낱 인간이 이길 수 있겠는가.
“자네는 이런 걸 모두 감수하고서라도, 무혼을 얻을 만큼 무에 미친 사람인가?”
“그렇진 않습니다.”
무혼.
탐나는 능력이기는 했다.
하지만 동방삭의 말대로, 이길 수 없는 존재인 무신에게 적대해 가면서까지 얻고자 할 마음은 없었다.
성지한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무의 완성이 아닌, 지구가 스페이스 리그에 존속하여 인류의 멸망을 저지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럼 쉬운 길이 있는데도, 굳이 어려운 길로 돌아가는 사람인가?”
“그것도 아니죠. 다만…….”
성지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방삭님의 말씀과는 달리, 이 별의 주인은 그렇게 생각하질 않거든요.”
“뭐라……?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분명히 무신께 그리 전해 들었거늘…….”
“이 장소, 투성이라고 했던가요?”
“그러하네.”
“이곳은 무신이 자신의 무혼으로 생성한 별이 아닙니까?”
동방삭은 잠시 놀란 얼굴로 성지한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그러하네.”
우주에서 원래는 존재하지 않던 별, 투성.
이걸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바로 무신의 무혼이었다.
성지한의 무혼이 끼치는 범위는 20cm에 불과한 걸 생각하면, 무신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었다.
“자네는 그걸 어떻게 알았는가?”
“그냥 알겠더군요. 무혼의 영역이 겹쳤을 때, 감이 왔습니다.”
너무 손쉽게 대답하는 성지한을 보며, 동방삭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냥이라…… 허허. 나도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그 말에는 시샘이 드는구나. 감이라…… 그러한 감각이야말로 천부적인 것이지. 노력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타고난 것.”
그런 차이를 언제 뼈저리게 느껴 본 것일까.
동방삭의 목소리에는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감정이 묻어 나왔다.
“그리고 겹친 무혼의 영역에서, 무신의 의지가 들려왔습니다.”
동방삭이 선택지를 제시했을 때.
성지한에게는 동시에, 무혼을 통해 무신의 의지가 들려왔다.
[날 이기고자 하면, 기꺼이 기다려 주겠노라.]
동방삭의 말과는 달리, 무신은 오히려 성지한이 무혼을 지니기를 원했다.
그리고 만약 무혼을 포기하고, 성좌의 정수를 선택한다면…….
[하나 살고자 하면, 영원히 나의 종이 되리라.]
자신에게 귀속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무신의 종이 되는 것보다는 대립하는 것이 낫다.’
무신의 의지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무혼을 얻어도, 성지한이 급에 맞게 강해질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뻔했다.
‘나중에 패배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 삶을 살겠다.’
더구나 곧 개막할 스페이스 리그에서 자유롭게 운신하기 위해서는 무신에게 얽매여서는 더더욱 안 됐다.
“당신의 제안을 받는다면, 그의 영원한 종이 될 것이라고 알려 주더군요. 당신처럼 말입니다.”
그 말에, 동방삭이 수염을 쓰다듬던 손을 잠시 멈추더니.
스으윽…….
다시 수염을 매만졌다.
“종으로 사는 것도 괜찮다네. 주인이 무신이라면.”
“영원히 종속된 삶이라니,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영원’이 중요한 것일세. 장생은 생명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염원하는 것일세. 오래 살아 보지도 않은 것들이 꼭, 불사면 결국 불행해질 거라고 생각하지.”
“…….”
“한번 살아 보면 알게 될 테지. 영원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무신의 종이 되기 전에는, 불로불사가 아니었습니까?”
삼천갑자 동방삭.
원래부터 불로불사로 살아간 게 아니라.
무신의 종이 되어서, 무한한 수명을 손에 넣은 건가?
성지한의 의문에 동방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네. 내 무공의 경지가 원래는 노화를 억제할 정도는 되었지만, 완전한 불로불사는 아니었지.”
“근데 무신을 어떻게 만난 겁니까?”
“자네. 궁금한 게 꽤 많은 것 같구먼.”
툭.
동방삭은 수염 하나를 탁 끊었다.
그러자 끊긴 수염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그것은 곧 검의 형태로 변해 갔다.
“자네가 내 후임이 된다면, 그때 의문을 풀어 주도록 하지.”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니, 난 자네가 후임으로 썩 괜찮아 보인다네. 그러니 개죽음 당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지.”
슈우우우-
동방삭의 검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그것은 곧, 태극의 문양을 만들어 내었다.
“그건…….”
“무신께서는 꽤 휴가를 많이 주시는 분이네. 가장 최근 휴가 때, 고향땅에 놀러 간 나는 동네 뒷산에서 무늬그리기에 재미가 들렸지.”
“무늬, 그리기입니까?”
검이 그려 낸 태극.
흰색과 검은색이 서로 맞물리며 그려내는 신묘한 움직임을.
동방삭은 단지 무늬 그리기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네. 하지만 이 무늬에 관심을 보인 아이들이 자꾸 제자로 받아 달라고 하는 통에. 녀석들과 함께 잠시 대장 놀이를 했다네.”
“대장 놀이라…….”
태극의 움직임을 보자, 성지한은 불현듯 떠오르는 이름이 있어 물었다.
“혹시 그때 이름이 장삼봉이셨습니까?”
“오. 어찌 알았는가?”
“대장 놀이를 한 곳은 무당산이고요?”
“그렇다네. 역시 문화권이 겹치니, 대화가 편하구먼. 더더욱 내 후임으로 들이고 싶네 그려.”
동방삭은 성지한을 보며 눈을 반짝이고는.
“자. 그때 쉬면서 만들어 낸, 작은 재주라네.”
태극을, 서서히 돌리기 시작했다.
“이것도 이겨 내지 못한다면 무신께 도전은 어불성설이지.”
서서히 돌아가는 원.
그와 동시에, 성지한에게 가해지는 압박이 거세졌다.
동방삭의 태극을 펼친 검.
이것은 작은 재주라 칭하기에는 무의 극치에 닿아 있었다.
하지만.
부르르르-
[보내라.]
땅이 뒤흔들리며 절대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태극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동방삭은 검을 놓고 무릎을 꿇은 채, 하늘을 바라보며 절을 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무신이시여.”
태극의 검을 보여 주던 절대무인의 모습은 어디 가고, 종처럼 경배하는 모습을 보이는 동방삭.
“장삼봉씩이나 되는 분이 이러는 걸 보니, 더욱 종이 되고 싶지 않군요.”
“장삼봉? 그게 뭐 대수인가. 저저번 휴가 때는 천마라 불렸거늘.”
“…….”
성지한은 말문이 막혔다.
무협지에서 나오는 정파 최고 고수, 마교 최고 고수를 혼자서 다 해먹었다는 말이 아닌가.
“그나저나, 아쉽게 됐군그래.”
동방삭은 그리 말하며, 왼손을 휘둘렀다.
도포가 크게 흔들림과 동시에 성지한의 세계가 갈라졌다.
그리고 원래 그를 이곳으로 보냈던 칠흑의 공간이 드러났다.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나에게 말하게나.”
“호의만 받아 두겠습니다.”
성지한은 미련이 철철 넘치는 동방삭에게 건성으로 대답해 주곤 발걸음을 옮겼다.
[원래의 세계로 귀환합니다.]
이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 *
윤세아는 초조한 얼굴로 수련실의 문 밖을 서성였다.
‘아…… 어쩌지?’
금방 수련을 끝낼 것처럼 말하며 들어간 성지한은 벌써 이틀이 지나 테스트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나올 기미를 보이질 않고 있었다.
관리국에서 보낸 차량은 벌써 소드 팰리스 아래 주차장에서 1시간째 대기 중.
거기에 국가대표 워리어진과의 테스트 시간까지는, 이제 30분밖에 남질 않았다.
‘으…… 어쩌지? 중요한 수련이라고 했으니 수련실에 들어갈 수도 없고. 그냥 테스트 포기해야 하나?’
국가 대표 테스트, 까짓 게 수련보다 중요하진 않다만…….
요 며칠간 성지한이 해 둔 행동이, 윤세아는 마음에 걸렸다.
‘삼촌이 기세 좋게 국가대표쯤은 다 이길 수 있다고. 생중계도 승낙했는데…….’
여기서 갑자기 당일에 수련을 핑계로 못 나왔다고 한다?
아무리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성지한이라 해도 대중의 비웃음과 비난을 한 몸에 살 수도 있었다.
“삼초온…….”
수련실 밖에서 윤세아는 작은 목소리로 성지한을 불렀지만.
애초에 안에 없으니, 그가 들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저 발만 동동 구르면서,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자니.
부르르르-
윤세아의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윤세아 님. 아직 성지한 님께선 안 나오셨나요?]
“아. 저. 그게…….”
[그…… 이제 15분도 남지 않았습니다만…… 이렇게 된다면 오늘은 경기는 그냥 취소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래에서 대기 중인 박윤식 과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히 생중계하는 와중에 성지한이 안 와서 방송이 파투나는 걸 보여 주느니.
그냥 지금이라도 사전에 취소하는 게 낫지 않나 싶었던 것이다.
[지금 나오셔서 차를 타도 좀 늦을 것 같습니다만…… 컨디션 관리도 안 되실 텐데. 경기는 다른 날에 치르는 것이…….]
“아. 그게 말이죠…… 그럼…….”
윤세아가 결국 미뤄야 하나 싶을 때.
덜컥-
수련실의 문이 열렸다.
“세아야. 나 좀 바꿔 줄래?”
“사, 삼촌!”
지구로 귀환하자마자, 윤세아와 박윤식의 통화를 들은 성지한.
‘동방삭이 질척거리지만 않았어도 여유가 있었을 텐데.’
어떻게든 후임으로 성지한을 받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던 동방삭을 떠올리며, 그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무신이 아니었으면, 오늘 테스트는 파투 날 뻔했군.
“차가 많이 막힌다면 제가 알아서 가겠습니다. 차는 천천히 관리국으로 가 주세요.”
[아…… 괜찮습니다! 아직은 시간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습니다.]
“아뇨. 뛰는 게 더 빨라요.”
성지한은 그러면서, 창가로 향했다.
“삼촌?! 어디 가?”
“가장 가까운 루트로 가는 거지.”
“……저기요. 여기 게임 아니거든요?”
창을 활짝 연 성지한을 보며, 윤세아는 설마 설마 하면서 말했지만.
“세아야. 너는 과장님 차 타고 오면 되겠다.”
성지한은 손을 흔들며, 그대로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삼촌-!”
무명신공無名神功
보법步法
섬천뢰보閃天雷步
윤세아가 후다닥 창밖으로 달려나가기도 잠시.
성지한은 하얀 번갯불을 남기며, 이미 저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어휴…… 진짜.”
윤세아는 못 말린다는 듯 점이 되어 사라지는 성지한을 바라보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
저번에 같이 게임했을 때보다, 훨씬 빨라진 거 같은데?
현실에서는 능력치의 제약을 받는 플레이어인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인게임에서보다 빠르게 갈 수가 있지?
‘……전력으로 뛰어서 그런가?’
* * *
윤세아는 박윤식의 차에 탑승하자마자 자동차의 패널을 조작해 TV를 틀었다.
=아. 성지한 선수, 늦을 것 같습니다…….
=지금 다른 선수들은 한 시간 전부터 먼저 와서 대기하고 있었는데요.
=이틀 전부터 했던 수련이 마무리되지 않아 조금 늦는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말이죠. 아무리 수련이 중요해도, 사람이 시간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국가대표 선수들은 성지한 플레이어보다 훨씬 선배인데 말이죠. 아무리 그래도 이건 예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미리 생중계되고 있는 방송에서는, 해설자 한 명이 한참 성지한을 한참 나무라고 있었다.
윤세아는 입을 삐죽였다.
“약속 시간도 아닌데 벌써 방송하고 있었네.”
=혹시, 그렇지는 않겠지만…… 막상 테스트를 하려고 하니까 부담스러워서 그런 건 아니겠죠?
=에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플레이어가 아무리 수련이 급하다고 해도. 무협지도 아니고 폐관 수련하는 경우가 흔하답니까?
=뭐, 그런 경우는…… 거의 없죠?
윤세아가 중계를 보고 분통을 터뜨렸다.
해설자 한 명이 원수라도 된 양, 성지한을 침 튀기며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하네, 진짜. 원수 졌나?”
“김동우 선수랑 친하기로 유명한 해설자입니다. 그래서 그런가 봅니다.”
“아…… 그래요?”
그런 편파 해설자는 중계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윤세아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어?! 지금 성지한 선수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까? 차는 아직 출발 안 했다고 들었는데요?
=……날아왔다는데요?
해설진의 당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