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벨로 회귀한 무신 106화>
* * *
북쪽의 성벽을 단번에 부숴 버린 것은, 검은 강철로 이루어진 거대한 손이었다.
성지한은 저걸 예전에 본 기억이 있었다.
‘10개의 탑에서 봤던 강철 손이군. 블랙 핸드라고 했었나.’
파멸의 사도, ‘블랙 핸드’.
저번 생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몬스터였다.
사도라고 불리는 개체들은 그 스펙트럼이 넓어서.
협곡 맵의 내시드 백작처럼 고만고만한 몬스터도 있고, 종말의 사도처럼 나라를 멸망시킬 정도로 강력한 개체도 있었지만.
‘종말의 사도만큼 강하진 않을 터.’
성지한은 봉황시를 들고 지체없이 무너진 성벽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거기서는 이미.
거대한 블랙 핸드와 아리엘이 대치하고 있었다.
[끄-끄끄끄! 쉐도우 엘프가 왜 여기에 있지?]
“시끄러워.”
거대한 블랙 핸드의 손바닥 중심.
거기에는 사람 머리만 한 크기의 입술이 튀어나와, 선홍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입술만 보면 립스틱이라도 바른 듯, 촉촉하고 광채가 났지만.
[끄-끄끄끄끄! 더 시끄럽게 해야지!]
거기서 나오는 목소리는 마치 쇠 긁는 소리 같은 데다 말투는 경박하기 짝이 없어서, 듣자마자 강한 거부감이 들었다.
[끄끄끄! 끄끄끄!]
휭!
거대한 손바닥이 아리엘을 벌레 잡듯이 깔아뭉갠다.
쾅!
아리엘은 빠르게 내리찍는 손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깔려 버렸지만.
막상 그녀를 잡은 블랙 핸드는 실망 가득한 소리를 냈다.
[끄으…… 진짜 쉐도우 엘프네! 귀찮아!]
그도 그럴 것이.
블랙 핸드가 다시 손을 일으키자, 바닥에 퍼져 있던 검은 그림자가 올라오더니 다시 아리엘의 모습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림자로 몸을 변환할 수 있는 아리엘에겐, 블랙 핸드의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격이 통하지 않는 건 아리엘 쪽도 마찬가지였다.
블랙 핸드의 그림자가 크게 올라오더니 검으로 변하며 뒤를 그대로 찔렀지만.
“단단하군…….”
캉!
강철의 검은 손이 워낙 단단한 것도 있었지만, 같은 암속성을 공유하고 있던 터라 그림자검으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공격이 통하지 않는 상황.
이러한 교착 상태를 깨기 위해선, 결국 외부의 개입이 필요했다.
그리고.
“왔군.”
쿠르르르-!
블랙 핸드의 손등에 벼락이 쏟아져 내렸다.
순식간에 강철의 손 전체로 퍼져 나가는 전류.
성지한의 봉황시에서 뿜어져 나온 벽력섬뢰였다.
[끼, 끼요오오오옷……!]
아리엘의 그림자검에 찔렸을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블랙 핸드가 고통에 겨운 신음을 내질렀다.
붉은 입에서 내는 소리가 워낙 특이해서, 중계진들도 이를 언급했다.
=으. 크리스토프! 이 소리는 진짜 독특하기 짝이 없군요!
=칠판을 대체 몇 번을 긁는지 모르겠어요! 등골에 소름이 돋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도 이런데 저 소리를 직접 듣는 플레이어들은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저 손…… 강철의 몸을 지닌 것과는 달리, 입은 연약하군요! 좀 다물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이, 이 힘은…… 하아. 하아.]
스으으으.
입술을 부르르 떨던 블랙 핸드가 잠깐 투명해졌다가 다시 강철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손바닥에 있던 입술은 손등으로 옮겨져, 뒤에서 일격을 갈긴 성지한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건…… 끄-끄끄…… 왕을 넘을 자로구나!]
봉황시에 피어오른 벽력섬뢰의 기운에 블랙핸드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천뢰의 힘에 대해, 무언가 아는 듯한 눈치였다.
[크기 전에 잡아가마!]
스으으윽-
블랙 핸드가 또다시 투명해진다.
포스까지 지닌 성지한의 예민한 감각에서, 완전히 사라진 강철의 손.
‘……어떻게 한 거지?’
혹시 투명 마법의 일종인가 하여, 성지한은 허공에 뇌전을 뿌려 보았지만.
아무것도 걸리는 게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쑤욱!
[끄-끄끄…… 같이 가자!]
투명해졌던 손이 갑자기 튀어나오며, 성지한의 몸을 어느새 움켜쥐려 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타나며, 공간도 자유롭게 뛰어넘는 블랙 핸드.
그에게는 걸리적거릴 게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끼, 끼요오……! 이 힘은!?]
성지한을 완전히 쥐기 전, 손아귀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허공에서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한 블랙 핸드.
검은 손은 손가락을 우그러뜨리면서도, 성지한에게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다행히 포스의 절대영역은 뚫지 못하는군.’
포스의 절대영역.
능력치의 성장에 따라 꽤 커진 이 범위는, 블랙 핸드가 장악하려고 해도 쉽게 밀려나지 않았다.
‘그래도, 하마터면 잡혀 버릴 뻔했어.’
도대체 무슨 수를 썼길래, 완전히 기척을 없애 버린 건가.
성지한은 지금 그가 모습을 드러낸 지금, 전력을 다해 제압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무명신공無名神功
천뢰신결天雷神訣
뇌신雷身
피지지직-!
성지한의 육신이 서서히 투명해지며, 온몸에 전류가 피어올랐다.
뇌기와 자신을 동일화하는 뇌신雷身.
천뢰신결의 다른 무공을 더 강력히 펼치기 위해선, 뇌신의 상태여야만 했다.
[끄…… 으? 뭐야. 뭐야. 뭐야! 벌써 저걸 해??]
뇌신 상태의 성지한을 보고, 호들갑을 떠는 블랙 핸드.
[끄끄끄끄! 꼭~ 잡아가야지! 깨어나라. 왕들아!]
강철로 된 블랙 핸드의 세 번째 손가락에, 새하얀 운무가 피어올랐다.
아니, 그것은 자세히 보면 운무가 아닌 유령의 집합체.
그 안에서 빙글빙글 도는 유령은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는데.
머리에는 모두가 왕관을 쓰고 있었다.
[너도 여기에 들어올 거야. 끄끄끄!]
슈우우우-!
세 번째 손가락이 흩어진다.
뭉쳐 있을 때는 별거 아닌 것 같았던 유령들이었지만.
흩어지니, 하나하나가 다들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킬 더 킹이 인정하는 ‘왕’이라면.
다들 한가락 하는 인물들이었을 테니까.
‘그래 봤자 패배자. 저들을 신경 쓸 필요는 없다.’
하나 성지한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로지 블랙 핸드의 입만을 노려 천뢰를 방출했다.
무명신공無名神功
천뢰신결天雷神訣
벽력섬뢰霹靂閃雷
[끼…… 끼에에엑……!]
뇌신 상태의 벽력섬뢰.
그것은 크기부터가 달랐다.
블랙 핸드의 거대한 입을, 백색 뇌전으로 완전히 틀어막은 것이다.
거기에.
지지지지지직-!
[아. 아파 아파 아파! 왜 계속 쏴……!]
이번의 벽력섬뢰는, 끊김이 없었다.
봉황시의 끝을 통해서 계속해서 방출되는 전기.
그것은 봉황시의 기본을 이루는 불길과도 결합하여, 블랙 핸드의 입을 지지고 태웠다.
[끼이이익…… 막아! 왕 새끼들아아아!]
성지한을 습격하려던 유령들은, 블랙 핸드의 명에 황급히 뇌전에 달라붙었다.
슈우우우……!
언데드와 극상성인 천뢰에 맞닿자, 범상치 않던 유령들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지만.
[끼. 끼끽…… 좋아. 기다려!]
그 덕에 잠깐의 빈틈을 찾은 것일까.
블랙 핸드는 다시 투명하게 변해 갔다.
성지한의 벽력섬뢰가 입을 다시 노렸지만.
파지직……!
천뢰는 간발의 차로 허공을 스치고 말았다.
“하.”
성지한은 혀를 찼다.
‘대체 어떻게 사라지는 거지?’
전생의 경험을 통틀어서 수도 없는 적을 상대해 봤지만.
저렇게 완벽하게 자신의 존재를 지웠다가, 다시 나타나는 상대는 없었다.
이건 마치 다른 세계에 갔다가 온 것 같지 않은가.
‘……저놈도, 그래. 사도였던가.’
성지한한테 손쉽게 잡힌 내시드 백작에 비해, 상당히 골치가 아픈 블랙 핸드.
그는 둘의 공통점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가, 내시드 백작에게서 얻은 아이템에 생각이 미쳤다.
‘공허의 장막. 그게 저놈이 보이는 효과랑 비슷할 거 같은데…….’
물론 움직이면 풀리는 데다, SSS급 공격이 통용되는 공허의 장막에 비하면 블랙 핸드의 은신이 더 효과가 있었지만.
‘한번 써 보자.’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는 밑져야 본전.
성지한은 인벤토리에서 공허의 장막을 꺼내, 써 보았다.
그리고.
“후후…… 이번에야말로…….”
성지한은 장막 안의 세계에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 * *
기묘한 소리를 내며 경박하기 짝이 없었던 블랙 핸드.
끄끄끄 거리며 누가 들어도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는 게 보통 상대가 아니다 싶었는데.
‘겉보기에는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는군. 인간종인가.’
로브에 많은 부분이 가려져 상대를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크기 자체는 인간과 비슷한 상대.
입가만 살짝 드러난 얼굴은, 새하얗다 못해 창백했으며, 자세한 이목구비는 보이지 않았다.
“자. 그럼 다시 가 볼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새하얀 손에 쇠장갑을 꼈다 뺐다하던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이놈…… 어디 갔지?”
성지한이 공허의 장막을 뒤집어쓴 탓에, 그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영문을 몰라 몇 번이고 두리번거리던 그는 혀를 찼다.
“권능을 거의 못 쓰니 불편하군…… 야. 일단 넌 네 혼이나 가져와라.”
그러자 그의 새햐얀 손에서 연기가 흘러나오더니.
한 유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작았지만, 연기가 계속 뭉치며 커다랗게 형성된 유령은 성지한에게도 낯이 익었다.
‘정복자의 황릉에서 본 정복자군.’
거대한 말을 탄 수염 기른 남성.
그는 정복자의 황릉에서 보았을 때처럼 위엄에 찬 모습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오히려 대답하는 태도가, 로브의 존재에게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미션 목표가 정복자의 혼을 지키는 거였는데…… 벌써 저기에 있잖아?’
실제로는 이미 킬 더 킹의 손아귀에 정복자의 혼이 들어간 상태였던가.
그런데 왜 쳐들어온 거지?
성지한은 사라진 정복자의 혼을 보며 의문을 품었지만.
스으으으-!
정복자의 혼이 사라지고 얼마 안 있어.
똑같이 생긴 정복자의 혼이 하나 더 생겨나자, 숨을 죽이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흑마법사. 네가 나를 되살릴 수 있다고?]
새로 생긴 정복자의 혼은, 그를 데려온 혼과는 달리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로브를 쓴 상대를 흑마법사로 규정하고,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아. 그래. 다시 살고 싶지? 대륙도 정벌했고, 이제 떵떵거리면서 살 참인데 너무 일찍 세상을 떴잖아.”
[그런 하찮은 이유로 부활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럼 뭔데?”
[나의 제국이 무너지고 있다. 이를 다시 바로잡아야 한다.]
“더 하찮은 이유로 변명하네. 자. 옆에 널 데려온 유령 좀 볼래?”
로브의 존재는 가볍게 대답하며, 손가락으로 옆을 가리켰다.
그러자 새로 온 정복자의 혼은 옆을 돌아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뭐, 뭐지…… 왜 내가?]
“원래 세계의 넌 이미 나한테 먹혔어. 여긴 그때를 복원한 허구의 세계. 너는…… 그래, 가짜야.”
[그럴 리가……!]
“그리고 우리 진짜 혼께서는, 본심을 내게 말해 줬지. 야. 말해 볼래?”
로브의 존재가 손가락으로 진짜 혼을 가리키자,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서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전 그저, 더 살고 싶었습니다. 생의 의지가 계속 꺼지지 않았기에, 황릉에서 망령으로 존재했죠.]
[이놈……! 감히 가짜 주제에 나를 능멸하다니!]
[다시 살려 준다는 말에 속아 여기에 오다니. 아무리 나라지만 참 멍청하구나. 넌 결국 내 안으로 흡수되겠지.]
[하. 내가 정말 속아서 온 줄 아느냐!]
새로 온 정복자의 혼이 크게 분노하여 활을 들었다.
[함정임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저 내 손으로 침입자를 깨부수기 위해, 속은 척 따라왔을 뿐!]
화르르르!
새로 온 정복자의 혼이 새하얗게 불탄다.
봉황시에도 담겼던, 백염白炎이 끝도 없이 피어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이 이면 세계를 다 태워 버릴 듯한 힘.
하지만 로브의 존재는 태연하기만 했다.
“야. 꽤 센데? 가짜가 더 세 보인다?”
[이 세계에는 시스템의 제약이 있지 않습니까.]
“저놈이랑 놀아 주고 있어 봐. 아까 그 녀석 잡을 때까지 시간 끌어야 하니까.”
성지한은 로브의 존재가 말하는 ‘그 녀석’이 자신임을 짐작했다.
어차피 이곳은 배틀넷 게임 안이라.
만약 여기서 잡혀서 설령 사망한다 한들, 현실의 자신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게 당연했지만.
‘왠지 지금은 잡히면 그렇게 끝날 거 같진 않군.’
상대는 지금까지의 NPC와는 명백히 느낌이 달랐다.
아리엘과 비슷한…… 여기가 배틀넷임을 인지하고 있는 종류와도 같았다.
“아까 번개 쓴 놈,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장갑을 꼈다 빼며 툴툴거리는 로브의 존재.
그의 옆에서는 똑같이 생긴 두 유령이 한참 새하얀 불길을 끌어올리며, 서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가짜 주제에…… 제법 힘을 따라 쓰는구나!]
[후…… 가짜가 누군데. 입만 살았군.]
그리고 그들의 전투가 치열해질수록.
공허의 장막 속, 성지한이 손에 쥐고 있던 봉황시에서 열기가 차츰차츰 올라오고 있었다.
‘이건…….’
그는 그걸 보며 눈을 빛냈다.
‘써먹을 수 있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