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벨로 회귀한 무신 92화>
“정말?!”
윤세아가 두 눈을 빛냈다.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이계의 존재인 아리엘에게서 희망을 찾은 것이다.
“매료도 결국 배틀넷에서는 상태이상의 한 종류. 상태이상을 풀기만 하면 된다.”
“그게 일반적인 방법으로 회복되지 않는 상태이상이니 문제지…….”
“그리고, 세계수는 모든 상태이상을 해제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세계수……?”
“엘프 행성에 존재하는,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나무다.”
“상태이상을 해제하려면, 세계수의 뭐가 얼마나 필요한 거야?”
“별거 없다. 세계수의 잎사귀를 먹어도 되고, 심지어 세계수의 가지로 맞아도 풀릴 거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가볍게 대답하는 아리엘이었다.
“정말? 그 정도면 구하기 쉬우려나…….”
“그렇진 않다. 세계수는 엘프에게 있어서 유일신이자 세계 그 자체. 잔해 하나하나도 소중히 보관하지. 잎사귀 하나라도 거래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할 거다. 특히, 지금처럼 이 세계가 튜토리얼 기간이라면 절대 구하지 못할 테지.”
“……그래?”
“다만, 스페이스 리그가 개막하면 어떻게 상황이 변할지는 모르겠군. 그래도 교활한 엘프들이 순순히 이를 넘겨주지는 않을 거다.”
아리엘은 자신조차 엘프의 일종이면서도, 엘프에 대해 박한 평가를 내렸다.
“엘프가 교활해?”
“그러면 안 교활할 이유가 있나?”
“어…… 내가 아는 판타지 상식으로는, 숲에서 거주하면서…… 전투보다 평화를 좋아하는 종족이라고 알고 있거든.”
엘프.
일반인이 가지고 있는 판타지적인 상식으로는, ‘귀 크고’, ‘수명 길고’, ‘이쁘고’, ‘착하다’는 개념이 교집합된 종족이었다.
당연히 윤세아도 이 정도의 상식 정도로만 엘프를 알고 있었다.
실제로 엘프를 본 건 아니었으니까.
“흐음. 세계수 연합의 선동…… 여기서는, 그래. 프로파간다라고 하는군. 이게 잘 먹혔구나.”
“프, 프로파간다……?!”
“그래. 엘프가 왜 착해야 하지?”
“어…… 글쎄? 그런 종족이니까?”
“애초에, 착하다는 개념이 뭐지? 이종족에게 잘해 주는 게 착한 건가? 아니면 자신의 종족을 위해 헌신을 다하는 게 착한 건가.”
아리엘이 입꼬리를 올리며 묻자, 윤세아는 대답을 주저했다.
주어를 인간으로 치환하자, 대답이 바로 나오진 않았던 것이다.
“엘프는 착하다. 자신의 종족한테는.”
“응…….”
“그리고 그들은 동시에 악하다. 이종족에게는. 그리고…… 이단에게는.”
“그, 그래?”
엘프를 실제로 본 적이 없는 윤세아는 그저 아리엘의 말에 얼떨떨해 하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지만.
성지한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엘프 연맹, 세계수 연합.
그들이 전생에서 스페이스 리그에 얼마나 깽판을 쳤는지 기억이 난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세계수 연합에 포함된 엘프 행성 다섯 곳이 1위부터 5위를 차지했지…….’
엘프들은 지독했다.
그리고 강했다.
그들은, 인간의 완벽한 상위 호환이었다.
미적인 부분과, 수명은 물론이거니와.
신체의 능력도, 마력도, 심계도.
모두가 인간을 월등히 뛰어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성지한은 저번 생에서, 검왕 윤세진이 사라졌던 때가 떠올랐다.
윤세아가 자살하고도, 한국이 멸망하고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일본에서 계속 활발하게 활동하던 검왕.
그가 스페이스 리그에서 지구의 워리어 대표로 차출되어, 엘프 행성과 맞붙었을 때.
그는 엘프 종족의 최고 전사에게 목검으로 미친 듯이 두들겨 맞았다.
-이, 이건 아니야.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당시 윤세진의 모습은, 평소엔 전혀 볼 수 없었던, 패닉에 빠진 얼굴이었다.
그때는 검왕이 너무나도 참담하게 패배해서, 자괴감에 그런 소리를 내지른 줄 알았는데.
‘그때 엘프 워리어가 든 목검이…….’
말없이 아리엘의 말을 듣고 있던 성지한은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검증하기로 했다.
“아리엘.”
“응?”
“세계수의 가지로 맞아도 상태이상이 풀린다고 했지. 그럼 세계수로 만든 목검으로 처맞아도 풀리나?”
“당연하다. 세계수의 가지로 만든 목검이라면, 보통 신성력이 들어간 게 아니거든. 잎사귀 몇 개 먹는 거보다 훨씬 효과가 뛰어날 거야.”
“그런가…….”
“하지만 목검을 구할 생각은 버리는 게 낫다. 세계수의 가지로 만든 목검이라면, 엘프 행성의 워리어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이에게만 수여되는 물건이니까.”
엘프의 최고 워리어에게 주어지는 세계수의 목검.
그거로 맞은 윤세진은, 이럴 리가 없다며 소리를 내질렀고…….
‘그 후부터, 그는 일본 국가 대표 경기에서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
그가 사라지고 난 이후부터.
미국으로 망명한 무성武星 성지한은 세계 랭킹 7위로도, 최강의 워리어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만약 검왕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었다면.
성지한이 워리어 중에서, 독보적인 최강으로 자리매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일본의 순위도 불안정했지.’
세계가 멸망하기 직전.
일본의 세계 랭킹 순위는 8-9위권이었다.
최후의 10국 중, 거의 맨 마지막.
검왕이 계속 활발히 활동했다면, 사실 그들은 5위 이상에 들어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지.’
최후의 순간에 일본은, 예전에 벌어 둔 포인트로 계속 순위를 방어했을 뿐, 서서히 순위가 떨어지고 있는 국가였다.
‘그때, 세계수의 목검으로 맞으면서 매료가 풀린 건가.’
매료가 풀린 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부터 검왕이 활동하지 않았던 걸 보면 이상이 생겼음은 확실해 보였다.
‘……매형의 생사야 솔직히 관심이 없지만.’
성지한은 윤세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살할 정도로 내몰릴 때까지, 검왕은 일본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세계 제일의 미녀를 거느리고 주지육림을 누렸다.
성지한의 인생에, 수많은 적이 있었지만.
그 누구보다, 죽여도 죄책감 하나 들지 않고 가슴이 상쾌할 상대는 단연 검왕이었다.
그렇지만.
-지한아. 세아를 부탁해…….
누나 성지아는 자신을 희생하기 전, 딸 윤세아를 부탁했다.
그럼에도 자신은 도박에 빠져서, 윤세아의 불행을 등한시했었다.
오히려 막상 성지한을 케어한 게 윤세아였을 정도로.
둘의 관계는 누나 성지아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세아의 부탁이라면, 일단 들어 준다.’
윤세아는 성지한에게 있어 누구보다도 친한 동생이자 하나밖에 없는 누나의 혈육이었고.
쓰레기 같은 자신을 케어해 준,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런 세아가 아버지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한다면.
‘그래. 한 번은 해 줘야겠지.’
단 한 번만.
“그렇다면, 아리엘. 네 말대로라면 우리는 세계수의 잎이나 가지를 얻어야 하고. 그걸 이토에게 써먹어야겠군.”
“그렇다.”
“그럼 지금 실버와 브론즈인 우리 수준으로는, 전혀 가능성이 없겠네.”
“그렇겠지.”
하지만, 지금까지 나왔던 이야기는 모두.
지금 실버나 브론즈에 불과한 둘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세아야. 이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성지한이 능글맞게 웃으며 물어보자, 윤세아는 한숨을 푹 쉬었다.
결국 이야기의 결론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훈련하라고?”
“잘 아네.”
“하아아아…… 삼촌 훈련 귀신이다.”
“후발주자가 올라가기 위해선, 그 수밖에 없어.”
“흐아아아.”
“힘들면 말고. 삼촌이 너 하나 못 먹여 살리겠니.”
훈련이 고된 건, 성지한이 더 잘 안다.
조카에게 편한 길만 걷게 해 주고 싶었던 성지한이 은근슬쩍 그렇게 권유를 했지만.
“됐거든요!”
윤세아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중엔 내가 삼촌 먹여 살릴 테니 각오하라고.”
“후후…… 그건 불가능한데 어쩌냐. 음~ 그래. 배런 정도는 네가 이길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좀 힘들어.”
어느새 성지한의 머릿속에서 전투력 측정기가 된 배런이었다.
“어휴. 배런 님이랑 어떻게 나를 견줘.”
“걔 발컨이야. 세아 네가 실력만 갖추면 그냥 짓밟는다니까.”
“참나…… 자기랑 비교하지 않을 땐 또 띄워 준단 말이야.”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는 윤세아.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슬쩍 감돌고 있었다.
그래도 성지한이 이렇게 뜨기 전, 세계 유망주 랭킹 1위를 독보적으로 달리고 있던 배런을 이길 수 있다고 해 주니, 괜히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그때.
부르르르-
윤세아의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그녀는 자신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성지한을 바라보았다.
“삼촌. 하연 언니가 삼촌한테 사과드린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
성지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하연이 나한테 무슨 사과할 게 있다고?
“음, 일단 오라고 말씀드려. 나가 볼게.”
* * *
펜트 하우스의 응접실.
이하연은 성지한에게 몸을 푹 숙이며,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사죄했다.
“오너님!! 정말 죄송해요……!”
“아니, 뭐가 죄송합니까?”
“제가 사람을 잘못 봤어요! 주은지 씨가 그런 사람인 줄도 모르고, 하마터면……!”
“아.”
성지한은 그제야 왜 이하연이 사과하러 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직원을 뽑은 건 그녀였으니, 책임감을 느낀 거겠지.
“저쪽에서 작정하고 잠입했는데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대기 길드와 오너님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저희 길드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의 뒷조사를 철저히 해야 했는데…… 제가 너무 안일했어요.”
비밀 결사대를 뽑는 것도 아니고, 편집자를 뽑는 일에 뒷조사까지야.
성지한은 황당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하연이나 윤세아의 표정이 워낙 심각했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죠. 이제부터라도 하면 되니까요.”
“네. 이제부터는 국정원에서도 적극 협조하겠다고 말해 주셨어요.”
“……국정원까지요?”
성지한은 어이가 없었지만.
“네. 거기도 어제 방송을 보고는 완전히 비상이 걸렸거든요.”
이하연이 추가적으로 설명을 덧붙이자 정부 쪽 입장도 이해가 갔다.
이미 많이 쇠퇴해 버렸다지만, 아직 힘을 다 잃지 않은 검왕가에 더불어.
새로운 플레이어 팬덤으로 자리 잡은 성지한 팬클럽 ‘더 퍼스트’에서 정부에 대고 온갖 항의와 민원을 쏟아넣기 시작한 것이다.
대체 정부는 뭘 하는 거냐고.
이렇게 두 눈뜨고 일본한테 플레이어를 빼앗길 거냐면서.
더군다나 더 퍼스트의 라이트한 팬들은 예전에 검왕가에 속해 있었던 순수 국뽕 팬이었기에, 간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정부를 탓하는 여론을 주도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은지…… 아니 이토 시즈루의 빈자리는 그동안 제가 메우기로 했습니다.”
“……하연 씨가요?”
“네! 제가 길드 마스터이자 편집자로, 열심히 활동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 그…… 죗값을 치러야죠!”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어차피 대기 길드는 이하연의 기프트 때문에 유지되는 길드인데.
별생각이 없는 성지한과는 달리, 이하연은 열성적이었다.
“저, 그래서 말인데. 오너님. 100만 구독자 미션 달성한 건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100만 구독자…… 맞아. 어느새 그렇게 되어 버렸죠.”
“확실히 전 세계의 주목을 끄는 건, 특별한 이벤트인 것 같아요. 실버가 다이아를 꺾었다는 소식이 널리 퍼지자마자, 구독자가 순식간애 100만을 돌파했으니까요.”
실버로 승급하는 전 세계 TOP 100 승급전에 출전했을 때 한번 팍 오르고.
이번에 다이아인 닌자 아카리를 제압한 게, 두 번째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너님. 저, 상태창 공개할 생각이 없으시면…… 제가 적절히 커트하도록 하겠습니다. 편집자로서 그건 당연한 의무니까요!”
“전 보여져도 괜찮은데요?”
“역시 그렇죠? 제가 다 변명거리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사실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상태창을 공개할 수 없다는 특수한 상태창이라든지…… 네에?”
“괜찮다니까요. 공개해도 됩니다.”
성지한의 상태창.
일반 플레이어와는 완전히 궤가 다른, 독보적으로 특이한 상태창이었지만.
성지한은 이걸 공개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대중의 관심이, 플레이어에게는 힘이 되니까.’
더구나 이런 난장판 직전인 세계에선, 힘을 필요 이상으로 숨는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오히려 적절히 공개하는 것이, 차후의 행보를 밟아 가는 데 있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어, 그럼…….”
“잘됐네요. 100만 넘은 김에 지금 해치워 버리죠. 상태창 공개.”
이미 속으로는 계산이 다 끝났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가볍게.
성지한은 웃으며 그리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