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벨로 회귀한 무신 84화>
* * *
아카식 페이지.
현대에서는 기술 발전을 위해 쓰이지만, 아리엘의 말에 따르면 서포팅 기프트를 강화시켜 준다는 기물.
이 물건은 기업들이 구해지 못해서 안달이었기에, 가격이 어마어마했다.
‘완성된 아카식 페이지는 수천억의 가치를 지닌다고 들었는데.’
아카식 페이지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아카샤의 조각은 플레티넘 리그에서부터 확률적으로 얻을 수 있었는데.
최소 가격이 100억이었던지라, 플레이어들에게는 로또보다도 더한 취급을 받았다.
그런 아카샤의 조각을 25개나 모아서 조합해야 만들 수 있는 아카식 페이지를, 그런 비싸디비싼 물건을 일개 영상 편집자가 가지고 있다고?
‘수상하군.’
지금껏 주은지에 대한 인상은 그냥 평범한 여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인을 할 때나, 마이크를 달아 줬을 때 정전기가 튀기는 했지만.
그거야 단순히 우연이라고만 생각했다.
‘설마…… 아카식 페이지의 사용법을 알고 있는 건가.’
외계의 존재인 아리엘만 알고 있는 줄 알았더니, 지구에서도 아는 이가 있었던가.
그렇다면 눈앞의 주은지는, 평범한 일반인이 아니라 서포팅 기프트를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란 뜻인데.
[주인. 제압할까? 아니면, 두고 보겠는가.]
[무슨 짓을 할지, 잠시 지켜보지.]
주은지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위험 부담이 조금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성지한은 그녀가 수상하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대처할 자신이 있었다.
[알겠다. 혹 무슨 일이 일어나면 저 다이어리를 불태우겠다. 이미 아카식 페이지는 사용되어서 사라지고 있는 상태지만, 그래도 흔적을 태우면 권능 증폭이 약해질 테니까.]
성지한이 아리엘의 충고에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스르륵-
다이어리를 잠시 펼쳤다 닫은 주은지는 당황한 얼굴로 성지한에게 다가왔다.
“아! 저, 오너님. 마이크 세팅 좀 다시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자꾸, 밀착하려고 하는군.
서포팅 기프트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접촉이 필요한 건가?
“네. 알겠습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체 했지만.
성지한은 주은지가 어떤 방법을 사용할지 예의주시했다.
저벅. 저벅.
주은지가 다가와서, 성지한의 옷을 향해 손을 뻗자.
지직-
[사용자의 시스템에 은밀히 접근하는 움직임을 감지합니다…….]
[사용자의 시스템에 플레이어 ‘이토 시즈루’의 분신이 편집을 시도합니다.]
성지한의 눈에, 시스템 메시지가 올라왔다.
‘이토…… 시즈루?’
이토.
한국인들에게 이 성을 듣고, 누가 떠오르냐고 물어본다면.
일 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토 히로부미를 떠올렸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검왕이 개명한 성, 이토 류헤이.
이토를 들으면, 검왕을 떠올리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근데.
주은지에게서 이토라는 성이 나오다니.
‘설마…….’
[이토 시즈루의 분신이 사용자에게 상태이상 ‘매료’를 추가합니다. 매료의 대상은 이토 시즈루입니다.]
[이토 시즈루의 분신이 사용자에게 상태이상 ‘복종’을 추가합니다. 복종의 대상은 이토 시즈루입니다.]
[이토 시즈루의 분신이 사용자에게 상태이상 ‘광신’을 추가합니다. 광신의 대상은 이토 시즈루입니다.]
지금까지 접촉했을 때와는 달리.
성지한에게 매료, 복종, 광신이라는 상태이상이 추가되었다.
“당신…….”
“네?”
마이크를 달아 주던 주은지가 눈을 깜빡였다.
남들이 듣기에는 평범한 대꾸였지만.
성지한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 같았다.
어떻게 사람의 입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가 나올 수 있지?
거기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하게 보였던 외모도 세상 그 누구보다…….
“…….”
“성지한 님? 무슨 일이신지…….”
성지한은 주은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주은지의 얼굴은 영락없는 미의 여신과도 같았지만.
익히 아는 얼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번 생에서 본 게 아닌, 전생에서.
‘종말의 사도, 서큐버스 퀸.’
* * *
인류가 멸망하기 직전.
지구가 스페이스 리그에서 강등전에 진입할 때.
이에 대한 페널티로, 살아남은 20개의 나라에 각기 다른 종말의 사도가 나타난 적이 있었다.
20명의 종말의 사도 중, 성지한이 몸담고 있던 미국에 나타난 게 바로 서큐버스 퀸이었다.
로스 엔젤레스를 완전히 자신의 휘하에 넣고.
수많은 플레이어에게 광역으로 상태이상 매료를 뿌리던 최악의 몬스터.
미국 정부에서 결국 LA에 핵을 쏟아부어 서큐버스 퀸의 추종자들을 멸절시키고, 아메리칸 퍼스트가 모조리 나선 이후에야 그녀를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주은지에게서 서큐버스 퀸의 모습이 보이다니.
성지한은 상태창에 뜬 이토 시즈루라는 이름에서, 검왕을 떠올렸다.
한국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던 검왕이.
이 나라에서도 여러 여자와 만나면서 인생을 즐기던 그가 갑자기 한 일본 여성에 빠져서, 이토라고 성을 바꾸고 일본으로 떠난 이유가…….
드디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이토 시즈루. 그녀가 일본의 경국지색이었나. 윤세진이 당할 만하군…….’
아카식 페이지가 있다는 경고가 없었다면.
그래서 심적으로 미리 대비가 있지 않았다면, 이토 시즈루의 간계에 크게 낭패를 볼 뻔했다.
‘그리고 저번에는 당하지 않았던 걸 이번에 이렇게 당한 건…….’
서포팅 기프트의 힘을 증폭시키는 아카식 페이지 탓이겠지.
저 다이어리를 태우면, 당장 이 상태이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주은지를 없애 버린다면 후환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분명히 시스템 메시지에서는 분신이라고 했다.’
여기서 성지한이 아카식 페이지를 불사르고, 주은지를 죽여도, 본체가 남아 있게 된다면 의미는 없다.
오히려 분신의 실패를 교훈 삼아, 본체가 또 다른 술수를 부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적당히 넘어간 척을 해서, 이토 시즈루의 정보를 더 끌어낸 이후. 본체를 없앤다.’
성지한은 그리 판단하며, 차분히 심신을 가라앉혔다.
적당히 넘어간 척을 하려면, 지금의 마음가짐으로는 안 된다.
상태이상 매료, 복종, 광신.
매료까지는 몰라도 복종과 광신은 남겨 둬서는 안 될 상태이상이었다.
성지한은 삼단전의 기운을 순환시켰다.
무명신공無名神功
심법心法
유심소조唯心所造
유심소조.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는 뜻으로.
무명신공에서는, 헛것에 의한 착시와 정신의 오염을 극복하는 심법으로 작용했다.
‘복종과 광신은 제거한다.’
이 두 개는 남겨 두기에는 너무 해악이 크다.
성지한은 심법을 운용하여, 자신의 내부로 들어온 두 상태이상 효과를 제거했다.
들어온 걸 발견하지 못했으면 모르되, 이미 알고 있는 건 제거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매료는…… 조금 남긴다.’
매료까지 제거하면.
‘적당히 넘어간 척’을 하기 힘들어지겠지.
성지한은 매료의 효과를 절반 정도를 덜어 냈다.
‘LA에 나왔던 서큐버스 퀸을 제거할 때의 경험이 없었으면…… 이것도 쉽지 않았겠어.’
인류가 멸망하기 직전 나타난 보스 몬스터 중, 가장 성가셨던 서큐버스 퀸.
어찌 보면 종말의 괴수였던 베히모스보다도 더욱 까다로웠다.
세계 랭킹 1위였던 배런이든 3위 소피아든, 죄다 서큐버스 퀸의 매료에 현혹되어, 역으로 성지한을 공격하려고 들었으니까.
‘무명신공의 심법으로 버티지 못했다면. 나도 그녀의 종이 되었겠지.’
성지한에게 무명신공이 없었다면, 미국은 베히모스 이전에 서큐버스 퀸에 의해 멸망했을지도 몰랐다.
‘과거의 경험을 되살려야겠군.’
성지한은 매료에 당한 척, 서큐버스 퀸을 속이고 그녀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었을 때를 돌이켰다.
‘그건 그렇고…… 참 서큐버스 퀸과 비슷하게 생겼군.’
지금 보이는 주은지의 얼굴.
복종과 광신을 제거하고, 매료마저 반밖에 남기지 않으니, 여신 같았던 그녀의 미모는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자신의 이상형을 그대로 보여 준다는 매료의 효과 때문일까.
좀 전에 언뜻 보았던 여신 모드의 주은지는, 서큐버스 퀸과 너무나도 똑같았다.
‘이게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한편, 주은지는 의뭉스러운 눈길로 성지한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너님?”
그를 바라보는 표정은 순진무구했지만.
‘다 안 됐어.’
속에는 냉철한 판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매료, 복종, 광신 3종 세트가 제대로 정착되었다면, 벌써부터 자신에게 구애를 했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아닙니다. 일단 진행하죠.”
성지한은 그 정도의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주은지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뺨은 혈기가 도는 듯, 슬쩍 붉어진 채로.
평소 그녀에게 별다른 감정이 보이지 않았을 때와 비교하면 꽤 다른 반응이었다.
분명 변화는 있지만, 주은지로서는 이게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아카식 페이지까지 사용했는데, 다 걸리지 않았다고?’
아무리 분신의 권능을 강화한 거라지만.
아카식 페이지까지 사용했는데 이 정도 효과밖에 내질 못하다니…….
‘일단 어느 정도 먹혀 들어간 것에 만족해야 하나…….’
그래도 확실히, 매료는 어느 정도 정착한 것 같았다.
방송 카메라가 있기 때문인지, 성지한은 별로 티를 내려고 하지 않았지만.
매료를 많이 사용해 본 주은지는 확실히 그의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다.
내가 왜 이러지?
하면서 납득을 하지 못하면서도, 힐끔힐끔 주은지를 바라보는 성지한.
조금 전과는 달리, 기이한 열기가 깃든 채 캠을 들고 있는 주은지를 바라보는 것이 매료가 들어간 증거였다.
‘그래. 일단 들어간 게 어디야.’
검왕 때만 해도, 처음엔 물꼬를 트는 게 쉽지는 않았다.
여러 방식으로 접촉을 한 이후에야 매료를 걸 수 있었지.
하지만 한 번 걸리고 나서부턴, 검왕은 이토 시즈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성지한. 너도 곧 그렇게 될 거야.’
비록 투자한 것에 비해 효과가 덜했다는 게 아쉽기는 했지만.
그게 어디인가.
오히려 실버밖에 안 되는 성지한이 저만큼 버텨 낸 것만 해도, 그가 대단한 가치를 지닌 플레이어라는 걸 반증하는 거니까.
그리고, 촬영이 끝난 후.
자리를 정리하고 있는 와중, 성지한이 주은지 쪽으로 다가왔다.
“주은지 씨…… 라고 하셨나요.”
“네. 오너님.”
“편집 관련해서 연락을 좀 할 게 있는데, 연락처 좀 알려 주십시오.”
편집을 위해서, 연락처를 교환한다.
명분 자체야 그럴 법했다.
하지만.
‘여태까지 봐 온 성지한은 그럴 사람이 아니지.’
편집 관련해서 이야기할 게 있으면, 그냥 길드 직통 전화로 연결을 해서 연락을 하지, 개인적인 전화번호를 얻을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초롱초롱한 눈으로.
살짝 안절부절못하면서 번호를 달라고 하는 건.
‘후후…… 역시 너도 내 매료를 이겨 낼 순 없을 테지.’
비록 완전한 복종까진 얻어 내진 못했지만.
아카식 페이지를 투자한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며, 주은지는 환하게 웃음 지었다.
“아. 네! 오너님. 번호 찍어 드릴게요~”
그리고 2일 후.
[오너님~ 저, 혹시 오늘 시간 괜찮으실까요?]
먼저 연락한 쪽은, 주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