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오롯이 행복한 시간 (완)
“얘들아, 부족한 거 있으면 더 말해!”
은주는 바쁘게 움직이는 손만큼 빠르게 입을 움직였다.
이승우의 중식집인 만리향은 오늘 특별한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자애 보육원의 아이들.
어떤 일들은 시간이 해결해주곤 한다.
이승우가 사고를 당한 지도 어느새 오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재활은 힘들었고, 몸의 회복은 더뎠다.
그래도 결국 이승우는 보조기구 없이 자신의 힘만으로 두 발로 걷는 데 성공했다.
사고는 이승우에게 상처만을 남긴 것이 아니었다.
죽음의 고비를 이겨내고 삶으로 돌아온 이승우는 전보다 훨씬 더 강하고 단단한 인간이 되어있었다.
몸이 자유로워지기 무섭게 이승우는 바로 오랜 시간 동안 그를 기다려왔던 가게로 돌아왔다.
일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주방으로 처음 돌아왔을 때 이승우는 눈물을 흘렸다.
사람도 훨씬 유해졌다.
따듯한 속마음을 애써 숨겨보겠다고 일부러 거친 말을 뱉곤 했던 그다.
하지만 이제 이승우는 사람들에게 겉과 속이 꼭 같은, 진심만을 말했다.
물론 은주와의 사랑이 더 깊어진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오빠, 애들 얼추 다 먹은 것 같아. 나와서 인사 한번 해야지.”
“알겠어. 음식 나르느라 고생했어.”
수건으로 이마의 구슬땀을 닦는 자신의 남자친구, 아니 남편을 보며 은주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 내가 이래서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아저씨, 안녕하세요!”
이승우가 주방에서 나와 홀로 모습을 드러내자, 쟁반에 박을 듯이 머리를 숙이고 있던 아이들이 어린 새 떼처럼 고개를 들고 그를 반겼다.
“요 녀석들이. 나 아저씨 아니라고.”
애써 항변하는 이승우의 옆구리를 은주가 쿡 찔렀다.
“오빠, 이제 오빠 서른여덟이거든? 쟤들 눈에는 당연히 아저씨가 맞지.”
“거참···”
이승우는 머리에 조리모 대신 쓰고 있던 두건을 풀고 정수리를 손가락으로 긁적였다.
“저기··· 승우 형.”
그때, 이제 막 변성기에 접어든 목소리가 승우를 불렀다.
“어? 어. 너 준호구나.”
아이를 알아본 승우가 손을 흔들었다.
중학생인 준호는 오늘 온 아이들 중에서는 형 축에 속했는데, 코밑에 거무스름한 수염이 나기 시작한 것이 이제는 제법 다 자란 티가 났다.
“형, 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보고 싶은 거?”
이승우는 준호가 앉아있는 테이블에 빈 의자를 하나 뽑아 자리를 잡았다.
“뭔데? 말해봐.”
“있잖아요···”
한참을 뜸을 들이는 아이.
사춘기에 접어든 사내아이들은 둘 중의 하나다.
거칠거나 수줍거나.
아마도 준호는 후자 쪽인 듯했다.
이승우는 아이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눈을 바라봐주었을 뿐.
“신부님에게 들었는데, 승우 형이··· 그, 영수 형이랑 제일 친한 사람이라면서요?”
“영수?”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이승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둘도 없는 친구 사이지.”
이승우가 퇴원하는 날, 한영수는 그에게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었다.
- 뭐냐, 이게?
- ··· 뭐긴. 퇴원 선물. 축하한다. 정말 고생 많았어.
주섬주섬 서류 봉투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송림프라자의 등기 이전 서류가 들어있었다.
- 퇴원했으니까 가게로 바로 돌아가야지? 이제 그 건물 네 거니까 벽을 부수든, 천장을 까든 네 맘대로 해라.
말문이 턱 막힌 이승우를 향해 태양같이 웃던 한영수였다.
그러고 보니 한영수를 보지 못한지도 일 년은 훌쩍 넘은 것 같았다.
“그런데 영수는 왜?”
“그게··· 학교 숙제 때문에요.”
“학교 숙제?”
준호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존경하는··· 사람에 대해서··· 조사를 해오라 해서···”
아이의 얼굴이 사과처럼 붉게 물들었다.
하하하━
이승우는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었다.
“녀석, 쑥스러워하기는. 그래. 친구인 내가 봐도 정말 멋있는 놈이지, 한영수. 말이 길어지겠는걸?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그래, 이 이야기부터 할까?”
* * *
라니카이 비치.
하와이에 있는 이 푸른 바다는 현지어로 ‘천국의 바다’라는 뜻이란다.
전화기를 귀에 댄 채 이 해변을 걷고 있는 한 동양인 남자.
누가 봐도 오랜 운동으로 다져졌을 몸은 구릿빛으로 건강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 동일아.”
남자는 하와이와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 아랍국가에서 이제 막 터를 닦아 올리기 시작한 도시 건축에 대해 입을 열고 있었다.
“일단 선적으로 자재는 다 넘어갔어. 현지 공장도 이번 달 안에 작업 시작할 거야. 그리고···”
동일이라고 불린 사내는 온갖 숫자로 도배된 용어들을 얼마간 더 뱉어대었다.
수화기 반대편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는 양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 야, 그만 됐어. 다들 알아서 잘하겠지. 솔직히 난 지금 네가 하는 말 절반도 못 알아듣겠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이 컸네? 구동일.”
“갑자기 나한테 고왕 건설로 발령 내놓고 너는 훌쩍 떠나버리고. 내가 얼마나 부담이 되는 줄 알아?”
“잘 해낼 거라고 믿었고, 실제로 잘하고 있잖아?” “참나··· 또 능구렁이 같은 소리 한다. 그나저나 한영수.”
그랬다.
라니카이 해변을 거닐고 있던 남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한영수였다.
“한국은 언제 돌아올 거야?”
“여기 얼마나 좋은데. 지상 낙원이나 다름없어. 여기 해변에 헬스장이 있거든? 파도 소리 들으면서 운동하니까 얼마나 기가 막힌 줄 몰라. 아마 일 년쯤은 여기에 더 있지 않을까 싶다.”
“··· 다들 널 그리워해.”
구동일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잠시 한영수는 자신과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을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려보았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정말 꿈같은 시간이었다.
“··· 난 이미 은퇴했잖아. 그 사람들에게 나도 보고 싶다고, 한국 들어가게 되면 연락하겠다고 전해줘. 아, 그리고 구 회장님께는 꼭 내가 안부 인사 여쭸다고 말씀 좀 전해드려.”
전화를 끊은 한영수는 모래사장에 엉덩이를 대고 걸터앉았다.
오 년 전 그날.
장은호는 한영수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태상을 위해 네가 총수 자리에 앉아달라는.
세상을 다 가지는 것이라고 해도 다름없는 그 자리.
하지만 어쩐 일인지 한영수는 장은호의 말을 듣고 그저 웃을 뿐이었다.
- 형님. 너무하시네요. 태상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이렇게까지 한 건데, 총수가 되라니요.
그 순간 한영수는 마음의 결심을 내렸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훌쩍 떠나버리기로.
우선 자신이 가지고 있던 태상 쪽 지분 일부를 정리했다.
아직 지지기반이 확실하지 않은 장은호는 군말 없이 한영수가 가지고 있던 지분을 받아주었다.
그 정리한 지분만으로도 구 회장에게 빌린 돈을 충분히 갚을 수 있었다.
다음은 고왕 건설이었다.
언젠가 이종현 사장 앞에서 말했던 ‘소유와 경영의 완전한 분리.’
그것을 실천할 차례였다.
고왕 건설의 임원들은 충격적인 회장의 선언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 어차피 저는 여러분들에 비하면 애송이에 불과했습니다. 그저 순전히 운이 따라서 여기까지 온 것이지요··· 저는 처음 고왕 건설에 발을 들였을 때처럼 이사장으로 뒤에서 회사를 지원하겠습니다.
굵직한 것들을 치워버리고 나자 한영수 앞에는 아주 많은 돈과 시간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한국을 떠났다.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혼자는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아주 훌륭한 동반자가 있었다.
별을 품은 밤처럼 눈동자를 한 여자가.
“오빠. 여기서 뭐 해요.”
바닷바람을 맞으며 잠시 눈을 감고 있던 한영수의 뒤에서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람에 실려 흩어지는 목소리를 끝까지 음미하곤 한영수는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돌리자 고윤아가 서 있었다.
여전히 너무나도 아름답고 환한 미소를 짓는 한영수의 그녀가.
그리고,
“아빠!”
한영수와 고윤아를 딱 절반씩 섞은 것 같은 여자아이가 덜 익은 발음으로 그를 불렀다.
엄마의 손을 꼭 쥐고 있던 아이는 그 손을 뿌리치고 아빠를 향해 아장아장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리 와! 우리 공주님!”
한영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단숨에 아이를 자신의 가슴팍까지 끌어안았다.
아이는 무엇이 그리도 행복한지 살짝 아빠의 머리카락을 조막손으로 당기며 까르르 웃었다.
아이의 이름은 한수아.
수아를 만나게 된 것은 한영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특별한 축복이었다.
처음 윤아로부터 임신 사실을 들었을 때 한영수는 기쁨과 두려움이 뒤섞인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어머니가 자신을 낳을 때 그랬듯이 혹시라도 고윤아를 잃게 될까 봐, 남몰래 손톱을 깨물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그 장영복 회장의 마음이 이해될 정도였다.
다행히 한영수에게는 그런 불행이 찾아오지 않았다.
수아는 건강하게 태어나 이날 이때까지 한영수에게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행복감을 주고 있었다.
가끔은 고윤아가 부녀관계를 장난스럽게 질투할 정도.
한영수는 늘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싶어 했다.
그 방법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드디어 그는 그 답을 찾게 된 것이다.
“아빠, 아빠···”
세 살배기 아이는 아직 말이 서툴렀다.
그 모습마저도 너무나 사랑스러워 한영수는 제 볼을 아이의 볼에 사정없이 비벼댔다.
“아까 멀리서 보니까, 전화 통화하는 것 같던데··· 한국에서 온 전화에요?”
“응. 맞아. 구동일에게서 온 전화였어.”
옆에 다가온 고윤아의 말에 한영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에메랄드 시티. 이제 공사 시작이죠?”
“응. 틀림없이 잘 해낼 거야. 고왕이 원래 기술력 하나는 훌륭한 기업이었으니까.”
“아쉽지 않아요? 모든 걸 포기하고 떠나온 것이.”
“왜? 그럼 당장 내일이라도 한국 돌아갈까?”
한영수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고윤아의 표정은 몹시나 진지했다.
“오빠가 원한다면 돌아가요. 나랑 수아는 오빠가 어디에 가든 옆에 있을 테니까.”
“··· 윤아야.”
한영수가 잠시 딸에게서 눈을 떼 고윤아를 바라보았다.
“포기라니. 나에게 정말 필요한 건 여기에 모두 있는걸. 살면서 일분일초가 이렇게 오롯이 행복했던 순간이 없었어. 지금이 나에겐 인생의 전성기야.”
수아가 한영수의 품에서 잠시 몸을 버둥거렸다.
아이의 뜻을 눈치를 챈 아빠는 수아를 살며시 모래사장 위에 내려놓았다.
아이는 방실방실 웃으며 제 아빠와 엄마를 한 번씩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한영수와 고윤아 딱 중간에 자리를 잡고 아빠와 엄마 손을 단풍잎 같은 손으로 꼭 쥐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한영수와 고윤아는 동시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들어갈까?”
“그래요. 들어가서 밥 먹어요. 우리.”
그렇게 세 사람은 점점 멀어져갔다.
모래사장 위에 다정한 발자국을 남긴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