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99화 (199/200)

199. 그 사람의 이름은

오랜 시간 동안 비어 있던 총수의 방.

태상 그룹 본사의 가장 높은 층에 있는 그곳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주인이 없었다.

말년의 장영복 회장이 자리를 잡고 있던 시절, 이곳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깊고 넓은 해자(垓字)로 둘러싸여 누구의 침범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성 같은 비밀의 방.

이곳을 두고 뭇사람들은 많은 말을 했었다.

역사 속에 불멸의 이름을 남긴 작가들의 그림이 가득 차 있다든지, 모든 가구가 금과 보석들로 치장이 되어있다든지···

흉악한 말을 하기 좋아하는 어떤 이들은 벌건 눈으로 속옷 차림의 세계 각국의 미녀들이 항시 대기 중인 곳이라고 떠들어대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의 실상은 범인들의 통속적인 상상력을 와장창 깨버리기에 충분했다.

총수의 방은 금은보화는커녕 삭막함이 넘쳐나는, 일반적인 회사 사무실의 풍경과 다를 것이 없었다.

태상 그룹의 이름을 생각해봤을 때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검약함이었다.

눈에 띄는 것은 응접용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바둑판 정도랄까.

물론 이곳에 모인 사람 중 질박한 이곳의 풍경을 보고 놀라는 이는 없었다.

그들은 모두 한 번 이상은 이 방에서 장영복과 얼굴을 맞대보았기 때문에.

그 말인즉슨 오늘 이곳에 초대받은 자들은 하나같이 태상 그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임원 여러분이 모두 자리에 앉으신 것 같으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원형 테이블을 두고 둥글게 자리를 잡은 사장단의 일원들을 보며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단상에서 마이크를 잡은 것은 미래기획본부장 박용선이었다.

장영복의 매제이자, 장 씨 형제들의 외삼촌이 되는 그는 장영복 회장의 타계 이후 그룹 전체의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장영복 회장은 유서로써 그에게 오늘 회의의 간사를 맡으라는 마지막 임무를 남겼다.

언젠가 장은호에게 말했듯이, 그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태상에서 은퇴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물러날 것을 각오하고 있었으니 박용선은 새로운 주인의 등장에 있어 제법 훌륭하게 중립을 지킬 수 있었다.

어쩌면 장영복 회장은 박용선이 그렇게 해낼 것 알고 있었기에 그에게 나름 막중한 임무를 맡기고 떠난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태상 그룹의 총수를 결정하는 날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선대 총수께서는 현 사장단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후보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입후보하고 싶은 임원이 계시면 거수해주시기 바랍니다.”

손을 들라니.

명색이 한 나라를 대표하는 기업의 우두머리를 뽑는 것인데, 다소 우스꽝스러운 방식이었다.

하지만 사장단의 누구도 박용선 본부장의 말에 실소를 짓지 않았다.

아니.

그들은 긴장된 얼굴로 눈알을 굴리며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장은수와 장은호.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간사를 보고 있는 박용선조차도 쉽사리 진행하지 못할 정도의.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직원 수만 10만 명이 훌쩍 넘는 초거대 기업.

태상 그룹 전체의 일 년 매출은 대한민국 국가 예산의 절반 이상인 400조 규모에 달하고 있다.

그런 기업의 총수를 뽑는 것이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지만, 태상의 총수는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한 종신직에 가깝다.

장 씨 형제들의 나이를 고려할 때 둘 중 누가 총수가 되더라도 앞으로 20년은 너끈히 이 그룹의 미래를 책임질 것이다.

그렇기에 선출의 방식이 설령 어린애 장난 같은 사다리 타기 게임이었더라도 이 긴장감은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누군가 먼저 손을 들어 올렸다.

곰처럼 커다랗고 두꺼운 손.

장은호였다.

장영복의 자식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장은수는 미간을 잠시 찌푸렸고, 장은호는 입을 굳게 다물었으며, 장은우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장은호는 자기 손이 슬쩍 떨리기 시작했다는 걸 느꼈다.

그가 예측하기로는 오늘 판은 백중세.

압도적인 열세 속에서 여기까지 왔으니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영수, 녀석. 어디선가 소식을 기다리고 있겠지.’

장은호의 마음속에는 순수한 투쟁심이 싹텄다.

총수라는 자리에 오르게 되면 얻게 될 돈과 권력, 그리고 명예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기고 싶었다.

장은호는 그렇게 떨리는 손을 테이블 밑으로 내렸다.

“태상 자동차의 장은호 회장님. 입후보합니다.”

박용선 본부장은 장은호와 눈이 마주치자 그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렇게 되자 사장단의 시선이 일제히 장은수 쪽을 향했다.

“태상 건설 장은수. 입후보하겠습니다.”

장은수는 가늘게 찢어진 눈을 하고 손을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오늘은 명백히 그의 축제였어야만 한다.

‘이따위 반장선거 따위를 할 필요도 없이 말이야···’

한영수만 없었다면.

그랬다면 아마 이 자리에서 장은호가 저렇게 당당히 손을 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두 명의 후보가 자신을 추천하고 난 뒤에도 박용선은 잠시 더 시간을 주었다.

하지만 누가 저 두 형제의 싸움에 도전하랴!

사장단의 의사를 확인한 박용선 본부장이 천천히 입을 뗐다.

“후보자는 태상 건설의 장은수 회장님, 그리고 태상 자동차의 장은호 회장님. 두 분으로 결정하겠습니다. 두 분께서는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그냥 진행합시다.”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졌다.

장은수였다.

“사장단들께서는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총수, 그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말 몇 마디에 마음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실 거라면 차라리 여기서 나가시길 권해드립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어차피 사장단의 모두가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터.

아무리 장 씨 형제가 이제 와 사탕발림 말을 한다고 해도 뒤바뀔 수 없는 것이었다.

“장은호 회장님?”

동의하냐는 뜻으로 박용선이 장은호를 바라보았다.

장은호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투표에 들어가겠습니다. 후보자 선출과 같이 거수 투표의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꿀꺽━

누군가가 성급하게 침을 삼켰다.

“먼저 장은호 회장님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장은호 회장님을 지지하시는 임원분들은 거수를···”

“잠깐.”

장은수가 말을 자르고 나섰다.

“일에는 선후가 있습니다. 대대로 태상 건설의 회장이 그룹의 총수를 맡아왔다는 사실을 여러분 앞에서 제 입으로 또 말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저는 현재 태상 건설의 회장입니다. 적어도 저의 지지에 대해 먼저 확인할 권리 정도는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거수 투표.

정말 간단하지만, 너무나 잔인한 방식.

새로 총수가 될 자는 누가 자신을 반대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게 되는 셈이다.

줄을 잘못 선 누군가의 미래가 어찌 될지는 두말해봐야 잔소리.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이 투표는 눈치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점을 간파한 장은수가 다른 말을 통해 돌려 말한 것이었다.

‘은호야. 미안하게 되었다.’

박용선 역시 장은수가 눈치챈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렇게나마 장은호에게 도움을 주려고 했다.

아무리 중립을 지키려고 해도 그가 기계가 아닌 한 마음 가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양보하겠습니다.”

장은수의 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담담한 목소리로 장은호가 말했다.

“··· 장은호 회장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시작하시지요.”

박용선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뒤로한 채, 장은호는 사장단을 둘러보았다.

누가 자신의 편이 되어줄 것인가.

과연 생각했던 것대로 일이 풀릴 것인가.

크흠━

헛기침을 한번 한 박용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장은수 회장님을 지지하시는 임원분들은 지금 거수를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손이 올라왔다.

태상 전자를 맡고 있는 이동일 사장이었다.

이동일 사장은 장은수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이어서 손이 연달아 두 개 올라왔다.

태상 바이오와 태상 기획.

그걸 보는 장은호의 볼이 씰룩거렸다.

‘여기서 더 나오면 안 돼.’

장은호의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가기 시작했다.

만약 여기서 누군가가 또 손을 든다면, 애써 장은호 쪽으로 돌아선 사람들이 다른 마음을 먹고 변절해버릴지도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처음부터 장은호 편을 들었던 태상 중공업 김준형 사장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발···’

기도하는 마음으로 장은호가 간절히 빌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팔 들고 계신 분들 팔 떨어지겠어요. 본부장님, 이쯤 했으면 다른 쪽 생각도 들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장은우였다.

그녀는 박용선을 향해 우아한 손동작을 보냈다.

“··· 장은우, 너···”

장은수가 장은우를 향해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

장은우는 고개를 모로 돌려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드리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조금 더 기다려보겠습니다.”

시계의 초침이 단 한 번 움직이는 것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쾅━

그리고, 그 영원할 것 같던 시간을 깨버린 것은 테이블을 내려치는 장은수의 주먹질 소리였다.

“전기형 사장··· 당신까지···”

어금니를 꽉 깨문 장은수는 손을 들지 않고 있는 태상 금융의 전기형 사장을 씹어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지만, 전기형 사장은 그 독한 압박에도 끝내 손을 들지 않았다.

“··· 충분히 시간을 드린 것 같습니다. 그럼 장은호 회장님에 대한 지지 의사를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권표가 있을 수도 있으니···”

호명이 끝나기 무섭게 손바닥들이 하늘을 향하기 시작했다.

장은우를 필두로 신형복 사장, 김준형 사장··· 그리고 소심하게 팔을 들어 올린 전기형 사장까지.

장은수를 지지한 세 표 당사자들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일곱 표.

그 세 사람을 제외한 사장단의 모두가 장은호를 지지했던 것이다.

“이것으로 결정이··· 되었군요.”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선언을 하듯 잠시 뜸을 들이는 박용선 본부장.

“사장단의 결의에 따라 태상 그룹의 세 번째 총수는 장은호 회장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짝짝짝━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박수는 곧 모두에게 전염이 되었다.

오직 한 사람.

장은수만이 돌처럼 굳은 채 가만히 있었을 뿐.

“축하해.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닌 거 알고 있지? 오빠는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야.”

장은우가 장은호 옆으로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알고 있어··· 고마워, 누나. 어쨌든 내 편이 되어주어서.”

“나한테 한 약속이나 지켜.”

그때, 장은수가 귀신에라도 홀린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웃기지도 않는군.”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장은수는 날카로운 눈으로 모두의 얼굴을 한 번씩 쏘아본 뒤 그대로 총수실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장은우의 말이 맞았다.

비록 큰 싸움에서 대패를 했으나 장은수는 결코 쉽게 포기하지 않으리라.

제 형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장은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단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 축하한다.”

“고맙습니다. 외삼촌. 저 잠깐 마이크 좀.”

마이크를 잡은 장은호.

그의 얼굴에는 단호한 결의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선 저를 지지해주신 사장단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시 한번 쏟아지는 박수.

“무엇보다도 태상을 사랑하는 제 진심을 알아주신 것 같아 무척이나 기쁩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감상과 별개로 오늘 이 자리에 꼭 있었어야 하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 장은호.

“저는 제 욕심 때문에 총수가 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태상 그룹이 세상을 위해 더 나은 일을 하는 기업이 되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태상을 앞에서 이끌 수 있는 자리에 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저보다 그걸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총수 자리를 양보할 수 있습니다.”

어어···

사장단들의 입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여기 있어야 할 그 사람.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제가 오늘 이런 지지를 받는 것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틀림없이 태상을 한층 더 높은 곳으로 이끌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이제는 모두가 아실 겁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오롯이 행복한 시간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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