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구원은 먼 곳에 있지 않다
장은수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장영복 회장을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장은수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왜 자기 앞에서 저리도 노기를 뿜고 있는지도.
‘가만··· 내가 어제 집에 들어와서··· 아니, 그보다.’
“왜 그런 표정으로 저를 보시는 겁니까. 예?”
장은수는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질러보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장영복 회장은 굳게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장영복 회장은 장은수에게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야. 아버지, 당신은 언제나 나를 그렇게 바라봤었지. 끝까지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겁니까? 내가 그렇게 못마땅해요? 난 태상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어! 20년입니다. 20년! 그 긴 세월을 인고하며 기다려왔다고!”
“··· 정말 그렇게 생각해?”
순간 장은수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는 핏발 선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였다.
놀랍게도, 조금 전까지 그의 앞에 서 있던 장영복 회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한영수가 서 있었다.
“당신도 알고 있잖아. 그런 말 못 들어봤어?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당신이 나를 회유해보겠다고 손을 내밀었던 그 순간 당신은 이미 진 거야.”
“개 같은 소리하지 마. 이 빌어먹을 사생아 새끼야. 황 실장 말이 맞았어. 널 죽일 수 있을 때 죽여버렸어야 했어.”
장은수는 거친 숨을 내쉬며 멱살이라도 잡을 듯이 한영수를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장은수가 정확히 한 발을 내디디면 딱 그만큼 한영수가 멀어져 갔다.
“거기서 이 새끼야! 도망치지 마라.”
* * *
“··· 헉!”
장은수는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꿈···’
장은수에게 있어서 정말 끔찍한 악몽이었다.
단 두 명.
살면서 그에게 패배감이란 것을 심어준 유이한 두 명이 동시에 나와버렸으니.
장은수의 침실은 대궐 앞마당처럼 넓은 곳이었다.
이따금 그의 애인이 찾지 않는다면 대부분은 장은수가 혼자 보내는 곳.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침실은 그 크기가 넓었던 만큼 엄청난 적막함이 가득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장은수는 고개를 돌려 침대 옆 탁자 위 시계를 바라보았다.
새벽 4시 24분.
이가 갈리는 지독한 꿈에 잠기운은 모두 달아나 버렸고, 그렇다고 다시 눈을 감고 양을 세기에는 정말 애매한 시간이었다.
불면.
장은수는 요즈음 지독한 불면증을 겪고 있었다.
그 병증의 시작은 얼마 전에 소집했던 사장단 모임 때부터였다.
나름 신경 써서 준비한 만찬이었다.
하지만 여느 때와 다르게 온도가 미지근하기만 했다.
자리에 참석한 사장들은 말을 아꼈다.
평소라면 인사치레로라도 장은수의 귀에 아름답게 들릴 말들을 한마디라도 했을 그들이다.
상석에 앉아 뱀 눈을 하고 사장들을 돌아보던 장은수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장은우는 만찬 내내 단 한마디의 말조차 없었다!
장은수는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을 어딘가에 가둬놓고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라도 받고 싶은 기분이었다.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댄 장은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낯선 감정이 그를 통렬하게 때려왔다.
고독함.
스스로가 비참해지는 기분이었다.
장영복 회장이 그에게 태상 건설의 회장에서 물러나라고 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장은수의 눈에 세상은 정글.
약자가 강자에게 먹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먹이 사슬의 최상단에 있을 수 있는 특권이 있다고 장은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마치 연약한 초식동물이 된 것 같은 지금 기분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난 분명히 압도적으로 유리한 자리에 있었어. 한영수, 그 새끼에 비하면··· 도대체 왜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어디서부터 어긋났냔 말이야. 만약 내가 조금 다르게 행동했었다면···’
어둠 속에서 장은수는 머리를 거칠게 털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이제는 그 어떤 후회도 부질없을 뿐이라는 걸.
바로 오늘, 불과 반나절 뒤면 총수 선출을 위한 사장단 회의가 시작될 터였다.
*
“어? 영수 아저씨다.”
운동장에서 삼삼오오 모여 앉아 무슨 심각한 회의라도 하는 것 같던 아이들이 인기척에 둥근 머리를 일제히 들어 올렸다.
내 존재를 확인한 아이들은 이내 형, 아저씨, 삼촌··· 온갖 호칭을 붙여가며 내 쪽을 향해 달음박질을 쳐왔다.
비 온 뒤의 들꽃처럼 쑥쑥 자라 있는 아이들.
“다들 점심은 먹었니?”
아이들은 우렁차게 한 목소리로 네━ 라고 외쳤다.
“우리는 3학년이어서 학교 일찍 끝났고요. 형들은 아직 학교에 있어요.”
어떤 녀석은 묻지도 않았는데 나에게 새삼 놀라운 정보를 알려주기도 했다.
“그런데 너희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었던 거야?”
“아, 저기 개미들이 가고 있어요. 한 줄로 가고 있어요.”
바가지 머리를 한 아이 한 명이 자랑이라도 하듯 크게 외쳤다.
그래.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충만한 저 시절에는 아주 작은 것조차 즐거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신부님께서는 뭐 하고 계시니?”
“신부님, 지금 주무시고 계세요.”
“이 시간에?”
나는 놀란 표정으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매사 부지런하게 자명종처럼 살아오신 분 아닌가.
태양이 딱 머리 위에 떠 있는 이 시간에 신부님이 주무신다는 건 쉬이 상상하기 어려웠다.
“신부님, 요즘 잠꾸러기래요.”
한 아이가 깔깔대며 말하자 다른 아이들도 키득키득 그 아이를 따라 웃었다.
“전에 봤어요. 저녁 먹고 동생들 동화책 읽어주시다가 갑자기 꾸벅꾸벅 주무셔서 책을 바닥에 떨어트리셨어요.”
“그랬구나.”
아! 당신께서도 이제는 정말 은퇴하실 때가 되었구나.
누구도 하기 힘든 일을 누구보다도 잘 해내신 분이다.
그 사역이 어디 신앙심 하나만으로 가능했겠는가?
과거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우리 신부님만큼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 하리라.
“영수 아저씨, 우리가 신부님 불러드릴까요?”
날 위해서는 흔쾌히 어떤 부탁도 들어줄 수 있다는 듯, 바가지 머리의 아이가 눈을 반짝였다.
나는 아이를 향해 두 손을 내 저었다.
“아니야. 신부님 쉬시게 우리 그냥 두자. 그런데 너희들 개미 괴롭히면 안 된다. 있잖아. 개미들은 몸집이 아주 작지만, 자기 몸보다 20배 무거운 것도 번쩍 든단다.”
우와━
아이들의 입에서 순수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너희들끼리 놀고 있어. 아저씨는 잠깐 저기 가 있을게.”
나는 아이들에게 손을 한번 흔들고 자애 보육원의 입구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제 잠시 후면 태상 그룹의 총수를 결정짓는 사장단 회의가 시작될 것이다.
짧은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최선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의심을 하지 않는다.
틀림없이 은호 형이 총수가 될 것이다.
장은수에게는 더 이상 비빌 언덕이 없었다.
에메랄드 시티 프로젝트를 두고 태상과 고왕은 경쟁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정된 파이를 두고 싸우니, 한쪽이 영역을 넓히면 다른 쪽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고왕 건설이 대규모의 수주에 성공했다는 소식은 재빠르게 태상 건설의 귀에 들어갔다.
대한민국 최고를 자처하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몹시나 충격적인 뉴스였을 것이다.
듣자 하니, 태상 그룹 차원에서 내부적으로 책임론의 쟁점이 된 것은 태상 자동차 문제였다.
태상 건설은 도대체 왜 태상 자동차의 협업 요청을 쳐낸 것이냐는 것이다.
대놓고 말을 못 할 뿐이지 그 화살이 누구를 겨누고 있었을지는 세 살 아이도 알 일이다.
장은수의 아집이었고,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몬 것이다.
10인의 사장단에서 우리 쪽이 확보한 표가 5표.
딱 절반을 차지한 셈인데, 공개 투표에서 그런 모양새가 되면 흔들리는 쪽은 장은수 쪽에 선 자들이다.
그들은 장은수의 인품이나 역량이 아닌, 선출 가능성 딱 하나만 보고 그쪽에 선 것이기 때문에.
더구나 은호 형 뒤에 누가 있는지 이제는 모두가 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남자가 태상 금융뿐만 아니라 태상 건설까지도 입김을 미치고 있다는 걸.
그래.
내가 그렇게 했다.
이 언덕에서 힘없이 서 있던 그 어린아이가.
자연스럽게 장영복 회장과 사진으로만 본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보셨습니까?
나는 세상에 증명을 해냈습니다.
내가 결코 실수로 여기,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습게도 그 순간 나 가슴을 지배한 감정은 원망이 아닌 그리움이었다.
예. 사실은 증명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저 영수야, 따듯하게 내 이름을 한 번 불러주길··· 그걸 바랐어요.
“··· 영수야.”
그때 놀랍게도 귓가에 따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부님이었다.
“신부님. 주무신다고 하길래 일부러 밖에 있었는데···”
“아이고, 어린 것들이 아주 네가 왔다고 보통 성화를 부려야지···”
나는 신부님을 다정하게 안아드렸다.
그러자 신부님의 주름진 손이 내 등을 토닥였다.
“너, 왜 서글퍼 보이니?”
“아니에요. 그냥···”
“그래··· 오늘이 태상의 총수가 결정되는 날이지?”
“네. 새로운 괴물이 탄생하는 날이지요.”
괴물과 싸우려다, 너까지 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신부님이 나에게 해주셨던 말이 떠올라 은근하게 말했다.
신부님은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영수야. 너는 이제 거기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냐, 아니면 영영 묶이게 되는 것이냐.”
나는 말없이 그저 희미하게 웃기만 했다.
신부님도 굳이 나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으셨다.
“신부님. 어렸을 때 제가 여기 서서 부모님을 하염없이 기다렸던 것 알고 계시지요?”
“알다마다. 그 모습을 내가 어찌 잊겠니.”
“저, 이제 용서하려고요.”
신부님이 놀란 눈을 크게 뜨시고 나를 바라보았다.
“과거는 어쩔 수가 없는 거잖아요.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이 언덕 위에 서 있던 상처받은 아이의 마음을 이제 와 달랠 수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미래는 다르잖아요. 그건 제가 바꿀 수 있는 거니까요. 이제는 세상에 없는 누군가를 계속 원망한다고 해서 제 삶이 더 나아질 것 같지 않아요.”
“용서란 과거가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더구나. 이제야 영수, 네가 집착을 버릴 수 있는 용기를 내었어···장하다.”
“한때는 남들과 다른 제 삶이 불행하다고 가여워했던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어요. 제 삶에 모든 순간에는 나름대로 의미가 다 있었어요. 이곳에 버려졌기 때문에 신부님과 승우를 만날 수 있었던 것처럼···”
신부님이 눈을 감으셨다.
그리고 당신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주께서는 시련을 이긴 믿음을 귀히 여기시니···”
나는 고개를 들어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500억을 상속받았다.
한동안 내 삶의 특별함이 거기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답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따듯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기를 원할 때, 신부님이 그리해주신 것처럼.
사실은 내 하루, 하루가 모두 특별한 나를 만드는 단련의 과정이었다.
정말이지 구원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마침내, 모든 것들 받아들인 오늘.
오늘이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 순간 이후부터 비로소 내 진짜 인생이 시작되리라.
그 사람의 이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