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대통령께서 뵙고 싶어 하십니다
“밖에 서 있는 저 험악한 양반들은 대관절 누굽니까?”
유호성 차관의 엄지손가락은 굳게 닫혀있는 미닫이문을 향해 있었다.
“아. 그게···”
나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께를 긁었다.
“뭐랄까, 일종의 보디가드랄까요.”
괜스레 무안해졌다.
앞으로 당분간만이라도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한 것은 고윤아였다.
나야 당연히 거추장스러움을 필두로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며 항변해보았지만 끝내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별 수 있겠는가.
나 생각해서 하는 말인 것을.
그래서 예전에 합을 몇 번 맞추어 보았던 최화란의 아랫사람 중 눈에 들어왔던 이 두 명을 그녀에게 양해를 구한 뒤 고용을 하였다.
문제는 최화란의 사업장에서 내가 지나치게 신격화 되어 있다 보니 저 친구들이 나를 너무 과잉보호하려고 한다는 것.
그러지 말고 편하게 둘이서 따로 식사하시라, 말을 해도 내 경호원들은 꼿꼿한 정자세로 문 뒤를 지키고 서 있었다.
유 차관은 웬 덩치 두 명을 그렇게 내가 대동하고 나타나자 꽤 놀란 모양.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친구들은 오늘 제가 누구를 만나는지 전혀 모르고 있으니까요. 혹시라도 말 새어나갈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허허··· 저쪽의 인상이 워낙 험해서, 이거 납치라도 당하는 건가? 겁을 먹었지 뭡니까.”
양반다리로 앉은 유 차관은 무릎을 두어 번 치며 웃었다.
“생김새와는 다르게 순박한 친구들입니다. 건달 같은 부류들도 아니구요.”
“한 회장님도 한 덩치 하는데, 경호원이라. 이제 진짜 재벌 총수가 다 되셨다 이건가요.”
“제가 운동을 좋아하는 건 맞지만, 근육이 있다고 해서 덤프트럭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뼈 있는 내 말의 속뜻을 알 리가 없는 유호성 차관은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일단 식사하시죠. 차관님께서 토속적인 음식을 좋아하셔서 조용한 곳으로 제가 알아봤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공복인데 입에 군침이 도는군요.”
“예. 어서 드시지요.”
유호성 차관은 차려진 밑반찬 중 전에 젓가락을 대었다.
잠시 우물거리며 음식 맛을 보던 유 차관.
“이거··· 안되겠구만. 한 회장님 이후에 또 일정 있으십니까?”
“일정이요?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만.”
“그래요? 그럼 우리 막걸리 한잔할까요?”
“막걸리. 좋지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으로는 좋다고 말했지만, 사실 막걸리를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왜, 다들 그런 적이 한 번쯤은 있지 않은가?
어떤 음식을 먹고 단단히 체하면 그 음식 자체가 싫어지는.
나 같은 경우에는 주량도 제대로 모르던 대학 새내기 시절 막걸리를 먹고 체했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뭐, 행정부의 실세 앞에서 그 정도쯤이야 내가 못 참을까.
그래도 막걸리라니.
유호성 차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영업맨을 뛰던 시절 진상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그쪽이나 이쪽이나 고만고만 회사인 것은 매한가지이면서 양주는 기본에 은근히 옆에 여자 좀 끼고 놀자고 그리도 눈치를 주던 사람들.
일이 그렇게 되어야만 돌아간다는 것에 답답해하던 시절들이 있었다.
여하튼 주문받은 종업원이 막걸리를 들고 들어오자, 우리는 놋쇠 잔 가득 곡주를 채웠다.
첫 잔은 원샷이 국룰이라고, 꿀꺽꿀꺽 막걸리를 목구멍으로 부어 넣자 시큼달달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아. 좋네요.”
유호성 차관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막걸리를 즐겨하시는 모양입니다.”
“내가 독주는 잘 못 해요. 그래도 가끔 기분 좋은 날에는 이렇게 막걸리는 한 잔씩 합니다.”
“그렇습니까? 듣기 좋은 말씀이군요. 그렇다면 틀림없이 오늘 절 만난 것도 기분이 좋은 일이실 테니까요.”
하하하.
“이거, 못 본 사이에 넉살이 부쩍 느셨습니다. 그래요. 회장님을 만나면 희한하게 기분이 좋더군요. 아, 혹시라도 오해는 마세요. 제 성 정체성은 확실하니까··· 미안합니다. 쓸데없는 농 한번 해봤어요. 그나저나, 정말 놀랐습니다.”
“제 출생의 비밀··· 말씀이시겠지요?”
유 차관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였다.
이 소리부터 나오리라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지금은 겨우 가라앉기는 했지만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트렸던 뉴스 아닌가.
“한 회장님에게는 참으로 아픔이 있는 사연이겠지만, 말을 안 하고 넘어갈 수가 없군요.”
“괜찮습니다. 제가 제 입으로 세상에 떠벌린 것인데요.”
“허허··· 그것 참 어떻게 이런 영화 같은 일이.”
영화 같은 일.
하기야 틀린 말도 아니다.
그 어떤 반전 영화도 내 삶과 같을 수는 없을 테니.
갑남을녀와 다르지 않던 나에게 삶이 알려준 것은, 사람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생각을 해야 하고, 또 그 생각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저는 개인적으로 장영복 회장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호부호자라는 말이 딱 맞습니다. 과연 그 피가 어딜 가지 않는군요.”
“저야 뭐··· 실제로 그분의 얼굴 한 번 뵌 적조차 없는걸요.”
나는 씁쓸하게 말했다.
감정적으로야 유 차관의 말이 복잡한 심경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렇다고 나를 칭찬하려는 그의 의도를 비꼬아 보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 그 장영복 회장님조차 아마 한 회장님만큼 이렇게 잘 해내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때, 유호성 차관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몸집이 10분의 1밖에 안 되는 고왕 건설이 태상 건설을 잡지 않았습니까.”
“예? 잡다니요?”
“에메랄드 시티 프로젝트 말입니다.”
유 차관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정말로 해내셨어요. 놀랍습니다.”
소식이 지나치게 빠르다.
카타르 쪽에서는 구두 협의 일체에 대한 비밀 유지를 우리 쪽에 신신당부했다.
당연히 그들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입장.
그래서 나는 프로젝트 팀에게 한정된 통로로만 정보 공유를 할 것을 요청하는 한편, 임원들에게는 이 건과 관련하여 내부자 거래로 문제가 생기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런데 유 차관은 어디서 소스를 들은 것일까.
“글쎄요. 저희와 그쪽 간에 여러 이야기는 오고 가긴 했지만,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직 그저 말뿐이지요. 차관님도 아시겠지만, 이 정도 사업이 몇 마디 말로 퉁 쳐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에둘러 말하자, 유 차관은 자기도 이미 다 안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다 듣는 귀가 있어요. 오늘 자리는 오프 더 레코드로 갑시다. 좋은 일인데 애써 숨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누구보다도 카타르 수주에 대해 세상에 자랑하고 싶은 것이 바로 저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겠네요.”
대한민국의 최고 관료 중 한 사람인 유 차관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했는데 못 알아들었을 리가 없다.
그는 빙긋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그럼 이거 입장이 조금 곤란해지는데.”
“··· 예?”
“사실 오늘 한 회장님을 보자고 한 것은 심부름꾼으로서 전달해야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니까요.”
어디 가도 상석 대우를 받을 유 차관 정도 되는 자가 심부름꾼을 자처하다니.
그 주인이 되는 자는 도대체 누굴까?
나는 눈을 크게 떴다.
“VIP께서 고왕 건설과 한영수 회장님에 대해 관심이 많으십니다.”
“VIP라고 하시면···”
“예. 대통령께서요. 한 회장님을 꼭 만나 뵙고 싶으시답니다.”
잠시 나와 유 차관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짧은 순간 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유호성 차관이야 이 나라 경제 정책의 실행자이자 최고 실무자이니 그와 인연을 맺는 것을 거리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그 자리는 정치의 정점이다.
시장은 숫자로 그나마 가늠을 해볼 수 있지만, 정치는 권력의 속내를 알아야 한다.
글쎄.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와는 결이 맞지 않는 동네다.
내 입으로 말하기 조금 쑥스럽지만, 나도 이제 엄연한 경영인.
그 경영인들이 돈의 힘만 믿고 정치와 얽혔다가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는 역사가 뻔히 말해주고 있다.
“대통령께서 고작 서른 조금 넘었을 뿐이 저와 교분을 두시겠다고 보자는 건 아닐 테고···”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 정부는 이제 임기가 채 일 년도 남지 않았습니다.”
유 차관은 슬쩍 내 눈을 피했다.
마치 맡기 싫은 배역을 억지로 떠맡았다는 듯이.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미간 사이가 구겨진 껌 종이처럼 자글자글해져 있었다.
그의 말에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었다.
나는 그 말을 해석해내기 위해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답은 하나였다.
어떤 파이프를 통했든, 고왕 건설의 에메랄드 프로젝트 수주에 대한 정보를 얻은 현 정권이 내년에 있을 대선을 앞두고 숟가락을 올려 홍보 수단으로 쓰려고 한다는 것.
조금도 달갑지 않은 일이다.
나는 이 일을 하면서 나라에 빚을 진 것이 없다.
세금을 일 원 한 장 속이지 않고 성실하게, 제대로 냈다.
정부 관료인 유 차관으로부터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은 거래였으며 정당한 비용 역시 모두 지불했다.
이 사업이 정치라는 진흙탕 속으로 끌려 들어가 혼탁해지기를 원치 않는다.
하지만 어떻게 거절할 것인가?
잠시 고민하던 나는 내 앞에 앉아있는 유 차관을 이용해보기로 했다.
“제가 어디 가서 자랑할 만큼 가방끈이 길지는 않습니다. 워낙 배운 분들이 많으니 초라하지요. 그래도 존경하는 학자가 한 분 있습니다.”
“학자요?”
의아하다는 눈으로 유 차관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분께서 이런 말이 있더군요. 강압은 악덕이라고, 강압은 누군가를 목표를 성취하는 도구로 만든다면서··· 그리고 이런 말도 하셨습니다. 시장에 대한 정부의 근거 없는 강압은 그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유호성 차관의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술기운 때문이 아니었다.
저 말을 한 사람이 다름 아닌 유호성 차관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그가 정부의 고위 관료가 되기 이전의 일이었다.
“정말··· 한 회장님이 제가 할 말이 없게 만드시는군요.”
“제가 감히 뭐라고 대통령께서 만나자고 하는 걸 거절하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아직 어리고,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실수라도 할까 봐 두렵습니다. 다만··· 대통령께서는 주기적으로 경제인들과 오찬을 하신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자리에 초대해주신다면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완곡한 거절.
유 차관은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권력이라는 것이 그래요.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눈이 어두워집니다. 그렇게 어두워진 눈은 내가 믿었던 것들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다시 나를 향한 유호성 차관의 눈.
그리고 그의 입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심부름꾼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요. 관심이 없다면 그 게임에 몸을 담글 필요가 없겠지요. 현명합니다.”
유 차관은 손을 들어 셔츠 단추를 몇 개 풀었다.
“자, 다른 이야기 합시다. 일단 전달은 했으니, 속은 편하군요. 그나저나 아까 한 회장님이 한 말씀, 제가 06년도에 썼던 논문이지요.”
“네. 논문 제목이 ‘시장 질서의 적들’ 이구요.”
“맞습니다. 그때는 제가 학구적인 열정으로 충만 해있던 시절이지요. 한 회장님, 하이에크 좋아하십니까? 저는···”
유 차관은 나에게 열정적인 강의를 시작했다.
자기의 학문적 업적을 누군가 알아준 것에 대한 기쁨일까?
그의 눈은 아이의 그것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사실 논문은 그저 예전에 유호성 차관을 포섭하기 위해 미리 읽었던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되면 곤란한 건 이쪽인걸?
정말로 내 가방끈이 짧은 것을 들킬 지경에 처했으니까.
나는 웃으며 막걸리가 담겨있는 놋쇠 그릇을 집어 들었다.
구원은 먼 곳에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