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사생아가 만든 놀라운 사건
“오빠, 잠깐만요.”
새벽부터 일어나 일찌감치 출근하려는 나를 고윤아가 불러세웠다.
모두가 말하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집.
최근에 나는 그곳으로 이사를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누군가의 예상과 달리 그럴듯한 집은 아니다.
마포의 한 오피스텔.
월세 250.
이사를 해야 하는 나를 위해 윤아가 이곳저곳 집을 알아봐 주었었다.
그중에는 대한민국에 이런 데가 있었구나 싶은 궁궐 같은 곳도 있었고, 대한민국의 상위 0.1%가 모여 산다는 초호화 아파트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곳은 13평 남짓한 오피스텔이었다.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여기던 과거의 나라면 누군가의 한 달 치 월급에 맞먹는 월세에 미쳤다고 펄쩍 뛰었을 것이다.
반대로 수조 원의 자산가가 된 지금의 나라면 조심스럽게 겨우···?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리 부담되는 액수는 아니다.
물론 돈 때문에 월세살이를 시작한 건 아니었다.
모든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정착을 조금 미루고 싶었다.
이 시기만 지나고 나면 나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생길 것이다.
평생 살 곳이야 그때 신중하게 골라도 조금도 늦지 않다.
나름 이것도 돈이 내게 준 자유랄까.
집값의 오르고 내림세나 은행 이자 같은 것들에게 당당하게 중지를 들어 올리고 내가 원하는 때, 원하는 곳을 살 수 있다는 것은.
그래서 고민 끝에 고왕 건설과 BH 인베스트먼트를 오가기 좋은, 딱 중간 지점에 임시 거처를 구한 것이다.
“왜? 뭐 문제라도 있어?”
“넥타이. 조금 삐뚤어졌어요. 오늘 중요한 날이잖아요. 이럴 때일수록 옷차림을 바로 해야 해요.”
고윤아는 내 품으로 다가와 신중한 손길로 넥타이를 바로 매주었다.
“애인이 넥타이를 고쳐주는 거, 여기저기서 참 뻔하게 가져다 쓰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그걸 집어넣는지 알겠다.”
내가 빙긋 웃으며 말하자, 고윤아가 둥근 눈을 크게 떴다.
“왜요?”
“··· 행복해지니까.”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걸까.
커다란 박스티를 입은 민낯의 윤아는 까치발을 들어서 내게 살짝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때,
“응? 잠깐만.”
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가 웅, 웅━ 진동을 울렸다.
휴대전화 액정에는 아주 낯선 번호가 찍혀있었다.
그리고 그 번호는 잠시 나를 행복과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떨어트려 놓았다.
“··· 카타르에서 온 전화야.”
지금 여기 시간은 오전 7시.
카타르 도하와 서울의 시차가 대략 6시간이니, 현지 시각은 새벽 1시.
카타르에 파견된 프로젝트팀은 어제 저녁부터 에메랄드 프로젝트 관련하여 그쪽 고위 관료와 실무자들을 상대로 마라톤 회의에 들어간 참이었다.
고윤아가 나에게 오늘이 중요한 날이라고 말하는 것도, 내가 평소보다 일찍 출근을 준비하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꿀꺽━
나와 고윤아가 동시에 마른침을 넘겼다.
“··· 받아봐요.”
고윤아의 재촉 아닌 재촉을 따라 나는 조심스럽게 휴대전화 액정에 손을 올렸다.
“전화 받았습니다. 한영수입니다.”
“회장님···저···”
무엇이 문제인지는 모르지만, 통화 연결의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전화 상대방의 목소리를 바로 알아들었다.
“사장님, 말씀하시는 게 잘 안 들립니다.”
“잘··· 예, 잠시만··· 회장님, 지금은 어떻습니까.”
“예. 괜찮아요.”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이종현 사장의 목소리에서 자그마한 징후라도 발견하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기존의 TF팀을 확장한 프로젝트팀이 카타르에 넘어간 지도 벌써 한 달째.
LK와 태상 자동차의 인원들까지 포함된 대규모의 인력이었다.
현지 사정을 좀 더 생생하게 보고 받기 위해 영상 통화를 할 때마다 이종현 사장의 얼굴은 구릿빛이 점점 진해졌다.
그 피부색은 이종현 사장이 얼마나 열심히 발로 뛰어다니고 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회장님, 회의록과 자세한 보고 사항은 지금 얼추 정리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문서로 회사에 보내겠습니다.”
“거기는 지금 새벽일 텐데··· 너무 고생이 많으십니다.”
“아니요. 촌각을 다투는 일이니까요. 일단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종현 사장은 잠시 큼큼━ 목청을 가다듬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예상보다 훨씬 긍정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물론 정식 계약은 아닙니다만··· 산업단지 전체와 주거 A 구역, 그리고 해당 구역의 기초 도로 교통망 건설까지 저희에게 수주를 주기로 구두 협의가 되었습니다.”
과연 우리의 기대치를 넘어서는 엄청난 성과였다.
사람이 너무 기쁘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윤아를 바라보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번쩍 든 주먹을 보자 윤아의 양쪽 입꼬리가 크게 올라갔다.
“··· 회장님? 듣고 계십니까? 전화가 안 들리십니까?”
“아니요. 듣고 있습니다. 너무 반갑고··· 기뻐서, 말이 나오지 않네요.”
하하하━
수화기 너머에서 이종현 사장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직 정식 계약은 아니니 김칫국부터 마시기는 싫지만,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60조가 훌쩍 넘는 기대 수익이 예상됩니다. 그쪽에다 LNG 선박 100대, 아니 200대 이상을 파는 것과 같지요. 중동 프로젝트로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액 달성은 100% 확신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너무 고생하셨습니다. 정말로···”
참으로 놀라운 일 아닌가?
나의 작은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것이 이 나라의 일 년 치 예산 절반과 맞먹는 일거리를 만들어 내다니.
“아니요. 파견된 직원들의 노고를 헐뜯는 것은 아니지만, 저희는 차려놓은 밥상에 수저만 얹은 셈입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현지에서 모든 것을 해낸 것이 사장님과 직원분들인데.”
“어제 회의에 놀랍게도 아메드 빈 알리 왕자가 직접 참석했습니다. 왕자는 제일 먼저 저희에게 회장님의 안부를 묻더군요. 아시겠지만, 이곳의 왕족들은 자존심이 정말 강합니다. 그런데 왕자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회장님은 신의 가호를 받는 용맹한 전사라고. 제 귀로 듣고도 믿을 수가 없는 소리였습니다! 심지어 같은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그런 말을.”
눈을 감자 회의장의 모습이 선연하게 그려졌다.
왕자의 말 한마디에 그걸로 분위기는 끝이었을 것이다.
“LK, 그리고 태상 자동차와의 연합도 회장님의 작품 아닙니까. 저들은 대한민국의 기업들이 자신들의 도시 건축을 위해 이렇게까지 뭉쳤다는데 굉장한 감명을 받았습니다. 거기서 또 점수를 딴 것이지요. 그리고···”
또다시 이종현 사장의 목소리가 비프음에 먹혀버렸다.
“사장님? 말씀이 끊깁니다.”
“아··· 여기가 지금 모래폭풍 때문에··· 통신이···”
“알겠습니다. 지금 그렇지 않아도 회사로 가는 중입니다. 좀 안정되면 다시 연락해주세요.”
전화를 끊고 나는 잠깐 멍하게 고윤아를 바라보았다.
허리 끝에서 승리의 성취감이 짜릿하게 올라왔다.
“··· 윤아야.”
“오빠.”
“내가··· 아니, 우리가 해냈어.”
나와 윤아는 서로를 꼭 부둥켜안았다.
* * *
프로젝트팀에는 태상 자동차의 직원들도 있었기에, 카타르의 희소식은 장은호의 귀에도 빠르게 들어갔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장은호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모든 것을 한영수에게 맡겨둘 수는 없었다.
최근 장은호를 지배하고 있는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양심적인 기업인으로 회사 운영을 제법 잘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형의 야욕으로부터 태상을 지킬 수 있는 것도 오직 자신뿐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던 거야.’
한영수의 손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돌아가기 시작한 톱니바퀴를 보며 장은호는 자신을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 깨닫게 되었다.
장은호는 고개를 들어 자기 앞에 있는 남자를 힘 있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회장님께서 이렇게 절 먼저 보자고 하시다니··· 뭐랄까, 아주 의외군요.”
“사장님이나 저나 같은 태상인 아닙니까. 못 볼 이유도 없지요.”
“정공법을 좋아하시는 분 아닙니까. 저는 아시다시피··· 장은수 회장님의 사람이고.”
장은호 앞에는 태상 금융의 사장인 전기형이 앉아있었다.
“형의 사람이라··· 아직도 그런 속 편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최근에 형이 극비리에 사장단의 일부를 소집하셨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 예?”
전기형 사장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모르고 계셨군요. 형이 그 사장단 일부를 모아, 총수 선출에 지지를 호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장단 중에서도 최측근인 전기형 사장님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니···”
당연한 소리지만, 장은호 역시도 소집 명단에 이름이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 것은 누나인 장은우.
그녀는 어떤 발언도 없이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고 한다.
전기형 사장이 거기서 배제되었다는 것을 알려준 것도 다름 아닌 장은우.
장은호는 손에 들어온 이 카드를 바로 써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아니나 다를까, 장은호의 말을 듣자 전기형 사장의 눈동자의 초점이 잠시 흐려졌다.
비즈니스 맨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자신이 회사에서 더 이상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말단 사원이든, 가장 높은 곳에 앉아있는 사장이든 월급쟁이라면 모두가 똑같다.
장은호는 그 감정을 건드려보기로 했다.
“형은 맺고 끊는 것이 지나칠 정도로 확실한 사람이지요.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아낌없이 끌어올려 주지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 언제라도 내쳐버리는··· 황 실장. 십 년을 넘게 형의 뒤를 봐주었는데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계시죠?”
전기형은 충성심보다는 소심함이 앞서는 사람이라는 걸 장은호는 잘 알고 있었다.
전기형 역시 자기를 대하는 장은수의 태도가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저보고··· 배를 갈아타라는 말씀입니까.”
“갈아탄다니요. 지금 사장님에게는 그런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재밌게도 장은호의 말투는 한영수와 닮아 있었다.
그 역시 자신도 모르게 한영수에게 어느 정도 동화가 되어버린 걸까?
“BH 인베스트먼트를 막지 못한 책임을 물어 형이 사장님에게 사표를 받을 거란 소문이 돕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그저 소문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군요. 따님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은 걸로 압니다. 회사에서 내쫓기기에는 정말 끔찍한 시기 아닙니까? 큰 경사를 앞두고 말입니다.”
으으···
전기형 사장은 신음만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는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 말을 생각하면 뭔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있어요. 지금 사장님께도 이 말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전기형 사장이 불안한 눈을 들어 장은호를 바라보았다.
“사장님을 위태롭게 만든 BH 인베스트먼트, 바로 그자들이 사장님을 지켜줄 겁니다. 회장님이 스톡옵션으로 살 수 있는 태상 금융의 지분. BH 인베스트먼트에게 넘기세요. 제값은 분명히 쳐 줄 겁니다. BH 인베스트먼트, 최대 주주까지 불과 몇 포인트입니다. 그들을 태상 금융의 최대 주주로 만들면···”
“장은수 회장님의 의사와 상관없이 절 지켜주겠다는 겁니까?”
“그래요. 그렇게 사장단에서 살아남으면 뭘 해야 할지 제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전기형 사장은 긴 장고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고개가 작게 아래로 떨어졌다.
대통령께서 뵙고 싶어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