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열차의 운전사
“선진 유통? 그게 뭔데요. 내가 알아야 하는 회사입니까?”
“저, 그게 회장님···”
“강 상무님. 말씀 똑바로 하세요. 도대체 왜 그리 허둥지둥합니까.”
장은수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들고 눈을 몇 번 깜빡인 뒤 강 상무를 쏘아보았다.
강 상무는 장은수가 출근하기 무섭게 회장실로 찾아와 말을 더듬거렸다.
‘또 뭔데.’
그렇지 않아도 머리 아픈 일이 산더미인 장은수였다.
최근에 그를 괴롭히는 것은 인사 문제였다.
도무지 영양가 있는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는 전기형 사장을 내보낼 생각이었다.
그래서 후임자를 구해보겠다고 뒷구멍으로 조심스럽게 여기저기 찔러보고 있지만, 어쩐 일인지 후보자 모두가 이런저런 이유를 말하며 고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한결같은 태도가 굉장히 불쾌했다.
아니, 단순한 불쾌감 정도가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어떤 불길한 일의 전초인 것 같아 속된 말로 찜찜한 기분이 드는 장은수였다.
‘그런데 출근하자마자 또 저런 죽상 같은 얼굴을 봐야 한다니.’
장은수는 혀를 쯧쯧 찼다.
“고왕 건설의 한영수 회장이 선진 유통을 인수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한영수, 한영수, 한영수···
그 사생아가 나타난 이후로 뭐 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었다.
고작해야 길가에 떨어져 있는 작은 돌멩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돌멩이에 걸려 자빠져 머리통이 깨진 꼴이다.
만약에 한영수가 재벌가의 다른 자식처럼 부유하고 안락한 환경에서 자라났다면.
그랬다면, 장은수는 합법적으로 한영수를 까버릴 방법을 수십 가지도 넘게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재벌가의 어두운 이면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이 장은수였으니까.
하지만 한영수는 권력과 돈, 그 두 가지와 평생토록 지독하리만치 인연이 없이 살아왔다.
우습게도, 이 경우에는 가진 것이 없었다는 게 한영수의 강점이 되었다.
장은수가 진작에 스폰 주는 검사를 시켜 몇 바퀴 돌려보았지만, 한영수는 흔한 교통 법규 위반 딱지 하나 끊은 적 없었다.
“선진 유통··· 그게 뭐 하는 회사인데요.”
“회사 자체는 별 볼 일 없습니다. 연 매출액이 몇십억 단위고···”
“뭡니까, 그럼··· 아니, 잠깐.”
그때, 장은수가 뭔가 퍼뜩 생각났다는 듯 강 상무에게 말했다.
“그 회사 한번 지켜보세요. 아주 선수 앞에서 수작을 부리고 있구만.”
장은수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세금이었다.
그 역시 그 세금 때문에 얼마나 골머리를 썩여왔던가.
돈이 움직이는 자리 뒤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세금이 따라온다.
없이 살던 놈이니 세금 문제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돈을 펑펑 굴리다 이제야 세금이라는 암초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된 한영수가 탈세 창구를 하나 찾은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강 상무의 표정은 풀릴 기미가 없었다.
“아닙니다. 생각하시는 그게 아닙니다. 회장님.”
“뭐가 아니라는 겁니까?”
“선진 유통··· 태상 물산의 최대 주주입니다.”
강 상무의 짧은 말에 장은수의 동공과 입이 크게 열렸다.
“뭔 소리야. 매출 수십억짜리 구멍가게가 태상 물산의 최대 주주라니.”
“저도 그게 너무 의아하고,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 백방으로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강 상무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 이었다.
“이봐요! 강 상무.”
마침내 장은수가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이자 강 상무는 비로소 고개를 푹 떨구고 입을 열었다.
“저도 처음 안 사실인데··· 그 선진 유통이 돌아가신 장영복 회장님의 동생 분···”
순간 장은수의 머릿속에 어떤 얼굴이 떠올랐다.
철저히 비공개로 치러졌던 아버지의 장례식에 찾아왔던 어떤 중늙은이.
당장이라도 바스러질 것처럼 빼빼 마른 그 늙은이는 자기가 아버지의 동생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었다.
장은수조차도 아버지에게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런데 그걸 한영수는 또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동생이라는 자가 하는 회사를 한영수가 인수를 했고··· 그 회사가 태상 물산의 최대 주주란 말이지···”
장은수의 머리가 간신히 이야기를 따라잡았다.
“잠깐··· 그럼···”
“예. 회장님.”
강 상무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새어나가면 끝장이 나는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바들거리는 그의 입술이 말을 이었다.
“태상 물산은 태상 건설의 지분 5%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은수의 볼이 씰룩거렸다.
마침내 한영수가 장은수의 안방까지 쳐들어온 것이었다.
“태상 물산 지분 방어는요.”
“선진 유통을 인수하기 무섭게 기관 투자자들에게 돈을 풀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분을 싹 쓸어모았습니다. 워낙에 그룹 내에서는 소외되어 있던 계열사인지라··· 이미 지분 42.5%를 확보했습니다. 사실상 이제는 방어가··· 어렵습니다.”
“방어가··· 어렵다.”
“송구스럽습니다. 회장님.”
“나가요.”
“예?”
“··· 나가라고.”
장은수의 입에서는 더 이상 존대가 나오지 않았다.
나지막한 장은수의 목소리에 강 상무는 퍼뜩 정신이 든 듯 뒷걸음질로 회장실을 빠져나갔다.
강 상무가 나가고도 장은수는 돌이라도 된 것처럼 한동안 미동조차 없이 굳어있었다.
그렇게 적어도 십 분의 시간이 흘렀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장은수의 눈에 자신의 명패가 보였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회장 장은수’라는 각인이 고풍스럽게 새겨져 있는.
“이런 시팔!”
장은수는 비명 같은 욕설과 함께 그것을 집어 바닥을 향해 힘껏 던졌다.
공교롭게도 명패는 응접 테이블 위로 떨어졌고, 테이블 위를 덮고 있는 유리가 와장창 깨지며 귀를 찢는 것 같은 소음을 만들어냈다.
“회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회장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들이 그 소리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악귀라도 씐 듯 부들거리고 있는 장은수의 모습을 보고 들어온 그대로 다시 조용히 몸을 돌렸다.
‘차라리 죽여 버릴까?’
황 실장이 실패했던 그 작전.
장은수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따위 천박한 일은 아랫놈들이 음모(陰謀)하는 것이지 자신이 직접 꾸밀 것이 아니다.
그건 장은수의 자존심이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도···
그 어떤 흉계를 꾸민다고 해도 한영수는 살아남을 것 같았다.
아니,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뒤를 잡혀버릴 것 같은 더러운 그림이 장은수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제는 누가 챔피언이고 언더독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이었다.
장은수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어 액정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여보세요.”
잠시 통화 연결음이 지나간 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굴 속에서 울리는 것 같은 낮은 저음이.
“형이다. 너 오늘 나 좀 보자.”
* * *
“··· 형.”
예의 그 장은수의 단골 바.
장은호는 제 형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장은수는 그저 동생에게 손바닥을 한번 들어 보였을 뿐이다.
형제는 나란히 앉아 잠시 말이 없었다.
마치 무협 영화 속 고수들이 직접 검을 대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치열한 싸움을 하듯이.
어쨌든 아쉬운 쪽이 먼저 입을 여는 법.
장은수의 말을 꺼냈다.
“너 진심으로 나와 해볼 생각이냐?”
장은수는 말을 꺼내놓고 자신이 멋쩍어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제 와서 하기에는 농담보다도 무의미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형. 우리 태상인의 날 이후로 처음 대화하는 거 알아? 잘 지냈냐는 말이 먼저 아닐까?”
“너나 나나 서로가 잘 지내지 못하길 바라는 건 매한가지 아니야? 마음에도 없는 인사 하고 싶지 않다.”
장은호는 제 형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우리 둘 사이의 일과는 별개로 난 형이 잘 지냈으면 좋겠어. 진심으로.”
“둘이라···”
장은수는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렸다.
“셋이라고 해야겠지. 이제 그놈을 배제하기는 어려우니까 말이야. 도대체 한영수에게 뭘 약속한 거냐.”
“믿지 못하겠지만, 놀랍게도 녀석이 내게 바란 것 중에 자길 위한 것은 단 하나도 없어.”
그르렁거리듯, 장은수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
“태상의 총수 자리를 놓고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그래.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말처럼 믿지 못할 이야기군.”
“··· 왜 보자고 한 거야.”
“한영수, 무슨 짓을 하지 예상을 할 수 없는 놈이고. 너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니, 그게 진심이겠어? 그놈은 독이야. 먹을 때는 아주 감미로울지 모르지만, 반드시 누군가를 죽이고 마는.”
“그래서?”
“어차피 외부인일 뿐이야. 그 새끼는 태상의 주인이 될 자격이 없어.”
“자격이라··· 형에게 물어보고 싶네. 그 자격이라는 게 도대체 어떻게 생기는 건지.”
순간 장은수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 모습을 보고 장은호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형도 이제는 알 것 같지 않아? 정말 총수에 어울리는 사람이 누군지.”
‘그런데 정작 녀석은 그 자리에 아무런 관심도 없고 말이야. 형··· 그 애의 눈에는 우리가 어떻게 보일까? 우리의 싸움이 정말 의미가 있는 거야?’
장은호는 눈을 감고 차마 말하지 못 할 말을 속으로 되새김질했다.
“너 아주 단단히 홀렸구나. 그래. 한영수, 그 빌어먹을 놈에게···”
순간 장은수는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
온 세상이 한영수의 편을 드는데 오직 자신만이 그와 고독한 싸움을 하는 것 같은 기분.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패배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장은수는 세차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이제 와서 등을 보이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태상.
27살에 태상에 들어와 왕좌에 앉기까지 또 그만큼의 시간을 인고하며 기다린 장은수였다.
“본론만 말하마. 그룹을 둘로 나누자. 너와 내가.”
장은수 입에서 나온 소리라고 하기에는 충격적인 제안이었다.
장은호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어 장은수를 바라보았다.
“각자가 잘 할 수 있는 사업을 가져가는 거야. 대신 총수는 내가 한다.”
“형.”
장은호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깃들어 있었다.
“지금 형 말을 들으니까 생각이 나는 순간이 있네. 어렸을 때 말이야··· 어머니 돌아가시고. 엄마 보고 싶다고 방에서 울고 있는 나를 형이 찾아와서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나?”
“그때 이야기가 지금 왜 나와.”
“원래 승자는 외롭고 고독한 거라고. 그 대신 승자는 언젠가 모든 것을 혼자 다 가지게 된다고. 그러니까 울지 말라고 형이 그랬어.”
“...”
“형이야 날 달래겠다고 좋은 뜻으로 말한 거였겠지. 하지만 나는 그때 형이 무서웠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이미 잃었는데 뭘 가질 수가 있다는 건지···”
형제의 시선이 맞닿았다.
‘많이 쫓기고 있구나.’
태상이 장난감 블록도 아니고 뭘 어떻게 쪼개고 나눠 가진단 말인가.
장은호는 장은수의 눈이 탁해졌음을 느꼈다.
장은수는 더 이상 그가 말하던 승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한때 화려하게 폈었으나 계절을 잃고 바닥에 지저분하게 떨어져 있는 꽃잎을 보는 것 같아 장은호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에 비해 한영수는 이제 막 고치에서 깨어난 나비라고 비유할 수 있었다.
“형. 영수, 그 녀석이 이런 말을 자주 하더라. 열차는 이미 달리기 시작했다고. 이제는 형이나 나나 그저 승객에 불과해. 운전대는 한영수가 잡고 있다고. 열차가 멈췄을 때 거기에 어떤 풍경이 있을지는 그 녀석의 마음이겠지.”
사생아가 만든 놀라운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