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92화 (192/200)

192. 숨겨진 이야기

“자네가 가진 태상 건설의 지분이 5.6% 정도이지?”

태상의 설계자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서 수저가 내려간 지 오래였다.

“제가 가졌다기보다는··· 장학재단 앞으로 되어있는 지분입니다.”

“그래. 어떻게 보면 개인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하다고 할 수 있지. 장학재단이 소유한 주식은 공익 목적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매매할 수 있으니까. 누가 함부로 빼앗아 갈 수 없다는 의미야.”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사실이 우주의 별만큼이나 많다.

이 역시도 금시초문이었다.

복희 할머니···

당신께서 나에게 장학재단을 남겨주신 것도 어쩌면 이런 상황을 예지하셨던 것 아닐까?

- 장학회가 가지고 있는 지분은 꼭 쥐고 있어야 한다. 알겠니? 개호주야.

마치 할머니가 내 옆에서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 장학재단 말이야. 원래 누가 이사장이었는지 나도 알고 있네. 장영복 회장님과 그분의 인연도. 실상 그 재단의 태상 건설 주식은 장 회장님이 기부하신 것이야.”

“그게 언제의 일입니까.”

“글쎄··· 정확히 기억은 안 난다만, 확실한 건 자네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지.”

“우습네요.”

씁쓸하게 웃는 나를 신형복 사장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뭐가 우스운가?”

“마치···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판이 깔린 것 같지 않습니까.”

신형복 사장은 내 말에 대답이 없었다.

시계추처럼 고개를 좌우로 젖지도, 그렇다고 끄덕여 보인 것도 아니다.

그저 잠시 흐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어쩌면 그 역시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에 대해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신형복 사장은 밭은기침을 몇 번 토하고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5.6%. 숫자만 놓고 보면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지. 사실 어마어마한 양이야. 웬만한 태상 계열사가 가지고 있는 태상 건설의 지분과 맞먹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태상 건설의 최대 주주인 장은수 회장과의 격차가 더 뼈저리게 실감이 나는 것이구요.”

장은수 회장이 쥐고 있는 태상 건설의 지분은 16.3%.

내가 가진 전 재산을 털어도 따라잡기 어려운 포인트 차이였다.

“맞네. 단순하게 계산해서 태상 건설의 지분 10%를 얻어내려면 최소한 5조 정도의 돈이 필요하지. 물론 자네에게 그 돈이 있다고 한들···”

“장은수 회장은 물론이고, 건설사의 대주주들인 태상 계열사들이 자기들이 쥐고 있는 지분을 절대 내놓을 리가 없겠지요.”

“어디 그뿐인가. 기관이나 외국인들도 꿈쩍을 하지 않을 걸세.”

당연한 소리다.

에메랄드 시티 프로젝트의 유력 수주사인 태상 건설의 주식을 지금 팔겠다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 신형복 사장의 입에서 안 된다는 말을 듣기 위해 여기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다.

고작 나도 문답할 수 있는 사실이 조언의 전부라면 절대 신형복 사장이 태상의 설계자라는 별명이 붙을 수 없었겠지.

그런데 내 기대와는 달리 신형복 사장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자네, 태상의 초대 총수인 장훈희 회장님에 대해서는 좀 알고 있는가?”

“남들이 들어본 만큼은 알고, 모르는 것은 모릅니다.”

담백하고 정직한 말이었다.

대한민국 사람치고 장훈희 회장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작은 설탕공장을 건설회사로, 그리고 글로벌 기업을 만드는 데 기초를 닦은 사람.

비록 그 기업의 전성기는 아들 대에 와서야 꽃을 피웠지만, 장훈희 회장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대한민국의 신화에 크게 이바지를 했다는 것이 지배적인 세평이었다.

하지만 딱 그 정도.

누구나 세 치 혀로 떠들 수 있는 하마평을 한다고 그 사람을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래··· 장훈희 회장님께서는 실향민 출신이시지. 전쟁통에 어린 아들 손만 잡고 남쪽으로 내려오셨단 말이야.”

무슨 의도로 이 이야기를 꺼냈을까에 대해 의문을 품고, 나는 우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대께서는 이북에 두고 온 가족을 항상 그리워하셨지. 그렇다고 언제까지 홀몸으로 지낼 수는 없는 법. 결국에는 재혼하셨고, 거기서 아들을 하나 보셨어.”

“그 말은··· 장영복 회장님이 동생이 있으시다는 겁니까? 이복동생이?”

“아버지라는 말은··· 아무래도 입에 붙지 않겠지.”

생부를 회장님으로 지칭하는 나를 신형복 사장은 잠시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책망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비극의 제조자가 다름 아닌 당신이었으니.

“그래. 아무튼 지금 자네에게 이 이야기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네. 조금 긴 이야기가 되겠네만.”

신형복 사장의 말처럼 절대 짧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태상의 숨겨진 비밀에 대해 내가 이야기를 해주었다.

마치 어린 손주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할아버지처럼.

태상의 장씨 가문에는 오래된 비석이 바람과 비에 새겨진 글자가 희미해지는 것처럼 이름이 지워진 자가 있었다.

초대 총수의 둘째 아들이자 장영복 회장의 이복동생인 그의 이름은 장영민.

신형복 사장의 말로는 이름과 달리 일찌감치 젊은 시절부터 기업인으로서 두각을 드러낸 형에게는 한참 못 미치는 동생이었다고 한다.

평범한 사람이 천재의 벽 앞에 가로막히게 되면 무엇을 느끼게 되겠는가?

그것은 절망이다.

아무리 노력해봐도 늘 형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장영민은 결국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전형적인 재벌가 망나니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마약, 연예인과의 스캔들, 도박, 사치···

결혼이라도 하면 정신을 차릴까 싶어 초대 총수가 여자를 하나 붙여주었지만, 마음에도 없는 결혼 생활이 어찌 오래가랴.

채 5년도 가지 못하고 장영민은 막대한 위자료만 물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가문의 수치로 낙인이 찍혀있던 장영민이었지만 어쨌든 총수의 아들.

장훈희 회장은 장영민에게 태상 물산이라는 회사를 유언으로 남겨주었다.

근래에는 비록 직물업이 국내에서 쇠퇴하면서 사장단에 끼지도 못할 정도로 규모가 작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태상 물산은 계열사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규모였다고 한다.

새로 총수에 오른 장영복 회장은 이걸 계기로 동생이 정신을 차리기를 진심으로 바랐다고 한다.

그룹 차원에서 태상 물산에 대한 지지를 아끼지 않았고, 유능한 직원들의 보좌를 받을 수 있도록 사람들도 붙여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사고의 스케일을 키워가는 장영민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게 된 장영복 회장은 결국 그를 태상에서 지워버리기로 결심을 했다.

“그래서 그 작업을 했던 것이 나일세. 솔직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지. 그 당시에 장영민은 말 그대로 개망나니였고 주도면밀하게 자기 것을 빼앗기고 있는데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였으니까.”

“하지만 저는 장영민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오늘 처음 듣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태상 초대 총수의 아들인데···”

내 말에 신형복 사장의 눈이 번뜩였다.

“이보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재력과 힘을 가지게 되면, 사람 하나쯤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야.”

그의 말에 깨닫는 바가 있었기에 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나 역시 그런 작업을 당할 뻔하지 않았던가.

“여하튼 장영민이 가지고 있던 그룹 지분을 모두 회수하고, 이제 남은 것은 태상 물산뿐이었어. 그래도 장 회장님은 동기간의 정을 매정하게 끊지 못하셨던 걸까··· 선친이 유언으로 남겨준 태상 물산만을 두고 많이 고민하셨지.”

새삼스럽달까.

장은수 회장의 행보에 비교하면 놀라울 정도의 가족애였다.

“태상에서 이름은 파내고 싶으나, 아버지의 유언은 지키고 싶었다는 건가요?”

“그렇다네.”

“굉장한 딜레마군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도 모르게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어찌 보면 돈을 주고도 들을 수 없는 비화를 생생하게 청취하고 있는 것이니까.

“뽐내는 것은 아니네만, 제법 괜찮은 방법을 내가 떠올려냈네. 장영민에게 회사를 하나 차려 주었어. 물류 유통 회사를. 태상과는 어떤 접점도 없는. 그리고···”

신형복 사장은 그 시절을 더듬기라도 하듯 눈을 굴렸다.

“선진유통이라는 그 회사 앞으로 장영민이 가지고 있던 태상 물산의 지분 일부를 돌려버렸네.”

“··· 개인이 가지고 있던 지분을 법인 지분으로 바꿔버린 거군요.”

신형복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기막힌 방법이었다.

표면상으로 장영민의 이름을 태상에서 지우는 한편, 태상 물산에 대한 소유권도 일부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역시 장영복 회장의 꾀주머니라는 말이 허명이 아니었다.

“물론 추가 작업이 필요했어. 그 지저분한 일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네. 다분히 협박이 동원된 일이었으니까. 이후에도 언론에 적지 않은 돈을 썼어. 장영민은 그렇게 태상과 무관한 사람이 되었지.”

신형복 사장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 서두가 길었군. 아까 말했지? 자네는 태상을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그런데 태상의 숨겨진 뒷이야기를 이리 혀를 길게 빼 말한 이유가 있네.”

저 구석에서 식당 아주머니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새벽부터 나와 영업 준비를 했을 그녀에게는 나와 신형복 사장이 나누는 이야기가 잠깐의 단잠보다도 못한 것 같았다.

“태상 물산 말이야. 그 회사도 태상 건설에 지분이 있어. 정확히 딱 5%야.”

순간 내 머릿속에 번개가 번쩍였다.

“그 말은··· 만약, 제가 그 선진 유통이라는 회사를 인수하면···”

“그래. 이해가 빠르군. 선진 유통의 주인이 되면 태상 물산의 최대 주주가 되는 것이고, 거기에 태상 건설의 지분 5%에 대해서도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거야.”

빠르게 스파크가 튀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태상 건설에 내 지분은 10%가 넘어간다.

거기에 은호 형, 그리고 장은우 사장이 가지고 있는 가족 지분까지 더 한다면···

장은수를 넘어 최대 주주가 될 수도 있다!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그에 비해 신형복 사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선진 유통, 그 회사 가치라야 일, 이천억도 하지 않을 거야. 거기에다 장영민, 그 양반··· 지금 건강 상태가 위중해. 가족도 없이 외롭게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말이야. 참 태어났을 때 물었던 수저에 비하면 비참하기 그지없는 말년이지.”

신형복 사장의 말에는 많은 속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5조 이상의 엄청난 자금을 쏟아부어야 얻을 수 있는 지분을 몇천억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노쇠한 장영민을 너, 한영수가 능히 설득할 수 있을 거라는 것.

눈앞에 또 하나의 문이 열리는 장면이 선연하게 그려졌다.

“이보게.”

신형복 사장은 나지막하게 나를 불렀다.

“나도, 회장님도 비난받아 마땅한 짓을 했어. 그 죄를 어찌 말 몇 마디로 씻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말일세··· 언젠가, 아주 먼 훗날이 될지라도 자네가 마음이 편안해지면, 그때는 장영복 회장님 앞에 술이라도 한잔 올릴 수 있겠는가? 아까 자네가 말한 것처럼 이제 와 미움을 늘린다고 해서 어찌 삶이 나아지겠는가. 하지만 용서는 다른 이야기야. 자네는 이제 강자야. 용서는 강자가 베풀 수 있는 자비일세···”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버림받은 자와 내쫓긴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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