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90화 (190/200)

190. 신형복 사장 (1)

“태상의 미래인 여러분을 위해 시간을 내어 귀한 말씀을 해주신 사장님께 힘찬 박수 부탁드립니다.”

태상의 교육기관인 아카데메이아의 중앙 강당.

오늘부터 이곳에서는 금년도 태상 그룹 신입 사원들의 연수가 있었다.

지금은 그 신입 사원들을 상대로 이곳의 장(長)인 신형복의 환영 인사가 막 끝난 참.

진행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당 안은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형복 사장은 슬쩍 한쪽 손을 들어 신입사원들에게 화답했다.

그의 눈에 이 강당을 가득 채운 젊은이들은 하나 같이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대한민국, 아니 이제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반열에 든 태상에 당당히 입사한 그들이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싱싱함을 뽐내는 이들.

신형복 사장은 자신이 저 애송이들에게 질투심을 느낀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감히 스스로 평가하건대, 한 명의 기업인으로서 이룰 수 있는 것은 모두 이뤘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런 업적조차도 저들의 젊음 앞에서는 무의미한 것이 아닐까, 하는 회의감마저 드는 것이었다.

설령 저들의 젊음이 실수와 어리석음의 반복으로 가득 채워져 있을지라도.

‘이것도 다 나이를 먹어서 주책이나 부리는 거지. 이젠 정말 물러날 때가 되긴 했나 보군.’

그렇게 신형복 사장이 느린 발걸음을 옮겨 단상을 떠나려고 할 때였다.

“사장님! 질문 있습니다!”

낭랑한 목소리가 신형복 사장의 발목을 잡았다.

신형복 사장이 고개를 돌려보니, 가장 앞줄에 있는 한 젊은 여사원 하나가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아··· 사장님께서는 다음 일정이 있으십니다. 연수를 진행하시면서 사장님과 또 소통할 기회가 있을 테니까요, 질문은 그때···”

“아니야. 그냥 두시게. 씩씩한 사원이구먼.”

신형복 사장에게 다음 일정 따위는 없었다.

물론 신형복 사장도 알고 있었다.

지금 진행자가 자신을 일분일초라도 빨리 쉴 수 있게 배려를 해주고 있다는 걸.

‘그래도 그렇게 대놓고 노인 취급을 받는 것은 사절이야. 이 사람아.’

“그래. 질문이 뭔가요?”

선 자리에서 그대로 용기 있는 여사원을 향해 신형복 사장이 물었다.

진행자는 얼른 마이크를 들고 뛰어와, 그 물건을 신 사장의 손에 쥐여주었다.

“사장님께서는 전설적인 경영자인 장영복 회장님을 오랜 시간 가까이서 지켜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설적인 경영자라···’

신형복 사장은 자신의 보스였던 장영복 회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경영의 신’이라고 찬사를 받던 장영복 회장이, 최근 일련의 사건으로 ‘인간’으로 격하되었다는 건 세상 사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장 회장의 측근으로 살아왔던 신형복으로서는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형복 사장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열정적인 사원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사장님께서 생각하시기에 리더가 갖춰야 할 조건이 뭐가 있습니까?”

“리더의 소양이라··· 우리 사원, 이름이 어떻게 되지요?”

“조혜민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리더라면 조혜민 사원처럼 당돌함이 있어야겠지요.”

사원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신형복 사장도 잠시 빙그레 웃다가, 조혜민 사원을 향해 고개를 몇 번 끄덕여 보이곤 말을 이어나갔다.

“자제력, 겸손함, 지성, 설득력, 강한 의지··· 리더를 설명할 수 있는 덕목을 말하자면 아마 밤을 새워도 끝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나에게는 그리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걸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신형복 사장의 자학적인 유머에 사원들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질문에는 성의 있는 답변을 해주는 것이 마땅하겠지요. 내가 생각하는 리더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신 사장의 얼굴이 한껏 진지해졌다.

천장의 조명은 그의 얼굴에 주름의 음영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두려움입니다. 리더라면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아···

누군가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내 말이 뭔가 나쁜 이미지를 연상 시킵니까? 그럼 경외심이라고 바꿔 말하겠습니다. 내 생각에는 두 단어 사이에 차이가 크지 않다고 봅니다만··· 훌륭한 비전, 백 마디의 멋진 말보다 아우라 하나만으로 사람들이 알아서 따르게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리더의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태상의 젊은이들도 자신 안에서 거인을 찾아내세요. 반드시 만만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두려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처음과 달리 이번에 사원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자진해서 손뼉을 쳤다.

‘물론 그게 절대 배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네만···’

진심을 딱 반절만 풀어놓고 신형복 사장은 강당에서 퇴장했다.

수행을 받아 사장실로 자리를 옮기며 신 사장은 또 한 번 장영복 회장에 대해 생각을 했다.

장영복 회장이야말로 두려움의 화신과 다름이 없었다.

그가 독재자처럼 자기 부하들을 압제했다거나 그런 뜻이 아니었다.

하늘이 부여해준 것 같은 카리스마!

장 회장에게는 그것이 있었다.

그리고···

신형복 사장이 보기에 아쉽게도 현재 태상을 이끌고 있는 장영복 회장의 두 아들에게서는 아버지의 그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사장실로 들어온 신형복 사장은 넥타이를 풀어 책상에 올려놓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웅━ 웅━

그때 때마침 신형복 사장의 휴대전화가 진동을 울렸다.

“허어···”

액정을 통해 전화의 상대방을 확인한 신형복 사장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온 이는 다름 아닌 장은호 회장이었다.

“사장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전화를 받자 장은호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 회장, 자네··· 나야, 뭐 오늘이 어제 같고 매양 그렇지.”

신형복 사장은 스스럼없이 장은호 회장에게 말을 편하게 했다.

하기야 장은호 회장을 코흘리개 때부터 봐온 그이니, 그룹 내에서 위치가 다르다고 존대를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이 노인네의 안부가 궁금해서 전화를 한 것 같지는 않고··· 역시나 또 그 일 때문이지?”

“예. 100%는 아니지만요.”

“내가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나는 형제간의 집안싸움에 끼어들 생각이 없다고. 공연히 나를 떠볼 필요 없어. 다시 한번 말하네만, 나는 기권 할 거니까.”

솔직히 신형복 사장은 장은수, 은호 형제 누가 총수가 되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둘을 놓고 비교하자면 각자 장단점이 분명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태상의 시스템은 이미 완성이 되어있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세 살짜리 아이를 총수 자리에 앉혀놓는다고 해도 태상이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장님의 뜻이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꼭 한번 얼굴 좀 뵈었으면 합니다.”

“이 사람아··· 시간을 소중하게 써야지. 나처럼 영양가 없는 노인네를 만날 시간에 사장단의 다른 누군가를 찾아가 보라고.”

“사장님과 저 둘이 뵙자는 게 아닙니다. 사장님이 한번 만나주셨으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만나? 그게 누군데?”

“사장님도 분명히 들어본 이름이실 겁니다. 한영수라고.”

끄응━

한영수의 이름을 듣자 신형복 사장의 입에서는 신음이 흘러나오고, 동시에 그의 흰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유난한 반응의 이유는 대관절 무엇 때문일까?

두 호흡, 아니 세 호흡 정도가 지나도 신형복 사장은 대답이 없었다.

“··· 사장님?”

장은호 회장의 재촉을 받고서야 간신히 신 사장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이보게, 장 회장.”

“예. 사장님. 듣고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내가 그러면 안 되겠는가? 한영수 그이를 만나야 한다면 단둘이서만 만나고 싶네만.”

이번에는 장은호 회장 쪽에서 말이 없었다.

“··· 틀림없이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알겠습니다.”

“고맙네. 자네는 예나 지금이나 속이 참 깊지.”

“별말씀을요. 한영수 쪽에는 제가 말을 전하겠습니다.”

장은호 회장과 전화를 끊고 신형복 사장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그의 입에서 뜻 모를 말이 흘러나왔다.

* * *

이곳은 서울 종로의 낙원상가 인근.

여기 골목 어귀에 있는 국밥집에서 나는 신형복 사장을 만나기로 했다.

국밥집이라니···

뜻밖의 장소가 선정된 것도, 나를 단둘이서만 보겠다고 한 이유도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 어서 와요.”

주인아주머니는 국밥을 토렴하며 내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고 인사를 했다.

손님이라고는 오직 한 테이블뿐이었다.

오후 세 시.

늦은 점심도 이른 저녁도 모두 어중간한 시간이었기에 당연히 그럴 수 있으리라.

아니, 어쩌면 나를 여기에 초대한 이가 지금 시간만큼은 가게를 통째로 빌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이 집의 유일한 손님.

백발이 성성한 신사가 막 가게 안으로 들어선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영수라고 합니다.”

나는 신형복 사장 앞으로 가서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 앉지.”

그가 권하는 대로 나는 자리에 앉았다.

그 나이대 여느 어르신과 별다를 게 없어 보이는 신형복 사장이었다.

이 사람이 한 때 장영복 회장의 꾀주머니로 불렸었다고···

물론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도 없기에 나는 자세를 바르게 했다.

“국밥 좋아하는가? 요즘 젊은 사람들도 이런 걸 먹는지 모르겠군.”

“없어서 못 먹습니다.”

때마침 주인아주머니가 국밥 두 그릇을 내왔다.

반찬이라고는 단무지가 전부인 소박한 밥상이었다.

“자네 말이야. 눈이 참 좋군. 눈에 힘이 있어.”

“말씀 감사합니다.”

“그래··· 일단 들지.”

“예. 식사하시지요.”

나와 신형복 사장은 묵묵히 밥숟갈을 떴다.

뜨끈한 국물이 금세 내 속을 데워주었다.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이 어디서나 흔하게 맛볼 수 있는 국밥의 맛이었다.

이러니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대단한 맛집도 아닌 하필 여기서 날 만나자고 한 이유가 무엇일지.

이에 대한 대답은 서너 번 더 국물을 떴을 때 신형복 사장의 입으로 들을 수 있었다.

“여기는 내가 장영복 회장님과 종종 오던 곳이네. 종로를 나오게 되면 꼭 들리곤 하셨지.”

“의외군요. 장영복 회장님께선 입맛이 생각보다 소박하셨던 모양입니다.”

“아니. 그보다는 합리적인 이유에 가까웠지. 이쪽은 일 때문에 나오는 일이 많았었거든. 국밥만큼 빨리 나오고 후루룩 먹고 치우기 편한 게 없다는 게 그분의 말씀이셨네.”

장영복 회장.

신형복 사장에게는 추억의 인물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복잡한 감정을 일으키는 사람이다.

첫 대화의 화제가 다름 아닌 장영복 회장으로 시작했기에 우리의 대화는 금세 맥없이 끊어져 버렸다.

“자네··· 자네의 아버지를 많이 원망하는가?”

얼마간의 불편한 침묵 끝에 신형복 사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나는 가만히 입을 닫고 있었다.

신형복 사장도 딱히 나의 대답을 기대했다는 것은 아니라는 듯, 혼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뒤 그의 입에서 전혀 뜻밖의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일세. 참으로 많이 컸구만···”

신형복 사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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