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적(敵)과 나
“계열분리라···”
“제가 너무 건방진 공수표를 던졌나요? 미리 형님에게 상의 못 한 것은 미안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즉흥적으로 떠오른 거라. 그 정도 판돈은 걸어야 장은우 사장님을 확실히 이쪽으로 넘어오게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아니야. 널 탓하는 게 아니다. 그럴 리가 있겠니. 사실 많이 놀랐다. 네가 그 짧은 순간에 누나의 속내를 간파해냈다는 것도.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도 못 할 제안을 했다는 것도.”
은호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곱씹을수록 내 말이 그럴 듯했는지 그의 얼굴에는 감탄하는 빛이 떠올랐다.
“어쨌든 제가 할 일은 딱 거기까지예요. 약속을 지키는 건 형님께서 하실 일이에요.”
“계열사 분리가 단순한 문제는 아니지. 지분 정리 문제도 있고, 주주들과 임원들도 설득해야 할 것이고···”
은호 형은 벌써 골치가 아프다는 듯 손으로 이마를 매만졌다.
“하지만, 사실 그룹 내에서도 태상 백화점은 이질적인 사업이야. 애초에 우리 손에서 시작된 사업도 아니고.”
“저도 알고 있어요. 한강 백화점을 태상 그룹이 인수한 거잖아요.”
“맞아. 그때 나는 미국에 있을 때인데, 내가 알기로 누나가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큰 목소리를 냈던 걸로 알고 있어. 한강 백화점을 꼭 인수해야 한다고. 뭐··· 아버지가 누나 말만 듣고 인수를 결정하진 않았겠지만.”
“명품 열풍이라는 시기를 잘 타기는 했지만, 장은수 사장님이 백화점 사업을 훌륭하게 끌고 왔으니 계열사를 나누는데 명분은 확실히 주장할 수 있겠군요.”
“그래··· 사실 모든 일에 돈은 두 번째 문제야. 제일 중요한 건 사람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할 수 있는 명분이지. 그런 점에서 백화점의 계열사 분리, 분명히 안될 일은 아닌 것 같다.”
말을 마친 은호 형은 새삼 다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넌 참 대단한 녀석이야. 네가 물건인 줄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아봤지. 어려운 일도 이렇게 쉽게 해내니···”
“이제 겨우 한 표인데요.” “엄청난 의미를 가진 한 표지. 너만 바쁘게 움직이게 만드는 것 같아 면목이 없다.”
은호 형이 붉어진 얼굴로 무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 은호는 너무 물러. 그 정도가 딱 녀석의 그릇인 거지.
문득 저번 만남에서 장은수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기 친동생을 향한 그의 하마평이 아주 틀렸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은호 형은 분명 인간미가 있고 정직한 남자이다.
어쩌면 그 성품이 진흙탕 싸움에서는 장은수의 말처럼 약점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가 증명하지 않는가.
왕의 자격이 음모와 모략에 능한 것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걸.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는 사람에게는 그런 잔재주보다는 타인을 품을 수 있는 도량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라면 틀림없이 태상의 직원 한 명, 한 명을 가족처럼 소중하게 대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은호 형은 충분히 태상의 총수가 될 자격이 있다.
은호 형이 총수가 될 때까지 모자란 것은 내가 옆에서 채워주면 그만이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원해서 하는 것입니다. 형님은 태상 자동차 그룹 단속만 잘해주세요. 거기가 형님의 지지기반이니까요. 그쪽에서 이탈이 나오면 뼈아픈 손실입니다.”
“알겠다. 그런데 물어보고 싶다. 은수 형의 제안, 사실 너에게는 나쁠 것이 하나도 없는 이야기 아니니? 나와 의리를 계속 지켜주는 건 고맙다만.”
“사실 놀라긴 했어요. 장은수 회장 쪽에서 그렇게 나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 했거든요.”
“형 생각에는 나도 일정 부분 동의해. 영수, 네가 만약 언젠가 총수가 된다면···”
“형님, 형님까지도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형님은 기분 나쁘지 않으세요? 장은수 회장이 형님이 아닌 나를 찾아왔다는 게.”
물론 참모와 돌격대장 역할까지 동분서주하고 있는 건 내가 맞지만, 어쨌든 장은수 회장과 패권을 놓고 경쟁을 하는 것은 은호 형이다.
협상을 하려면 마땅히 내가 아니라 은호 형을 먼저 찾았어야 한다.
요즘 말을 빌려 쓰자면 은호 형은 ‘패싱’을 당해버린 셈.
덩치가 곰 같다고 해서 그 내면까지 둔할 리가 없다.
오히려 은호 형은 태상의 그 누구보다도 나를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이다.
틀림없이 장은수의 행보에 어느 정도 자존심을 다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친형제 간에도 동생에게 뒤처진다는 생각이 들면 형은 기분이 나쁘기 마련이다.
심지어 은호 형은 장영복 회장의 적자요, 나는 사생아 아닌가.
혹시나 이것이 나와 은호 형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장은수 회장의 속셈이 있나 싶기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은호 형의 대인배적인 기질은 어디 가지 않았다.
그깟 것쯤 별일 아니라는 듯 그는 두 손을 내저었다.
“지금 사사로운 감정이 중요한 때가 아니잖니. 난 네가 은수 형에게 넘어가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한다. 그나저나 걱정이다. 더 이상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은수 형은 너에게 더 깊은 적대심을 품었을 테니.”
적. 적이라···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서 장은수처럼 강한 적을 만났던 적이 있던가?
그처럼 수많은 사람에게 아주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와 적대해본 적이 있었던가?
굳이 자문해볼 필요도 없다.
당연히 그런 경험이 있었을 리 없으니까.
승우가 의식을 회복하면서 마음의 부담감을 다소 내려놓을 수 있게 된 지금 내 현재 상황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나와 태상, 그리고 나와 장은수.
예전의 나에게는 모든 것을 걸고 부딪쳐보고 싶은 상대가 없었다.
나는 작은 것에만 화를 냈었다.
아무리 아끼고 절박하게 살아도 나아지지 않는 살림살이에 속상해했고, 오르지 않는 월급을 개탄했었다.
인간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별 볼 일 없는 직장 상사에게 스트레스를 받고 분노했었다.
물론 삶에서 그런 것들이 아무 의미 없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내 에너지들은 큰 쓸모없는 것들에게 낭비됐다.
그런데 이제 나는 비로소 투쟁하고 싶은 상대를 만났다.
어찌 보면 장은수가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것이니 그 점은 그에게 감사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라.
나는 이 복잡한 상념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해야 할지 몰라 그냥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때, 은호 형이 내 어깨에 두꺼운 손을 얹었다.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듯한 체온이 나의 몸에 퍼져나갔다.
“영수야. 너를 절실하게 원했던 건 나지만, 막상 일이 이렇게 되니 널 내가 이용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그래도 이것만은 꼭 알아줬으면 한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되든, 나는 끝까지 널 지켜주마.”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정말 든든하네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요. 하지만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되든, 이라는 전제는 마음에 들지 않아요. 형님은 태상의 총수가 될 겁니다. 그 정도 되는 사람이 절 지켜준다고 해야 저도 마음을 좀 놓죠.”
하하하━
은호 형이 크게 웃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그의 호탕한 웃음이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출사표를 던진 이후부터 은호 형은 특유의 웃음소리를 잃었다.
그것은 그 역시 마음고생을 하고 있다는 방증이리라.
“그래. 나의 제갈공명 한영수의 다음 계획은 뭐지?”
“형님께 표를 던진 사람을 찾아야지요.”
“너답다. 시원시원하면서 쉽게 말하는 모습이. 하지만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건 알고 있지? 사장단 한 명, 한 명을 만나서 회유하기는 쉽지 않을 거야.”
“네. 확실히··· 이번에 태상 금융 때도 느꼈지만 돈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에요. 태상이라는 벽은 정말 높고 견고하더군요.”
장은수의 온 힘을 기울인 수성(戍城)으로 아직 우리는 태상 금융에서 3대 주주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몸뚱이가 가벼운 태상 금융이 이 정도인데, 총수 선출까지 남은 시간을 생각하면 속된 말로 다른 계열사들을 단순히 물량만으로 쇼부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태상이 그냥 대한민국 최고의 그룹이 된 게 아니야. 오랜 세월 동안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만들어놓은 이중, 삼중의 보호장치들이 태상을 지키고 있지···”
“그러게요. 일부러 강남의 큰 손 회장님에게 거액을 빌렸는데 그게 다 허사가 될까 봐 염려되긴 합니다. 하지만···”
나는 확신에 가득 찬 눈으로 은호 형을 바라보았다.
“우리 쪽에서 회유하려고 찾아갈 것이 아니라, 그쪽에서 우리를 찾도록 해야지요. 일단 태상 금융의 지분을 상당히 확보했으니, 주주로서 권리를 행사해야지요. 회계 장부부터 뒤질 생각이에요. 계열사와 태상 금융의 금전 거래 내역 위주로.”
“하지만 BH 인베스트먼트 쪽에서 지분 싸움을 건 그 순간부터 태상 금융 내부에서 이미 장부 정리에 들어갔을 텐데?”
“뭐가 나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분명 액션만으로도 겁을 먹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이래 봬도 저··· 윤 회장을 꺾은 뒤로 여의도에서 뭐 그런 쪽으로 소문이 났다면서요. 조만간 감사팀 구성이 마무리될 겁니다.”
“감사팀이라··· 외부에서 사람을 살 생각이냐?”
“네. BH 인베스트먼트 인편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작업일 테니까요.”
“그렇구나. 혹시··· 우리 쪽에서 사람을 보내주면 안 되겠니? 태상 자동차에도 유능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아니요. 그러면 안 됩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은호 형이 어떤 의도로 내게 제안을 하는 것인지는 알고 있었다.
미우나 고우나 이 건은 전적으로 태상 내부의 문제.
은호 형 입장에서는 외부 사람들이 태상을 들쑤시는 것이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하지만 같은 이유 때문에라도 은호 형은 이 일에 껴서는 안 된다.
“지저분한 싸움일 뿐이에요. 형님은 지금 진흙밭을 밟으면 안 됩니다. 이건 전적으로 제 선에서 행해지는 일이여야 합니다.”
은호 형이 입을 꾹 다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후한 일당을 챙겨주는 대신 비밀 유지각서는 빠짐없이 받을 생각이니까요. 혹시라도 감사팀이 어떤 부정(不正)의 증거를 발견한다고 해도 밖으로 새 나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오직 형님과 저만이 그 증거를 어떻게 쓸지 결정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사실 장은수 쪽 사람 중에서 전향자가 나올 거라고 확신하는 데는 이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나의 말속에는 주저함이 다소 섞여 있었는데, 그것은 이 이유가 오로지 감정상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장은수 회장은 지금 조급해하고 있습니다. 절 찾아와 회유하려고 했던 것이 그 증거지요. 아무리 장은수 회장이 스스로를 통제한다고 해도 주변 사람들에게 그 조급함을 온전히 숨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음···”
은호 형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럴 수 있겠어. 더욱이 옆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던 황 실장이 없어졌으니, 챙겨야 할 것들이 더 늘어났겠지. 그런만큼 마음은 더 급하고 말이야.”
“예. 그러니 이런 때일수록 형님은 사람들 앞에서 더욱 의연한 태도를 보이셔야 합니다.”
··· 그게 형님이 해주셔야 할 역할이니까요.
나는 불필요한 뒷말은 입 대신에 가슴 속에만 담아두었다.
이제 총수 선출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반년뿐이었다.
설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