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87화 (187/200)

187. 아치 에너미

아치 에너미.

우리말로 철천지원수라는 말로 표현이 가능할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 선한 역이 있으면 악역도 있기 마련이다.

아치 에너미는 특히나 주인공과 대등, 혹은 그 이상의 존재로 단순히 힘뿐만 아니라 사상까지도 대립의 구조를 형성한다.

그 갈등이 극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것이다.

이 아치 에너미라는 말은 미국 그래픽노블에서 기원을 했다고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만화 속 세상과 현실이 어디 같을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간단히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는다.

선인이라고 해서 완전히 선하지 않으며, 악인이라고 온전히 악의 결정체만으로 똘똘 뭉친 것도 아니다.

선인과 악인이 무조건 대립한다는 법도 없으며, 오히려 그 둘이 짬짜미로 결탁을 할 수도 있다.

인간이라는 것은 얼마나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가?

더욱이 그런 인간들이 모이면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거미줄처럼 얽히게 되고, 선과 악의 경계는 희미해져 때로는 그까짓 것이 뭐가 중요하냐 싶기도 하다.

그래도 장은수를 바라보는 내 시선과 감정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저 아치 에너미라는 개념을 빌려 써야 할 것 같다.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기에 장은수를 도덕적으로 비난하고 싶지 않다.

장은수에게도 당연히 사연 몇 개쯤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도 누군가 한 명쯤에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은수의 이름을 떠올리면 늘 어떤 불길함이 뒤에 따라붙었다.

지금도 날 보는 장은수의 눈에서 위험함을 느낀다.

내 몸이 어떤 위험신호를 보내는 것만 같다.

저자와는 결코 한 길을 걸어갈 수 없다고.

“옛말이 틀린 것이 없군요.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다던데··· 우리가 딱 그렇지 않습니까? 관계를 이야기하기에는 저에게 너무 많은 짓을 하셨습니다.”

“많은 오해가 있었을 뿐이지. 이봐, 한영수. 그거 알고 있나? 너랑 나는 닮은 구석이 있어.”

술잔을 들며 장은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마치 1과 1을 더하면 2가 된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 그거 새로운 종류의 도발입니까?”

그의 말이 어이가 없었다.

“원래 닮은 사람들끼리는 말이야··· 친해질 수가 없는 법이야. 일종의 동족 혐오의 심리가 작용하는 것이지.”

장은수는 들었던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곧이어 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꿈틀거렸다.

“은호 말이야. 틀림없이 너와 은호는 금세 의기투합했을 거야. 알게 된 지 일 년도 채 안 된 것들이, 평생을 알고 지낸 사이처럼 말이지.”

독한 술기운이 휘발되어 날아가기를 잠시 기다린 장은수는 은호 형의 이야기를 꺼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대단했을 네놈은 은호를 만나고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이런 것이 바로 혈육의 정이구나.’라고 말이야.”

“도대체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겁니까.”

“··· 어떻게, 한 잔 더?”

장은수의 입에서 질문이 나왔으되, 그 질문은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내가 아무 말이 없었음에도 양주병을 들어, 내 앞의 잔에 술을 채웠다.

“밤은 길어. 조급해하지 마라.”

이제부터가 본격적이라는 듯 장은수가 양팔의 소매를 걷어붙였다.

옷 아래로 드러난 그의 아래팔에 시퍼런 핏줄들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이에 비해 살집이 없는 그다.

하지만 잘 관리된 육체조차 그의 치밀함과 성마른 성질을 보여주는 것 같아 나는 눈을 돌려 버렸다.

“그래. 분명히 은호는 사람 냄새가 나는 놈이야. 아주 다정하고, 모범적인 가장이기도 하고.”

장은호는 가늘게 찢어진 눈으로 염탐하듯 나를 힐끗대며 계속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너무 물러. 그 정도가 딱 그놈의 그릇인 거지. 그래서는 세상을 가질 수가 없어. 우리와는 명백히 다른 인간이라 이 말이야.”

“자리에 없는 사람 험담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은호 형과 나는 다르기에 한배를 탄 것이고, 우리는 동류이기 때문에 친해질 수 없다는 겁니까?”

“왜 그런 말도 있잖아. 도플갱어를 만난다면 반드시 죽고 만다는.”

“말도 안 되는 궤변이란 걸 알고 계실 텐데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 사실 은호 정도면 네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 한 편이 된 것 아니냐고.”

허━

탄식이 절로 나왔다.

장은수에게서 ‘우리’라고 불린 것 자체가 불쾌할 지경이었다.

“회장님이 사람을 어떤 눈으로 보는지 잘 들었습니다. 덕분에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당신과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저는 사람을 그렇게 물건처럼 대하지 않습니다.”

“착한 척 하는군. 네가 지금까지 한 일들을 생각해봐.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나? 그래, 좋다. 양심이라는 불필요한 감정이 네 얼굴에 가면을 씌울 수는 있겠지. 하지만 네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어. 너나 나나 아비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자식이라는 것.”

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비, 그리고 자식이라니···

이것만큼은 장은수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 상상도 못 했던 단어들이었다.

은호 형에 이어 장은우 사장.

그리고 이제는 장은수까지.

비로소 장영복 회장의 적자들이 나를 인정한 셈이 되는가.

“··· 하하하하.”

나는 실소를 하며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은호는 도망치듯 미국에서 살았으니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그놈이 자유를 즐기는 동안 나는 이곳에서 언제나 시험에 시달려야만 했다. 아버지로부터 따듯한 시선 한 번 받아본 적 없었지.”

나는 아무 말 없이 장은수의 말을 듣기만 했다.

“자식이 아니라 태상의 후계자라는 걸 증명해야 하는 삶이었어. 그래, 조금 비약하자면 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 역시 너와 처지가 별반 다를 게 없었다는 소리야.”

웃기지 마.

당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보육원 언덕 위에서 애타게 부모를 기다리던 그 어린아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나는 당장이라도 토해내고 싶은 말을 가슴 속에 꾹 눌렀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정말 그 사람이 되어보지 않고서 그 사연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요.”

나는 에둘러 장은수 회장의 말을 밀어냈다.

“아까 밤이 길다고 하셨죠? 하지만 의미 없이 긴 밤은 불편하기만 할 뿐입니다. 본론만 하시죠.”

“거울을 봐. 이렇게 냉정하게 말하는 네가 나와 은호 중 누구를 더 닮았을지··· 좋다. 너에게 제안을 하려고 한다. 그룹 본사에 미래본부장이라는 자리가 있다.”

알고 있다.

장영복 회장의 처남이자 장 씨 형제들의 외삼촌이 지금 자리를 잡고 있는.

총수에 이어 부회장급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태상 그룹 내에서는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위치.

“내가 총수가 되면 그 자리··· 너에게 주겠다.”

“고려의 가치가 없군요. 제가 왜 그래야 할까요? 저도 엄연히 한 회사의 오너입니다. 그런 제가 회장님 밑에서 월급쟁이 노릇을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 고왕? 월급쟁이? 지금 농담하는 거겠지?”

장은수가 제 턱을 손으로 쓸었다.

그 턱 위에 달린 입은 한쪽 꼬리만 비스듬하게 올라가 있었다.

“고왕 그룹. 지금이 딱 정리하기 좋은 시기 아니야? 다 털고 나와도 엄청난 이익을 보겠군. 너도 알고 있잖아. 네 야심을 담기에 고왕은 너무 작다는 걸. 우리가 나이 차이가 15살 정도지?”

“...”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는 슬하에 자식이 없어. 설령 내가 지금 당장 자식을 얻는다고 해도 성인이 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본부장 자리에서 경험을 쌓아. 그 후에···”

마치 무대 위의 배우가 가장 극적인 대사를 준비하는 것처럼 장은수는 호흡을 아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엄청난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나 다음으로 태상의 주인이 되는 것은 바로 네가 될 테니까.”

··· 뭐?

이렇게 나온다고?

조금 전 부모, 자식을 떠드는 것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나를 회유하겠다고 이렇게도 혀를 길게 빼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껏해야 나를 돈으로 흔들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설마하니 총수 자리를 걸고넘어질 거라고는 나조차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조건이 있다. 네가 이사장으로 있는 장학회에 태상 건설의 지분이 5% 정도 있더군. 적은 양이 아니지. 그걸 나에게 넘겼으면 해. 물론 그냥 달라는 건 아니다. 태상 건설의 지분이라면 태상 금융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안 되지. 네가 데리고 있는 검은 머리 외국인이 두 배라는 숫자를 좋아하더군. 딱 지금 가격의 두 배만큼 쳐주마.”

“내가 당신 옆에 서기만 하면 그 모든 걸 해주겠다는 겁니까?”

“그래. 굳이 나와 친해질 필요는 없어. 하지만 너랑 내가 손을 잡으면··· 태상, 아니 이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뀔 거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보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던 분이 태세 전환이 너무 급하시군요. 머리가 어질어질합니다.”

“네가 장 씨가 맞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실력도 보통 놈이 아니라는 것도.”

내가 장 씨가 맞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파격적이라고 해도 좋은 제안에 잠시 아득해졌던 머리가 깨끗해졌다.

나는 한영수다.

누구도 제 맘대로 내 역사를 찢어 붙일 수는 없다.

“··· 거짓말.”

나의 짧은 말에 장은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날 인정해달라고 한 적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진심으로 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고. 나는 지금 내 이름이 좋습니다. 내 이름으로 살아온 세월을 당신에게 팔아넘길 생각 조금도 없어요.”

“어리군. 감정에 취해 큰 그림을 못 보는 건가?”

아니, 장님처럼 아무것도 못 보고 있는 건 장은수 당신이야.

내가 준비한 것들을 절반도 모르고 있지.

지금도 당신 발밑이 위태롭다는 걸 하나도 모르고 있잖아.

“··· 내게 질까 봐 겁이 나는 겁니까? 그래서 이러는 겁니까?”

순간 장은수의 볼이 씰룩거렸다.

그의 안광이 은은한 조명 아래서 시퍼런 빛을 뿜어냈다.

“애쓰셨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연기를 하시느라. 장은수 회장님. 우리가 서로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다면 그건 우리가 닮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혀 다르죠. 당신과 나, 우리는 정반대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해가 가능한 거예요.”

만약 우리가 옷을 입고 있는 문명인이 아니라 야생의 짐승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 온몸의 털이 빳빳하게 섰으리라.

거친 숨을 내쉬는 장은수에게서 깊은 분노가 느껴졌다.

감히 너 따위가 네가 베푸는 아량을 거절해?

그의 부릅뜬 눈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 그게 당신 모습이 맞지.

“태상 금융에 쏟아부은 돈, 전부 제 개인 돈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태상 건설을 내세우고 그 뒤에 숨어버리시더군요. 전 이 승부에 모든 것을 걸고 있습니다. 회장님도 그러셔야 할 겁니다. 열차가 이제 멈출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도 나도, 이제는 철로 끝에 뭐가 있는지 그저 지켜볼 수밖에.”

나는 앉은 자리에서 옷을 털고 일어났다.

“덕분에 세상에 이런 술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도 전 아직은 소주가 입에 맞는 거 같네요. 제가 마신 건 계산하고 가겠습니다.”

적(敵)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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