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86화 (186/200)

186. 기다리던 소식

“··· 승우야!”

은주의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병원으로 달려왔다.

- 영수 오빠··· 오빠가 깨어났어요!

잔뜩 물기를 먹은 목소리로 은주가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 두 시간 전의 일이었다.

세상 어느 소식도 이보다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 즉시 하던 일을 모두 미루고 바로 차에 시동을 걸었다.

“다행이야, 다행이야···”

어떻게 운전해서 병원까지 왔는지 기억이 하나도 없다.

핸들을 잡는 내내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지고, 미친 것처럼 다행이라는 말을 계속 되뇌었다.

숨을 헐떡이며 병실 문을 열었다.

“영수 오빠.”

그 안에서 나를 맞이한 것은 빨간 토끼 눈이 되어있는 은주였다.

하지만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을 보자 정말 승우가 깨어났다는 것이 실감이 되었다.

도대체 얼마 만에 은주의 미소를 보는 것인지.

승우가 병실에 누운 뒤로 은주는 살이 너무 많이 빠져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밝고 씩씩한 은주가 그토록 그늘이 질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 그래. 이제 승우가 깨어났으니까 되었어.

은주에게 인사를 하는 듯, 마는 듯 승우가 누워 있는 베드 옆에 무릎을 꿇었다.

“··· 은주야. 승우 의식 회복했다며.”

승우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이십 분 전쯤에 잠들었어요. 의사 선생님 말씀이 당분간은 계속 이럴 거래.”

은주가 자기 입에 손가락을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정신 차린 거 맞지? 이제 괜찮은 거지?”

은주의 제스처에 따라 나도 목소리를 낮추고 몇 번이나 되물었다.

“··· 응, 응”

은주는 아주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잘됐다. 정말 잘됐어. 그래, 나는 알고 있었어. 승우, 네가 반드시 다시 일어날 거라고···”

수도꼭지라도 튼 듯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은주야,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자.”

나는 은주에게 손짓을 해 그녀를 병실 밖으로 끌어냈다.

팽━

은주와 나는 서로 마주 앉아 눈물, 콧물을 닦아내느라 정신을 못 차렸다.

“··· 그래서, 승우가 깨어나서 뭐라고 말했어?”

감정이 조금 진정이 되고 나자 나는 의식의 세계 속에 갇혀있다가 현실로 귀환한 친구의 소감이 궁금해졌다.

“내가 오빠 손을 잡고 있었는데, 갑자기 오빠가 손에 힘을 꽉 주는 거예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더니··· 오빠가 눈을 뜨고 있었어요. 고개를 움직이는 것도 아직 힘든지 눈만 껌뻑대다가··· 눈물을 뚝뚝 흘리더라구요. 난 얼음장이 되어서 굳어있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서 의사 선생님을 불렀어요.”

“그래서?”

“의사 선생님 말이 정말 기적 같은 일이라고 했어요. 다만 신체기능이 모두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그렇다고 해도 재활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

“모두 잘 될 거야. 아무렴. 승우가 어떤 녀석인데.”

“참나, 그리고 있잖아요.”

코끝이 새빨개진 은주가 갑자기 쿡 웃음을 터트렸다.

“나한테 제일 처음으로 한다는 말이 가게는 어떻게 되었냐는 거에요. 공사 다 끝났냐고.”

승우 녀석답다.

정말 녀석다워.

“꿈을 꿨대요. 우리 가게가 엄청나게 잘 되고, 자기가 방송에도 나가고 그랬다나? 일하러 가야 하는데 언제 퇴원하면 되냐지 뭐에요.”

누가 무언가로 찌르기라도 한 듯 심장이 아파서 고개를 툭 떨궜다.

그래, 승우야.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기만 해.

네가 꾼 꿈 반드시 내가 꼭 현실로 만들어줄 테니까.

“은주, 네가 그동안 고생이 정말 많았다.”

“아니에요. 나야 당연히 해야 할 걸 한 것뿐인데, 뭐. 영수 오빠에게 정말 신세를 많이 졌어요. 이걸 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니야. 병원비 문제라면 걱정하지 마. 너랑 승우가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가 없어.”

“우리 오빠가 영수 오빠 같은 사람이 옆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과연 그럴까?

애초에 내가 없었다면 승우가 이렇게 크게 다치지도 않았을 텐데.

나는 은주에게 말하지 못한 마음속 부채감 때문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때였다.

슈트 상의 안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웅웅 진동을 털었다.

“영수 오빠. 전화 온 것 아니에요?”

“아니야. 나중에 받아도 괜찮아.”

“그러지 말고 받아보세요. 저는 괜찮아요. 오빠 바쁜 일도 많을 텐데.”

“··· 그럼, 잠깐만.”

손을 가슴팍 쪽에 넣어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전화기 액정에 찍혀있는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하자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다름 아닌 장은수였다.

* * *

“날 왜 보자고 했습니까?”

여기는 서울의 어느 바.

장은수가 만나자며 정한 자리였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의외로 작고, 아늑한 느낌이 드는 술집이었다.

비단 승우가 깨어났기 때문만이 아니라 시기적으로 묘한 감이 있었다.

장은수는 나와의 첫 번째 전투에서 사실상 패배를 인정한 참이었다.

태상 금융의 주주총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공식적으로 유증에 대한 철회 의사를 밝혔다.

어찌 보면 현명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BH인베스트먼트가 소액주주들의 의결권을 잔뜩 끌어모아 최대 주주로 올라서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최악의 시나리오.

그렇게 되면 어차피 그들이 음모했던 유증이 물 건너 가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태상 금융으로서는 차라리 발 빠르게 노선을 바꿔, 주주들의 마음을 달래고 지금의 균형 상태를 유지하는 것 말고는 길이 없었을 것이다.

타석에 들어선 앨런 오닐이 멋지게 홈런을 날린 셈이다.

하여, 이런 시기에 장은수가 날 보자고 했으니 그 속내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왔나? 늦었군.”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사실, 나올까 말까 백번은 고민했습니다.”

“나에게서 고맙다는 말이 듣고 싶은 건 아니겠지. 그렇게 뒤에 서 있지 말고 앉지, 그래.”

장은수는 자기 앞에 있는 미리 준비되어 있던 잔에 술을 따른 뒤 자기가 앉은자리 바로 옆 빈자리로 그 잔을 밀었다.

“독이라도 탔습니까?”

“싸구려 도발이군.”

자리에 앉은 내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장은수가 피식 웃었다.

“맥켈란 1926이야. 60년 숙성품이지. 요즘 이거 20년산, 30년산을 사겠다고 오픈런이니 뭐니 해서 새벽부터 노숙한다지? 웃기는 일이야. 아무리 그래봐야 그들은 이런 진짜는 맛보지도 못할 텐데··· 아무튼 독을 타기에는 아까운 술이니 시답잖은 의심은 버려주길 바라.”

나는 잔을 집어 들고 잠시동안 찰랑이는 갈색 액체를 바라보았다.

“그 한잔이 얼추 오백만 원은 될 거야. 축하해. 이걸 마실 수 있는 세계에 들어온걸.”

한 잔에 오백이라면 도대체 한 병의 값은 얼마나 된다는 걸까.

술은 뭘 마시든 취하면 그만이라는 촌스러운 나지만, 아마 옆에 있는 사람이 장은수가 아니었다면 꽤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 같다.

“그럼 헛돈 쓰시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없이 자라서, 저는 술맛 같은 건 잘 모르거든요.”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붙이고 샷 잔 속 액체를 스트레이트로 넘겼다.

고농도의 알코올이 목젖을 넘어가자 금세 배 아래부터 몸이 뜨끈해졌다.

뒤이어 입 안을 묵직한 오크 향이 뒤덮는다.

하지만 딱 그뿐.

이 한 잔에 누군가의 두 달 치 월급의 가치가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이것이 장은수의 세계라면 어쩌면 나는 평생 이해를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긴 나에게 쉼터 같은 곳이지. ··· 그런데 참 일이 우스워. 어쩐 일인지 요즘 들어 이곳에서 정적을 만나게 되는 일이 잦군.”

“두 번째 묻는 겁니다. 왜 저를 보자고 하셨습니까.”

“··· 고윤아 변호사를 얼마 전에 여기서 봤었지.”

장은수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동문서답을 했다.

하지만 그 엉뚱한 소리는 내 두 눈을 커지게 만들기 충분한 것이었다.

“윤아가 왜···”

장은수는 흐, 하고 실소를 흘리더니 제 앞의 잔을 들어 술을 꼴깍 넘겼다.

“널 건드리지 말라고 하더군. 만약 그런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참 대단해. 도대체 비결이 뭘까. 널 돕지 못해 안달 난 인간들이 천지니 말이야. 제 목숨까지도 바칠 기세야. 혹시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라도 되는 건가? 사람을 어떻게 그리 홀리지?”

“당신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당신이라···”

씁쓸하게 웃는 장은수.

하지만 그는 불온한 느낌이 강한 호칭을 탓하지는 않았다.

기분 탓일까.

오늘의 그는 왜인지 독기가 빠져있는 모습이었다.

“고윤아 변호사를 가만히 두세요. 만약 그녀에게 손끝 하나라도 댔다간···”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장은수는 내 말을 단칼에 끊었다.

그리곤 파일철 하나를 내 쪽으로 쓱 밀었다.

“이건 또 뭡니까.”

“열어봐. 나에 대해 더 오해하지 말라는 뜻에서 주는 선물이야. 나도 최근에서야 알았어. 네 친구가 많이 다쳤더군. 뭘 의심하는지는 알겠고, 왜 길길이 날뛰는지도 이해해.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가족도 아니고 고작 친구 때문이라는 게 의아하긴 하지만. 어쨌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야.”

파일철을 열어보자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가족과 함께 마트 카트를 끄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사진과 함께 파일철에 들어있는 쪽지에는 미국 어딘가로 보이는 주소가 적혀있었다.

“내 밑에서 일하던 황 실장이라는 사람이야.”

장은수가 길게 찢어진 눈으로 내 표정을 훔쳤다.

“과잉 충성의 비극이랄까.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어. 네 친구가 다치게 된 모든 일을 기획한 사람이야. 어쩌다가 생사람을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소름 돋지 않아? 황 실장이 노렸던 사람이 누구겠어?”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저렇게 태연하게 말을 하다니.

장은수, 다행인 줄 알아.

오늘 승우가 깨어나지 않았다면 난 이 자리에서 당신 턱에 주먹을 날렸을지도 모르니까.

“삶아 먹든, 찢어 죽이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이제 와서 총알받이를 던져주는 겁니까?”

“총알받이라니. 비극의 원흉이자, 주범이지. 아··· 주범이라는 말은 공범이 있다는 뉘앙스로 들리나? 하기야, 황 실장이 돈으로 매수한 쓰레기들이 있겠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을 믿을 정도로 제가 순진해 보이십니까? 사적제재 따위는 하지 않을 겁니다. 괴물들의 방식을 따라가지 않을 거예요. 이 사람에게 죄가 있다면 수사기관이 밝혀낼 겁니다. 이 일에 연관된 사람들까지 모두.”

“괴물들의 방식이라··· 순진한 거 맞군.”

장은수의 입가에 비린 웃음이 걸렸다.

“황 실장이 큰 실수를 하긴 했지만, 꼬리를 밟힐 정도로 일을 허술하게 하진 않지. 경찰이든, 검찰이든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할 거야. 어때? 너도 이제 이 사회에서 제법 힘이 있는 사람이 되었잖아. 백방으로 손을 써봤을 거 아냐? 그 사건과 관련해서 뭐라도 찾아낸 것이 있나? 그저 심증만 들고 걸인처럼 사방을 헤매고 다닐 뿐이지.”

장은수의 말은 확실히 맞았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무고함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기는 정말 이일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단순히 밑에 사람이 제멋대로 벌인 짓이라고?

장은수.

그렇게 성의 없는 말 몇 마디로 둘러댈 정도의 각오라면, 당신 틀림없이 나한테 먹혀.

“그래서, 이제 와 갑자기 저한테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는 서로에 대해 오해를 참 많이 하는 것 같아.”

장은수가 내 빈 잔에 또 한 번 술을 채웠다.

“이봐, 한영수.”

양주병을 내려놓은 장은수가 길게 찢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두 사람 말이야. 처음부터 관계를 다시 시작해보자고.”

아치 에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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