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85화 (185/200)

185. 뭉치면 강하다

“장은수 회장. 확실히 보통은 아니군요.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방어법을 생각해냈어요. 적이지만··· 칭찬할 수밖에 없군요.”

앨런이 손가락으로 펜을 돌리며 말했다.

아직 공시만 없다 뿐이지 유상 증자 소식이 시장에 퍼지며, 태상 금융은 한국 증시의 뜨거운 이슈로 순식간에 떠올랐다.

유증의 목적이야 누가 봐도 명확했다.

태상 금융을 태상 건설의 지배하에 직접 놓겠다는 것.

더는 BH인베스트먼트에 질질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장은수의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아쉽습니다. 한 번쯤은 우리와 협상을 시도할 거라고 예상했는데요. 제가 완전히 틀렸군요.”

앨런이 쩝쩝 입맛을 다셨다.

“어차피 돈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 앨런도 알고 있었잖아요.”

“오, 물론 미스터 한의 뜻은 잘 알고 있지요. 하지만 장 회장이 채권을 두 배 이상으로 사들이겠다고 했다면 저는 어떻게든 미스터 한을 뜯어말렸을 겁니다. 아주 많은 돈은 우리에게 더 많은 선택지를 가져다줄 테니까요. 미스터 한, 꼭 베어너클만이 진짜 싸움이겠습니까?”

베어너클.

글러브를 끼지 않고 맨손으로 겨루는 권투경기의 일종.

앨런 오닐은 태상 금융이라는 전쟁터에서 시작된 나와 장은수의 격돌을 그 잔혹한 주먹싸움에 비유했다.

“사실 칭찬을 했지만 독창적인 발상은 아닙니다. 한국적 기업문화에 익숙한 장 회장이라면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었겠지요. 전형적인 순환출자의 형태이니까.”

“태상 금융이 주식을 얼마나 더 찍어낼까요?”

“아직 공시가 나오지 않았으니 알 도리가 없지요. 하지만 저들의 목적은 확실하지 않습니까? 적어도 우리가 가진 지분을 맹물로 만들 정도로는 쏟아붓겠지요.”

“그렇게 되면 우리도 우리지만, 일반 주주들에게도 피해가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그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지요. 좋은 그림은 아닌 것이 맞습니다. 기본적으로 주식 수가 늘어나면서 주주들의 권리와 재산이 훼손되는 거니까요.”

많은 기업인이 회사의 주인은 주주들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그 말속에 과연 진심이 얼마나 섞여 있을까?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아무도 믿지 않는 허울 좋은 소리에 불과한 그 말.

더욱이 장은수가 어떤 사람인가?

한 기업의 오너라기 보다는 민중을 탄압하는 독재자에 가까운 자다.

그런 그에게 주주들의 목소리쯤이야, 대수롭지 않은 지저귐에 불과할 것이다.

“오히려 당당하게 철판을 깔고 나오니 곤란해진 건 우리 쪽이란 말이군요.”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이 시간까지 우리가 확보한 태상 금융의 지분은 9.8%.

순식간에 대주주 중 하나로 부상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딱 거기까지였을 뿐 지분을 늘리는 일은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태상 쪽이 꽉 쥐고 있는 지분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유증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가 당장 최대 주주가 되는 방법밖에는 없었는데, 그러기엔 재료도 시간도 부족했다.

지금도 시장에 나오는 태상 금융의 주식을 되는대로 주워 담고는 있었지만, 그 물량으로는 언 발의 오줌누기랄까.

은호 형이 가지고 있는 태상 금융의 지분 4.6%를 우호 지분에 포함한다면 얼추 2대 주주와 비벼볼 만은 했는데, 그걸 위해 은호 형 카드를 지금 쓰자니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이었다.

“미스터 한, Why so serious?”

장은수에게 한 방 제대로 먹은 셈이니 미치지 않고서야 내 얼굴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앨런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영화 속 유명한 빌런의 대사를 따라 하는 그에게서 어떤 장난기마저 느껴졌다.

“쏟아부은 총알이 얼마입니까. 그 돈을 쓰고도 실속은 하나도 못 건지게 생겼으니까요. 웃돈까지 주면서 채권을 사들였는데··· 내가 판단을 잘못한 걸까요?”

자책하는 내 모습에 앨런은 호탕하게 하하 웃었다.

그리고 그는 내게 다소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미스터 한. 한때는 미스터 한도 평범한 직장인이었다고 했지요?”

“네. 그랬었죠.”

“얼마나 했었습니까. 회사 생활.”

질문의 의도를 도저히 종잡을 수 없었지만, 우선은 선선히 대답했다.

“십 년 조금 안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미스터 한, 그때 미스터 한은 직장에서 매년 승진했습니까?”

“아니요. 남들보다 빠른 것도 느린 것도 없었던 것 같네요.”

“오. 그것 참 이상하네요. 미스터 한 정도의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가 바뀔 때마다 직급이 올라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무리 특출난 사람도 그렇게는 못 하지요. 대단한 빽을 가진 낙하산이 아니고서야···”

이 상황에 놀리는 것인가 싶어 나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말이 나왔다.

“그래요. 그렇지요.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그렇게는 못 하지요.”

앨런은 양쪽 입꼬리를 올린 채 나의 말을 따라 했다.

그리고···

“··· 그럼 매년 승진하지 못했으니까 미스터 한의 직장 생활은 실패한 겁니까?”

불의의 기습이라도 당한 듯 뒷골이 울렸다.

비로소 앨런이 하고 싶은 말을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매번 이기는 게임을 할 수는 없다는 소리군요.”

“Yes! Exactly!”

앨런이 안경을 벗어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낙담하지 마세요. 그런 모습은 미스터 한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매사가 잘 풀릴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어요. 상대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도. 하지만, 시작부터 지고 들어가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는 않네요.”

“미스터 한은 지금 장 회장에게 한방 얻어맞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지지 않았습니다.”

“··· 예?”

“그동안 미스터 한은 마법 같은 순간들을 많이 만들어냈었지요. 하지만 미스터 한만이 그런 능력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는 제 마법을 지켜봐 주시죠.”

앨런 오닐은 마치 달인의 경지에 오른 도사처럼 빙그레 웃었다.

* * *

오늘은 태상 금융의 주주총회일.

총회장의 분위기는 언제 쩍하고 갈라져 버릴지 모르는 얼음장처럼 지독한 긴장감이 팽배해있었다.

그 숨이 막힐 것 같은 분위기에 단상 위의 전기형 사장을 비롯해 임원들은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중요사안에 대한 의결을 시행하려고 합니다.”

실적발표의 시간이 지나고 마이크를 잡은 전기형 사장이 침을 꿀꺽 삼켰다.

어차피 형식적인 의결에 지나지 않았다.

BH인베스트먼트가 만만치 않게 지분을 획득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장은수와 그의 영향력 아래 있는 지분만으로도 대세를 결정짓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어쨌든 회사로서는 주주들이 알아야 할 사안에 대해 보고를 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전기형 사장에게는 이 자리에 모인 주주들의 강한 반발을 받아내야 하는 임무가 있었다.

“태상 금융은 경영권의 안정화와 장기적인 성장을 위한 자본금의 마련을 위해 유상 증자를 하고자 합니다.”

전기형 사장은 잠시 입을 닫고 주주들을 한 번씩 돌아보았다.

주주들 사이에 적절히 이쪽 편을 들어줄 프락치들을 심어놓기는 했지만, 대부분 사람의 표정은 부모의 원수라도 만난 듯 살벌하기만 했다.

“··· 증자분은 제3자 배정방식에 따라 태상 건설이 법인 명의로 매수를 할 예정입니다. 금일 종가 기준 시가총액의 15%인 1조 2천억 규모로, 이로써 태상 금융도 10조 클럽에···”

“좆 까고들 있네!”

전기형 사장의 말이 누군가의 입에 담기도 험한 욕설에 가로막혔다.

그것은 하나의 신호였다.

압력밥솥의 꼭지가 터져 솥 안의 증기가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것처럼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주주 여러분, 잠시 후 발언 기회를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진정해주세요!”

진행요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사정을 해보았지만, 분노한 군중들의 기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때였다.

한 중년의 남성이 갑자기 앉은 자리에서 튀어 나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얼굴이 질린 듯 하얘져, 몸이 잔뜩 굳어있는 전기형 사장 앞에 선 남자는 잠시 그를 지긋이 노려보더니 전기형 사장 손에 쥐어져 있는 마이크를 낚아챘다.

“나, 박주현이라고 하는데. 태상 금융의 7년 차 주주요. 7년 동안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는 이놈의 회사 주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얼마나 병신 취급을 받았는지 아십니까?”

“어이, 뭘 가만히 보고 있어? 이분 당장 내려보내지 않고?”

태상 금융의 임원중 한 명이 진행요원에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진행요원 두 명이 부리나케 달려와 남자의 양쪽 팔꿈치를 하나씩 잡아챘다.

“··· 이거 놔! 뭐? 10조 클럽? 니들 윗대가리들이 결정하는 데로 돌림빵을 놓으라고 주주들이 이 회사에 돈을 투자한 줄 알아?”

남자는 진행요원들의 힘에 못 이겨 단상에서 끌어내려지는 순간까지 악다구니를 쳤다.

그 모습을 본 주주들 사이에서는 반감이 들불처럼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주주들 틈에 껴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앨런 오닐.

태상 금융으로서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지분을 가진 BH인베스트먼트에도 당연히 주총의 초대장이 날아왔고, 앨런 오닐이 대표 자격으로 참석을 했다.

흥분한 사람들 사이에서 앨런은 팔짱을 낀 채 머리를 차갑게 식히고 있었다.

앨런은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좋은 타이밍에 자신이 마이크를 잡게 되기를.

소요가 진정되기까지 30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 건에 대한 의결은 언감생심이고, 단상 위의 임원진이 할 수 있는 것은 주주들과 질의응답 형식으로 그들을 살살 달래는 것뿐이었다.

BH 인베스트먼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은 그 담화가 얼마 정도 진행되었을 때였다.

“다들 아시다시피 최근 한 사모펀드의 채권 매점매석으로 저희 태상 금융의 자본 뿌리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태상 건설의 사내 유보금은 그룹 내에서도 최고 수준입니다. 일시적으로 태상 금융의 주식 가치는 하락할 수도 있겠으나, 장기적인 시선으로 주주 여러분이 지켜봐 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마이크를 잡은 한 임원의 말이었다.

“이보세요. 지금 우리보고 또 입 다물고 기다리라는 소릴 하는 겁니까? 아까 저 박주현이라는 양반, 7년을 묶여있었다지 않습니까! 경영진이 BH 인베스트먼트를 무슨 악의 축처럼 말하는데, 그 투자 회사가 고왕 건설을 인수하고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

사방에서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괜히 BH 인베스트먼트 이야기를 꺼낸 임원은 엇, 뜨거 싶어 마이크를 내려놓고 눈을 아래로 까내렸다.

“그럴 게 아니라 오늘 BH 관계자도 이 자리에 오셨을 거 아닙니까? 그쪽 이야기도 좀 들어봅시다.”

주주들 속 누군가의 외침에 군중들이 일제히 고개를 좌우로 돌려대기 시작했다.

‘··· showtime.’

마침내 자신의 시간이 다가온 것을 깨달은 앨런 오닐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슬쩍 일어났다.

주주들의 눈이 일제히 앨런 오닐에게 모여들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마이크를 들고 있던 주주에게 다가간 앨런은 싱긋 웃으며 그 주주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자연스럽게 그의 손에서 앨런의 손으로 마이크가 넘겨졌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BH 인베스트먼트의 COO 앨런 오닐이라고 합니다. 저 역시 오늘 여러분들과 같은 태상 금융의 주주인 우리 법인의 대표로 이곳에 왔습니다.”

태상 금융 사장과 임원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꼬투리를 잡던 것과 달리 주주들은 앨런의 말을 묵묵히 경청했다.

“우선 주주 여러분에게 사과부터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지금 주주 여러분들을 이토록 분노하게 하는 유증과 관련한 배경에는 우리 회사가 있으니까요. 예. 저희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이런 일 자체가 없었겠지요.”

앨런은 고개를 돌려 단상 위의 전기형 사장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동 업종이 하락세일때는 제일 먼저 떨어지고, 오를 때는 찔끔인 이 회사. 도대체 존재의의가 뭘까요. 그간 주주들의 고통을 외면할 때는 언제고 경영권이 위험해지니까 얼른 1조가 넘는 엄청난 돈을 끌어오는 이 회사의 주인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이봐요···”

전기형 사장이 입을 열기 무섭게 앨런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일단 주주 여러분은 아닌 것 같군요.”

군중 속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박수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전기형 사장은 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회사와 주주는 돈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주주들의 돈이 회사의 가치를 올려주니, 회사는 수익으로 보답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 선순환이 자본주의를 이끌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뭘 자꾸 기다려달라는 겁니까. 가만히 듣고 있자니 참 답답하네요.”

옳소!

어떤 이가 앨런의 말에 힘을 보탰다.

“솔직히 이 자리의 모든 주주들이 반대를 한다고 해도 태상 금융은 유증을 성사시킬 겁니다. 저들에게는 지금 그 정도의 힘을 가진 지분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제 게임이 끝난 걸까요? 아니요. 아직 안 끝났습니다.”

순간 주총장이 침묵에 휩싸였다.

박수 소리도, 앨런에게 동조하던 목소리도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proxy contest. 제가 한국말이 어눌합니다. 혹시 한국어로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 위임장 대결.”

앨런의 근처에 있던 주주 한 명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말을 듣고 앨런이 빙긋 웃었다.

“예. 위임장 대결.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주 여러분. 혼자는 약하지만 뭉치면 강합니다. 지금이 여러분이 가진 힘을 보여주실 때입니다. 부디 BH 인베스트먼트에 그 힘을 빌려주시지요.”

기다리던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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