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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억을 상속받았다-184화 (184/200)

184. 확실히 보여주세요

“회장님. 이종현입니다.”

이종현 사장이 내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장님. 이쪽으로 앉으세요.”

나는 씹어먹을 기세로 들여다보고 있던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이종현 사장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어디 지금 내가 벌려놓은 일들이 작은 것들인가.

요즘 나는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란다는 말을 절절하게 실감하고 있었다.

태상과의 쩐의 전쟁도, 이쪽에서 진행되고 있는 에메랄드시티 프로젝트도 어느 하나도 만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BH인베스트먼트와 고왕 건설을 하루에도 몇 번씩 번갈아 오가야 했다.

거기에 이따금 승우의 병상을 지키는 일까지.

정말 뭐 하나 중요하지 않고, 소홀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손오공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유기의 주인공처럼 나도 머리털을 뽑아 분신들을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도 정말 다행인 점이 하나 있었다.

나에게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그린 엉망진창 스케치에 색을 칠해, 생생한 현실로 만들어주는 유능한 사람들이.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그저 돈만 많은 몽상가에 불과했으리라.

두말할 것도 없이 이종현 사장 역시 그런 고마운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경험이 부족한 나의 경영에 원숙함을 더해주는 귀중한 측근이었다.

이런 인재를 얻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나는 장은수 회장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프레젠테이션, 이제 꼭 석 달 남았네요. 이거, 중요한 시기에 자주 자리를 비워서 사장님께 면목이 없습니다.”

“하하하, 알고 계신다니 다행입니다. 회장님이 몹시 어려운 숙제를 주셔서 요즘 가족들 얼굴 보기가 힘듭니다.”

이종현 사장이 사람 좋게 웃었다.

최근 고왕 건설은 훈풍 일색이었다.

세상이 한 판의 게임이라면 마치 혼자서만 치트키를 쓰고 다 박살을 내놓고 있달까.

내가 입성할 당시만 해도 심리적 마지노선인 만원이 깨지네, 마네 하던 고왕 건설의 주당 가격은 지금 이만 원을 넘어, 삼만 원을 향해 거침없이 가고 있었다.

최근의 나와 관련된 이슈도 거기에 한몫을 단단히 했다.

요지경 같은 세상이었다.

나의 개인적인, 어떻게 보면 불우함으로 점철된 사연은 놀랍게도 돈이 되었다.

내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 다음 날, 장이 열리기 무섭게 고왕 건설의 주가는 상한가를 찍는 기염을 토했다.

거기에 더해, BH인베스트먼트가 태상 금융의 채권을 사들이기 시작하자 말 꾸며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나를 중심으로 태상과 고왕 사이에 빅딜이 있을 거라며 지레짐작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치는 주가에 투자 과열을 우려한 사측에서 직접 해명과 진화에 나섰어야 할 정도.

하지만 이 사건은 어디까지나 알맹이 없는 풍문과도 같은 것.

회사 차원에선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실속이 있는 오름세라고 할 수 없었다.

진짜배기는 따로 있었다.

카타르에서 지난주에 연락이 왔다.

에메랄드 시티는 카타르의 정부 주도 사업.

그쪽의 왕족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과 우리 측 실무자와 미팅을 제안해온 것이다.

정말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겠다는 것이니, 수주에 대한 기대감을 품기에 충분한 이벤트였다.

하지만 환호도 잠시.

그들이 우리에게 내어준 시간은 고작 하루, 그것도 세 시간에 불과했다.

그 세 시간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회사의 10년, 아니 20년을 책임질만한 먹거리 앞에서 이종현 사장을 비롯해 TF팀 전원은 모든 역량을 갈아 넣어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보고 받으셨겠지만, 오늘 오후에 태상 자동차 쪽에서 사람들이 오기로 했습니다. 이거 LK에 태상 자동차까지··· 머리가 정말 뜨거워집니다. 허허.”

이미 예상하던 일이지만, 태상 건설은 태상 자동차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고 한다.

뭐, 말할 것도 없이 장은수 회장의 이기심이 지배적인 이유였겠지만, 공식적으로는 그룹 내 담합이 자칫 카타르 쪽에 안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도 있다는 어설픈 변명을 했다는 뒷이야기.

태상 자동차가 다 된 밥에 숟가락만 얹으며 욕심을 부린다며 알게 모르게 비난의 뉘앙스가 섞여 있는 것은 덤이었다.

은호 형에게 말했던 대로 그렇게 태상 자동차는 명분을 얻었고, 그 즉시 우리 쪽으로 발 빠르게 합류 의사를 전해왔다.

“오랜만에 고향 사람들을 만나는 기분이시겠군요.”

“명단에 아는 이름도 있긴 한데··· 다시 같이 일하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지요. 묘하긴 합니다. 마음이.”

“이왕이면 안면이 있는 사이가 수월하겠지요. 서로 좋은 이야기 많이 오가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또 그게 마냥 그렇지는 않지요.”

이종현 사장은 어쩐 일인지 내 말을 손을 내저었다.

“회장님들끼리야, 우리 같이 잘해봅시다 하고 악수하면 그만일지 모르지요. 하지만 어디 실무자들 입장이 그거랑 같겠습니까. 다 한가락 한다는 선수들인데. 어쨌든 회사 규모는 저쪽이 더 클지 몰라도, 상주는 엄연히 저희 아니겠습니까. 노는 여기가 젖는다는 걸 확실히 알려주어야지요.”

태상이라는 이름은 이종현 사장에게 남다를 수밖에 없다.

에메랄드 시티 프로젝트의 강력한 경쟁자로 고왕 건설이 부상하자 어이없게도 태상 건설의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그를 향해 배신자라며 손가락질을 해대었다.

이종현 사장으로서는 그렇게 기가 막히고 억울한 일이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종현 사장은 굳건한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포지션을 확실히 하는 기회로 삼았으며, 스스로 함께 고왕으로 건너온 이들을 하나로 똘똘 뭉치게 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지금도 결의에 넘치는 그의 모습을 보자 내 얼굴에는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혀가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이종현 사장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어 안달했다.

하지만 내 마음과 달리 지금 상황엔 갑자기? 라는 의문만 생길 생뚱맞은 말이 될 것이 뻔하여 나는 그 말을 그저 눈빛으로만 그에게 전했다.

우리가 얻어내야 할 것과 모른 척 내주어야 할 것.

그렇게 한동안 에메랄드 시티 프로젝트에 대해 이종현 사장과 나는 거시적인 대화를 한동안 나누었다.

어차피 이종현 사장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은 기술적인 발상이 아니다.

나는 건설업에 관해서는 그야말로 초짜 아닌가.

다소 얼개가 듬성듬성한 것 같지만, 이해하기 쉬운 말만을 전한다는 점에서 역시 이종현 사장은 현명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회장과 사장의 대화가 마무리 지어질 즈음이었다.

이제 자리에서 일어날 법도한데 어쩐지 이종현 사장은 무언가 주저하는 표정으로 엉덩이를 계속 소파에 붙이고 있었다.

틀림없이 나에게 무언가 더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사장님. 더 하실 말씀 있으면 편하게 하세요. 제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나요?”

“알아야 할 것이라··· 말씀드릴 것을 모두 꺼내면 오늘 밤이 새도 모자라지요. 그런데 그런 것보다···”

이종현 사장이 오른손을 들어 자기 뒤통수를 매만졌다.

크흠━

그는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조심스럽게 나에게 어떤 위인에 관해 물어왔다.

“회장님. 혹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아십니까?”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그의 이름을 물어보는 것이라면 당연히 들어는 보았고, 그가 뭘 했는지 하나하나 말해보라는 것이면 솔직히 위키백과를 열어보지 않고는 자신이 없다.

그런데 이종현 사장이 나의 상식을 테스트해보겠다고 저런 질문을 한 것은 아닐 텐데.

“예.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 출신 천재 아닙니까. 그 유명한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을 그렸고, 대단한 발명가이기도 했다지요? 믿을 수는 없지만 한 손으로는 글을 쓰고 한 손으로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고··· 가만보니 현대인의 멀티태스킹 능력은 저리 가라네요.”

“맞습니다. 모나리자는 저도 아주 오래전에 루브르 박물관에 갔을 때 실제로 본 적이 있습니다. 워낙 유명한 그림이라 진작부터 알고 있었는데 솔직히 저 눈썹 없는 여자가 뭐가 아름답다는 건지 하나도 이해가 안 되었지요.”

그의 말에 나는 '쿡' 하고 작게 웃었다.

나 역시 그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뭐랄까··· 박물관에 전시된 동시대의 그림과 비교하면 압도적인 무언가가 있더군요. 모나리자의 진가는 직접 봐야 느낄 수 있으니 기회가 되시면 회장님도 꼭 루브르 박물관에 가보시길 바랍니다. 성수기는 피하시고, 비수기에요. 그런데 제가 말하려고 하는 건 이게 아니라···”

이종현 사장은 잠시 내 눈을 바라보았다.

순전히 내 느낌이지만, 날 보는 그의 눈에는 따듯함과 왠지 모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그에게 딸이 있다고 했던가?

지금 그의 눈이 제 딸을 바라볼 때 꼭 그럴 것 같아서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이종현 사장의 다음 말은 꽤 긴 공백이 지나고 나서야 이어졌다.

“··· 이건 회장님이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서자였답니다.”

아···

그가 왜 15세기 먼 유럽의 인물 이야기를 꺼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사실 내가 장영복 회장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제일 놀랐을 사람은 이종현 사장이 아니었을까?

그는 장영복 회장을 가까이서 모셨으며, 아직 옛 보스에 대한 향수를 진하게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다.

어디 그뿐인가?

아무런 사실을 몰랐음에도 나와 장영복 회장이 아주 많이 닮았다며 놀라운 안목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 나의 출생의 비밀은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이었을지!

설령 본인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문제일지라도 말이다.

아마 커다란 망치로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나에게 그와 관련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와 하나 다를 것 없는 태도로 날 대했다.

심지어 내가 태상과의 싸움을 시작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리고 그는 오늘 아꼈던 말을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빗대어 꺼냈다.

이종현 사장이 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전달되었다.

그의 조심성 있는 배려가 고마워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응원하겠습니다. 회장님이 지금 하려는 일을요. 여기 고왕 건설 일은 저에게 맡겨두세요. 제 인생의 마지막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회장님의 기대 이상으로 해낼 테니까···”

“감사합니다. 사장님. 사실 아까부터 사장님께 감사하다는 말이 하고 싶었어요.”

“아니요. 감사는 제가 하는 게 맞습니다.”

“오늘따라 제 말에 아니라는 말씀을 많이 하시네요.”

내 말에 이종현 사장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태상을 나왔을 때 말입니다. 제 인생이 끝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마치 한 때는 모두의 부러움의 시선을 받다가 20만 킬로쯤 넘게 달려 이제는 폐차 직전인 차가 된 것 같았달까요. 아직 더 달리고 싶은데··· 엔진이 아직 살아있는데···”

잠시 응접 테이블로 고개를 떨궜던 이종현 사장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 절 구해주신 것이 회장님입니다. 장영복 회장님이 젊은 날의 저를 키워주셨다면 한 회장님은 쓰러져가던 저를 다시 일으켜주셨습니다. 뭐라 표현하기 어렵습니다만··· 그렇죠. 이것이 저의 운명이었겠지요.”

이종현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에게서 등을 돌리기 전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회장님. 태상에 확실히 보여주세요. 회장님이 어떤 사람인지를.”

뭉치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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