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괴물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가 가진 욕망을 이해하는 것이다.
사랑, 돈, 명예, 권력···
그 종류의 가짓수야 무한하겠지만, 사람이라면 마음속 비밀의 방에 소망하는 것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건드린다면, 천년을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거암(巨巖)마저도 흔들바위로 만들 수 있다.
장은우는 억울했을 것이다.
가문의 둘째라는 어중간한 위치에, 여자라는 성별.
대한민국은 아주 오랫동안 유교적 습성의 지배를 받던 곳이다.
아무리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지만, 사람들의 인식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기 마련이니 이 집안싸움에서 장은우에게 유리한 조건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포기를 했을 것이다.
이 판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이라는 자기 합리화와 함께.
막연한 추측이지만, 그 상실감이 돈이라면 아쉬울 것이 없는 장은우가 도박에 빠지게 만들었던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방금 비밀의 방 열쇠를 집어 든 것이다.
사장(死葬)되어 버렸던 장은우의 욕망.
비밀의 방에서 그것을 다시 끄집어낸 것이다.
장은우 정도라면 세상에서 어지간한 것은 보고, 듣고, 경험했을 것이다.
그런 그녀조차 내가 던진 돌직구의 위력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기, 고기 좋은 것 쓰네.”
한참 말이 없던 장은우가 제 접시에 있던 스테이크를 내 접시에 덜어주었다.
“입 안 댄 거야. 너도 한번 먹어보라고.”
굉장히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나의 도전이 성공했음을 의미하는.
“그래서··· 은호랑은 이야기가 된 거야?”
장은우와 나 사이에는 나름의 서사가 있다.
그 서사 속에서 내 실력을 확인한 바 있는 그녀는 지금 의심이 아닌, 확인을 받으려 하고 있었다.
“아니요. 하지만 은호 형도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지금 은호 형은 공수표라도 잔뜩 뿌리고 싶은 심정일 테니까요.”
“··· 확실히. 난 은호가 이제 총수 자리를 포기해버린 줄로만 알았어. 너와 손을 잡은 것을 보니 은호가 아직 간절하긴 한가 보네. 그런데 이게 다 너 혼자 생각한 거라고? 영리해. 그리고 무섭네. 은수 오빠라면 이런 제안 절대로 하지 못하겠지.”
글쎄.
나로서는 잃을 것이 없는 제안이었으니 고민하고 말고도 없었다.
설령 태상 그룹이 산산조각 찢어진다고 해도 내가 아쉬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아니, 어쩌면 나의 내밀한 곳의 복수심은 오히려 그것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분 정리와 같은 복잡한 문제는 제가 이 자리에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그쪽에 기술자도 아닐뿐더러, 어디까지나 외부인에 불과하니까요. 하지만 그룹 총수의 결단만 있다면 장은우 사장님의 독립이 분명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요.”
“그리고 그 총수는 은호가 되어야 하고 말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사장님이 우리에게 합류를 해야 하고요.”
장은우는 냅킨으로 입 주변을 조심스럽게 닦더니 머리를 쓸어 넘겼다.
“솔직히 인정할게. 내가 살면서 들었던 소리 중에 가장 솔깃한 이야기야.”
“태상 백화점은 그룹 안에서 이질적입니다. 흙냄새, 땀 냄새냐는 태상 그룹의 분위기와는 조금 다르지요. 자유로운 환경에 풀어놓는다면 사장님은 지금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사업을 키워나가실 수 있는 분입니다.”
“듣기 좋은 말이긴 한데, 너 한 사람에게 너무 휘둘리는 것 같아 유쾌하지만은 않네.”
“그 거부감만 넘어서면 보일 겁니다. 사장님의 미래가.”
흐음.
장은우는 콧소리를 한번 낸 뒤,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동의한다는 뜻을 가진 세상에서 가장 기본적인 제스처.
나는 그녀의 하얀 손을 맞잡았다.
“내가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그래. 마지막으로 도박 한번 해보자.”
“이걸 도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장님이 했던 도박이랑은 차원이 다르죠. 이길 확률이 너무나도 높으니까. 아, 그나저나 이제는 정말 깨끗하게 손 씻으신 거죠?”
내 말에 장은우가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잠깐의 외도였을 뿐이야. 그런데 나는 언제까지 입 다물고 있으면 되겠어?”
장은우도 눈치가 보통은 아닌지라, 이미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짐작하고 있었다.
“최대한 마지막에 마지막까지요. 사장단 회의에서 거수로 총수를 결정한다면서요? 사장님이 손을 들 때까지 장은수 회장이 몰랐으면 합니다.”
“이렇게 된 이상 나도 은호를 전폭적으로 밀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 호랑이 등에 올라타 버렸는데, 거기서 떨어지면 나도 모든 걸 잃는 거라고, 이제.”
“그럼 안 떨어지도록 호랑이 목덜미만 꽉 잡고 계세요.”
“얘. 한영수, 나도 태상에 나름대로 입김이 있어. 여기저기 써볼 힘 정도는 있다는 거야.”
“안 돼요.”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이야기가 다리를 계속 치다 보면 결국에는 모두가 알게 되는 법입니다. 고작 몇 개월이에요. 그동안만 우리의 관계는 베일 속에 있는 겁니다. 그리고···”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장은수 회장이 이 일을 알게 되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누나의 신변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나의 편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녀가 다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런 마음의 반영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장은우를 누나라고 불러버렸다.
장은우는 갑작스럽게 달라진 호칭을 탓하지 않았다.
“얘, 한영수.”
“말하세요.”
“아까 네가 너 스스로를 외부인이라고 말했지?”
분명 지나가는 말로 그렇게 말하긴 했다.
딱히 어떤 감정이 실린 소리는 아니었다.
그저 나의 포지션을 담담하게 표현한 것일 뿐.
“킹 메이커라··· 곰 같은 은호에게 정말 필요한 사람이 붙어버렸네. 그런데, 네가 외부인이길 고집한다면 들이는 노력에 비해 얻을 게 너무 적은 것 아니야?”
나는 가만히 장은우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짐작이 되었고, 그것은 지금 내가 대답해줄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 아버지의 피를 제일 진하게 물려받은 건 한영수, 너 인 것 같아. 그런 네가 어떻게 외부인일 수가 있겠어.”
장은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
“··· 총수, 네가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기어코 여기까지 왔구나.
천애 고아, 사생아에 불과했던 나.
지금 정실 자식이 이 나에게 적통의 왕좌 위에 오르라고 말을 하고 있다.
보아라, 세상아.
결국 나는 나를 이렇게 증명해내지 않았는가.
하지만, 조금은 유치한 감상에 나를 계속 맡겨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거긴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닙니다.”
“겸손이야? 내가 보기엔 우리 형제 중 누구보다도 가장 잘 해낼 것 같은데? 아니면, 네 야심에는 태상의 총수 자리도 부족하다는 거야?”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괴물이 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거기에 가게 되면 어쩌면 내가 진짜 괴물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요.”
“괴물?”
장은우는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장은수는 눈을 감았다.
순간 지독한 두통이 엄습해와 그는 손가락을 들어 옆머리를 꾹꾹 눌렀다.
“그래서. 전환권이 전부 행사되면 BH 인베스트먼트가 가지게 될 태상 금융의 지분이 얼마나 됩니까.”
“15% 이상입니다.”
“다른 대주주 지분 관계는요.”
“회장님을 비롯한 가족분께서 쥐고 있는 지분이 21%로 가장 큽니다. 그 외에는 태상 건설이 가지고 있는 지분이 가장 큽니다. 8.4%이고, 또···”
단어와 숫자의 나열이 장은수의 머리를 더욱 아프게 했다.
채권자가 전환권을 행사하겠다는데 막을 도리가 없다.
‘2배를 부르던 그 뻔뻔함이 여기서 나오는 거였구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태상 금융의 지분이 모두 21%라는 것인데, 그것이 당연히 전부 장은수의 것이 아닐뿐더러 BH, 한영수 쪽에서 6포인트를 뒤집지 못할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 아무런 호재 없이도 태상 금융의 주가가 요즘 들어 힘을 받고 있었는데 그 배경에 누가 있을지 뻔히 보이는 장은수였다.
단순히 태상의 계열사를 일개 사모펀드에게 내줄 생각이냐며 호통을 쳐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전략이 필요했다.
전략이.
‘돈으로 뭉개야 하나? 2배, 아니 이제는 그 이상을 요구할지도 모르지···’
그건 안된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식으로 패배를 인정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는 장은수였다.
이제 한쪽이 아니라 양쪽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대던 장은수.
장고(長考) 끝에 그의 입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 이렇게 합시다.”
장은수의 말에 말 잘 듣는 학생이 받아쓰기하는 것처럼 전기형 사장이 자세를 똑바로 했다.
“대량 증자를 합시다. 유상 증자를요. 그리고 그 증자분은 태상 건설이 전부 사들이겠습니다.”
“예? 회장님, 그건···”
순간 전기형 사장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BH 인베스트먼트에서 전환사채 폭탄이 터지는 이 순간에 증자라니.
주주들의 분노가 폭발할 것이 눈에 훤히 보이는 전기형 사장이었다.
더욱이 장은수의 말은 태상 금융을 태상 건설의 지배하에 놓겠다는 것과 같은 소리였다.
태상 건설의 최대 주주는 다름 아닌 장은수.
즉, 장은수는 자기 돈을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태상 금융을 먹어 치우게 되는 것이었다.
‘한영수, 난 절대 네 놈한테 순순히 당해주지 않아.’
장은수는 자신의 계획이 꽤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전기형 사장은 장은수와는 생각이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주주들에게서 난리가 날 겁니다. 지분율이 희석되면서 주당 수익률도 박살이 날 것이고···”
“미치겠군.”
어쩔 줄 몰라 하며 우는소리를 하는 전기형 사장을 향해 장은수는 싸늘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급니까? 정말로 지금 그게 중요해요? 남의 손에 회사가 넘어가게 생긴 판국에? 태상 금융, 솔직히 무슨 방법을 쓰든 숨만 붙여놓으면 그만이에요.”
비상식적인 말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상식이 되곤 한다.
여기서 장은수는 그 정도의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방법 없습니다. 더 좋은 대책을 말할 생각이 아니라면, 그냥 내 지시대로 하세요.”
“저··· 회장님, 법인이 금융사를 인수하면 그 법인의 최대 주주는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태상 건설의 최대 주주는 회장님이시지요. 혹여라도 번거로운 일에 휘말리실까 걱정됩니다.”
전기형 사장은 간신히 한 번 더 용기를 짜내보았다.
어느정도는 진심이 담겨있는 충심으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장은수의 눈에 자꾸 태클을 걸고넘어지는 전 사장이 고깝게 보일 뿐이었다.
“이봐요, 전 사장.”
전기형을 부르는 장은수의 입에서 ‘님’자가 바로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 그 방증이었다.
“내 걱정하지 말고, 본인 걱정이나 하세요. BH 인베스트먼트가 태상 금융에 쳐들어오면 뭐부터 할 것 같습니까.”
혹여라도 틀린 답을 말하게 될까, 전기형 사장을 장은수의 하문에 꿀 먹은 벙어리 신세가 되었다.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듯 혀를 몇 번 차고 장은수가 말을 이었다.
”장부부터 깔 거요. 감당할 자신 있어요? 할 일 하세요. 그거나 깨끗하게 정리나 해놓으란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 아, 예. 회장님, 알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가세요. 증자는 바로 공시 준비하시고. 저쪽에서는 속도전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굼뜹니까. 더 늦기 전에 방어합시다.”
목을 자라처럼 뺀 채 뒤로 등을 돌린 전기형 사장.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자 갑자기 장은수는 의심증이 솟구쳤다.
‘저 인간도··· 한영수에게 감긴 것 아니야?’
아무 배경도 없이 한영수가 태상 금융에 들이대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시작으로, 온갖 의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튀어나왔다.
믿을 놈이 없다.
아니,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
톡, 톡, 톡.
장은수는 자신의 집무 책상을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확실히 보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