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제안
‘지킬 것을 만들지 말자.’
이것은 장은수가 신념처럼 믿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아직 어렸던 시절 장영복 회장은 아들에게 짐이 가벼울수록 오히려 멀리 갈 수 있다고 말해준 적이 있다.
장은수는 아버지의 조언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했다.
지켜야 하는 것들은 결국 짐이 되고, 자기 발목을 잡게 될 것이라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정, 가족애, 사랑··· 그런 보편적인 감정들을 경시하는 타고난 기질과 더불어 그의 신념은 제법 성공적이었다.
아쉬운 것이 없으니 할 말을 거침없이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의 그런 모습에 고개를 숙였다.
장은수는 그것이 자신의 당당함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 태상 금융의 전기형 사장이 자기 앞에서 주절거리고 있는 소리를 듣고 있으며, 장은수는 여태껏 자신이 지킬 것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잃어본 적이 없을 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회장님. BH 인베스트먼트가 확보한 채권이 6천억을 넘어섰습니다. 저희가 발행한 채권의 총액의 절반이 훌쩍 넘어갔습니다.”
전기형 사장은 숨이 턱턱 막힌다는 듯 넥타이 매듭을 거칠게 손으로 잡아 흔들었다.
BH 인베스트먼트는 숨 쉬는 것처럼 아낌없이 돈을 쏴대었다.
마치 물건을 담아두면 아무리 써도 줄지 않는다는 전설의 보물단지라도 하나 껴안고 있는 것 같았다.
“태상 금융의 현재 현금 보유량은 어떻게 됩니까.”
“BH 인베스트먼트가 매입한 채권의 금액에 턱없이 못 미칩니다. 4,600억입니다. 이것도 계열사가 가진 유보금을 싹싹 긁은 겁니다.”
전기형이 눈알을 굴렸다.
“저쪽의 의도를 확인해야 합니다. 만기 채권들을 모두 회수하겠다고 나선다면···”
“전 사장님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장은수는 전기형이 부들대며 내뱉으려는 말을 알아채고 선수를 쳐 잘랐다.
부도라니.
그런 말은 입 밖에 나와서조차 안된다.
‘원래 호들갑이 유난스러운 양반인 건 알고 있었지만···’
장은수는 전기형을 창고지기에 임명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그의 심약함이었다.
간이 작으니 적어도 돈줄을 쥐고 있어도 따른 생각을 하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장은수는 오늘만은 전 사장의 그런 성격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저 어깨가 축 처진 남자가 문제가 아니었다.
한영수의 공세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치고 들어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대한민국 은행들에 있어서 태상의 이름은 트리플 A의 신용 보증수표나 다름없었으니까.
그깟 채권 만기쯤이야 얼마든지 연장 가능한, 평생이고 빌려 쓸 수 있는 돈에 불과했다.
그런데, 저 한영수라는 놈이 유동성 불안에 떨고 있는 은행들의 위기감에 편승해 아주 시기적절하게 기습을 해 온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태상 금융을 잃을 수는 없는 장은수였다.
그룹의 통장을 자기 영향력 아래 둔다는 것은 단순히 사장단 회의에서 한 표를 받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으니까.
‘··· 비자금을 풀어볼까?’
그의 머릿속에 이름조차 생소한 어느 섬나라의 은행에 잠자고 있는 돈들이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작은 빌미조차도 패배로 직결될 수 있는 시기다.
사냥개 같은 한영수가 어디서, 어떻게 냄새를 맡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리 장은수라고 해도 수천억의 현금을 바로 마련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었다.
손가락으로 톡톡 책상을 치던 장은수.
“··· 내가 만나보겠습니다.”
“회장님,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앨런 오닐인지 뭔지 그 작자 말이요.”
방어를 위한 총알을 어떻게 마련할지는 나중의 문제다.
전기형 사장이 아까 떠든 것처럼 저쪽의 의도가 무엇인지 감을 잡는 것이 우선이다.
‘아마 앨런 오닐이라는 자가 한영수의 꾀주머니겠지. 한번 확인해 두는 것도 나쁠 것 없겠지.’
* * *
“반갑소. 장은수요.”
“오··· 반갑습니다. BH의 COO 앨런 오닐입니다. 자··· 이쪽으로.”
장은수는 날카로운 눈으로 앨런 오닐을 바라보았다.
그가 예상했던 모습과 크게 차이가 없었기에 특별할 것 없는 인상이었다.
전형적인 월가 출신 동양인이랄까.
그쪽 세계에서 일하는 자들이 으레 그렇지만, 특히나 동양계가 숫자에 더더욱 밝다는 것은 익히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장은수는 슈트 상의를 양손으로 팽팽하게 펴며, 앨런이 안내한 자리에 앉았다.
혹시 가능할지도 모르는 회유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손님이 올 거라더니··· 정말 그 말이 맞았네요.”
앨런 오닐이 슬쩍 웃으며 장은수로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반사적으로 장은수의 한쪽 눈가가 찌푸려졌다.
“손님이라는 건 지금 나를 두고 하는 말입니까?”
앨런은 빙긋이 계속 웃기만 할 뿐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장은수는 앨런을 한번 긁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듣자 하니, 이력이 굉장히 화려하시더군요.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시던 분이 한국에 벌써 발이 반년 넘게 묶여 있다니···”
“홈타운에 돌아온 기분이랄까요. 저는 한국이 좋습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좋아졌다는 말이 맞겠지요.”
“시시하지 않습니까. 미국 시장에서 점유율 3위를 하고 있던 컴퓨터 제조업체를 무너트리는 게 큰 역할을 하지 않았소. 그런데 겨우 이 작은 나라의 건설사라니요.”
장은수의 말에 앨런은 사뭇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너트렸다는 말은 적절치 않고요. 그 컴퓨터 회사. 당시 제가 일하던 사모펀드에 인수된 뒤 유통망을 확대로 몇 배로 커졌으니 살려냈다는 말이 맞겠지요.”
“그래요. 그리고 난 뒤에 엄청난 수익을 남기고 바로 시장에 조각을 내서 팔아치웠고.”
“예. 투자한 돈의 정확히 두 배만큼의 수익이었지요. 그런데 회장님께서는 오늘 제 과거를 비난하고 싶어서 찾아오신 겁니까?”
“아니. 난 오히려 미스터 오닐 같은 사람을 좋아하오. 도덕성에 호소하는 것은 약자들의 특성 아니겠소.”
“어쨌든. 저는 지금 하는 일이 재밌습니다. 전혀 시시하지 않아요. 더욱이··· 요즘에 제가 골몰하고 있는 일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태상 그룹의 채권자가 된다는 건 결코 그 무게감이 가볍지 않지요.”
‘이것 봐라?’
“태상 금융은 그룹의 일부분, 그것도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소. 설마하니, 이 태상이 그 정도 돈을 감당 못 할 거로 생각하지는 않으실 텐데.”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요. 그런데 사실 돈 몇 푼 남기자고 지금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장은수는 팔짱을 낀 채 앨런의 입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로 회사채를 모아보니, 조금 위험한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 이 시각에도 만기가 채 몇 개월 남지 않은 채권들이 우리 회사에 모여들고 있습니다. 저 역시 평생을 도덕과는 무관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장 회장님. 아무리 강하고 거대한 몸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심장이 단 몇 분만 멈춰 피가 돌지 않으면 큰일이 나지 않습니까?”
“··· 그래서요.”
“폭탄 한번 떨어트려 볼까 합니다. 지금 BH가 가진 채권이면 얼마 동안 태상 금융의 자금 회전을 멈추는 데는 충분할 겁니다. 마치 심장이 뛰지 않는 것처럼요. 방심하지 마세요. 회장님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태상 금융 말입니다. 돈이 움직이는 중간 정류장에 불과하니 기업으로서는 펀더멘탈이 없다시피 하지 않습니까? 정말로 와르르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만약 태상 금융이 부도가 난다면, 그쪽이 쥐고 있는 채권 역시 휴지 쪼가리가 된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소?”
“상관없습니다.”
··· 6천억이 넘는 돈이 날아가도 상관이 없다?
장은수는 잠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이것은 그저 앨런의 허세인가?
아니면 그 돈을 버려가면서까지 자신에게 도전하겠다는 한영수의 만용인가.
장은수가 머릿속으로 수를 정리하느라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앨런이 말했다.
“한국에는 이런 말이 있더군요. ‘태상이 곧 한강의 역사다.’라고요. 그만큼 태상이라는 기업이 대한민국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그런 태상 일부가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 그 위기감만으로도 한국 증시는 박살이 날 겁니다. 그리고 저는 주가가 곤두박질칠 때 돈을 버는 방법을 수백 가지도 넘게 알고 있습니다. 6천억, 그걸 위한 투자금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입니다.”
“대범하고 ··· 악마적인 발상이군.”
앨런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요. 태상을 사랑하시는 회장님께서 이 불온한 악당들의 손에서 그룹을 지켜주실 테니까요.”
“그게 이 회사의 대표··· 한영수 대표의 그림이요?”
“저런··· 한영수 대표는 이 일과 상관없습니다.”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하는 거짓말이라는 걸 장은수는 알고 있었지만, 일단은 잠자코 있었다.
“장 회장님께서 뭐라고 생각하시건, 한 대표는 그저 자금만 저에게 맡겼을 뿐입니다. 재량은 저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좋소.”
장은수가 비죽이 웃었다.
“불은 끌 수 있을 때 빨리 끄는 것이 맞지. 물 아끼겠다고 집 한 채를 다 태워 먹는 미련한 짓은 할 수 없으니까.”
“역시 현명하십니다. 장 회장님이라면 대화가 통할 거로 생각했습니다.”
“BH 인베스트먼트가 매입한 채권 가격에 5%를 더 쳐주겠소. 만기가 가까운 것들을 먼저, 3개월 안에 나머지도 우리가 다 소화하는 걸을 조건으로.”
“5%라··· 6천억만큼 채권을 사들이는데 저희가 쓴 돈이 6천7백억입니다. 대충 계산기 두들겨봐도 인건비 빼고도 300억은 남는 장사군요.”
“고작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애쓴 것에 비하면 과하다 싶을 정도의 보상 아니겠소? 그리고 별개로 미스터 오닐에게 제안할 것이 하나 더 있소.”
“제안이요? 뭘까요, 그게.”
“태상으로 넘어오시오.”
앨런은 장은수의 말을 먼 고대의 언어처럼 못 알아듣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기회에 태상 금융 교통정리 좀 할 생각이오.”
“교통정리라··· 의미심장한 말이군요. 혹시 저에게 태상 금융의 높은 자리라도 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미스터 오닐이 생각할 수 있는 이상으로. 사장, 정도면 입맛에 맞겠소? 조건은 전문 경영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를 약속하지.”
앨런은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회장님··· 일단 계산이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계산을 맞춰주시지 못하는데 회장님을 믿고 태상을 건너갈 수 있겠습니까?”
“계산이라?”
“5%라니요. 제가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봤는데, 은행 앞에 걸린 플래카드에도 그것보다도 높은 수익률을 약속하던데요.”
앨런은 손가락을 V 자로 펼쳐 장은수 앞에 들어 보였다.
“2배. 저희가 매입한 금액의 2배라면 파는 것을 신중하게 고민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스카우트 제의··· 감사하지만,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전기형 사장님인가요? 태상 금융의 현 사장님이. 회장님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면 참으로 속상해하시겠습니다.”
순식간에 장은수의 얼굴이 시뻘겋게 붉어졌다.
‘··· 지금껏 나를 조롱하고 있었구나!’
앨런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문 쪽을 향해 손을 쭉 뻗었다.
“회장님. 나가시는 문은 저쪽입니다. 만나 봬서 영광이었습니다.”
차도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