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공격 개시
“형··· 저 영하요. 저 기억하세요?”
넓고 얕은 인간관계보다는 괜찮은 사람 하나라도 제대로 아는 것이 낫다는 주의로 살아왔기에, 여럿과 친분을 나누고 살지는 않았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먹고 사느라, 내 삶을 스스로 책임지느라 눈코 뜰 새 없기도 했고.
그런데 이민욱 기자와 인터뷰하고 난 뒤 온 세상이 나를 찾기 시작했다.
내 이름이 모든 인터넷 포털의 실시간 순위 1위에 올라와 있는 것을 보는 기분은 참으로 묘한 것이었다.
쉬지 않고 울려대는 전화에 전화기의 배터리는 채 반나절도 버티지 못했다.
수많은 언론사의 취재요청을 비롯해, 기억력 하나는 비상하다는 내 머릿속에서조차 희미해진 이름들까지···
물론 각오야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
지금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인데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랄까.
내가 사는 곳까지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래도 그렇게 큰돈이 생겼다는 젊은 놈이 이런 허름한 아파트에 살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이런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휴대전화 번호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내 번호라는 것이 생긴 이래로 한 번도 바꾼 적이 없었기에 아쉽기는 했지만,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우선은 지인들에게만 문자 메시지를 통해 번호가 바뀌었음을 알렸던 터다.
지금 나에게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중식 모터스의 김영하.
김 주임··· 아니 이제는 김 대리가 되었다는 녀석은 내 문자를 받은 김에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영하야, 널 기억하냐니 그게 무슨 엉뚱한 소리냐.”
“그게··· 왠지 이제 형이랑 친한 척하면 안 될 거 같아서요. 저, 근데 형이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쓸데없는 소리. 그럼 한 대리님이라고 부르려고?”
전화기 너머에서 뭐랄까, 안도의 한숨 같은 것이 들려왔다.
“형, 그··· 뉴스 기사 봤어요. 뭐라고 해야 할지··· 현실 속 이야기가 아닌 것 같고.”
“그러게··· 그런데 사람 일이라는 게 다 그렇잖아. 적응하고 살아가는 거지. 그런데 나야말로 네가 대리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우리 김 대리님, 이제 일은 잘하고 계시나?”
“아이, 참, 형! 저 이제 밑에 직원 셋이나 있거든요? 걔들이 절 얼마나 우러러보는데요.”
“··· 셋? 어떻게 회사에서 우리 팀에 인원을 채워주었나 보지?”
“그래봐야 형이랑 예리 씨 나가고 겨우 하나 더 팀에 채워준 건데요, 뭐. 알잖아요, 우리 TO 빵꾸나서 개고생했던 거.”
“그래··· 그랬었지.”
그 시절이 마치 옛날 옛적 전래동화처럼 느껴진다.
“형, 저 그런데 형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어요. 그래서 전화 걸었어요.”
하고 싶은 말이라.
단박에 짐작이 가는 것이 있었다.
아마도 영하 녀석, 나에게 취업 청탁이라도 하려는 것 아닐까?
다른 데 이직할 거면 자기도 꼭 데려가달라고 떼를 쓰던 김영하 아닌가.
그래도 나에겐 첫 부사수였고, 함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서 한 사이.
그 정이 결코 무게가 가볍다고 할 수는 없으니 내 이름을 팔아가며 슬슬 회사 생활할 생각이 아니라면 적당한 자리 하나쯤 못 만들어 줄 것도 없다.
··· 아니면 혹시 이 녀석 코인 때문에 큰 빚이라도 진 건가?
아무튼 무슨 말이든 일단 들어보마, 싶은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뭔데? 편하게 이야기해.”
“그게···”
김영하는 대단히 어려운 소리라도 할 듯이 뜸을 들였다.
그런데.
잠시 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말 의외의 것이었다.
“형. 우리 그냥 직장동료 사이는 아니었죠?”
“당연하지. 동포 포차에서 도원결의를 맺은 사이잖아.”
“있잖아요, 형. 기사나 유튜브를 보니까 사람들이 형을 보고 억세게 운이 좋다고 하더라구요. 남의 사정이나 아픔도 모르면서···”
“그것보다 더 심한 말도 많던걸. 원래 좋은 소리가 천 가지여도 나쁜 말 하나가 눈에는 들보가 되는 법이야. 난 신경 안 써.”
“나는 알아요. 갑자기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아는 영수 형은 그대로일 거라는걸. 한 회장님이든, 한 대리님이든 그런 거랑 상관없이 멋진 사람이라는 걸··· 그냥 왠지 지금 형에게 이런 말이 필요할 것 같았어요.”
생각지도 못한 뭉클함이었다.
그의 속도 모르면서 함부로 짐작을 하려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 영하 너. 철 들었구나.”
“아직 멀었죠. 딱 예전에 형이 했던 것만큼만 하고 싶어요. 그렇지 않아도 회사에서 종종 생각해요. 지금 이런 상황이었으면 영수 형은 어떻게 했을까?”
“그래. 아직 멀긴 한 것 같다.”
나는 전화기 너머 김영하의 얼굴을 떠올리며 웃으며 말했다.
“예? 에이, 뭐야··· 남은 기껏 생각해서 좋은 소리 했더니···”
“너 대리 승진 턱 낸다, 낸다 말만 하고 왜 약속을 안 잡는데? 내가 뭐 꼭 얻어먹겠다고 그러는 게 아니라 괘씸해서 그래.”
하하하━
김영하가 경쾌하게 웃었다.
“저야 언제든 콜이죠. 연락드릴게요. 예리 씨도 같이죠?”
“그래. 말 꺼내놓고 이런 소리 해서 미안한데, 나 주변 정리만 되면 그때 꼭 보자. ··· 마치 어제 헤어졌던 것처럼.”
그렇게 전화를 끊자, 창밖의 도시 풍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앨런 오닐이 내 앞에 와서 앉았다.
“미스터 한, 기분 좋은 전화였던 모양이지요?”
“네. 옛 동료로부터 전화요. 이거, 뜻하지 않게 위로를 받았네요.”
“Water is best but diamonds shine like stars only when the light is on them.”
“··· 예?”
“물은 항상 좋지만, 다이아몬드는 빛이 있어야만 빛난다는 말입니다. 유난한 관계보다 익숙한 사이가 더 소중하다는 뜻 정도일까요.”
내가 장영복 회장의 사생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앨런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나에게 무언가 동질감을 느끼는 눈치였다.
사연이 꼭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역시도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모르고 살았던 시절이 아주 길었으니까.
때로는 아픔이 연대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법이다.
“좋은 말이네요. 마음에 새겨두겠습니다. 그럼, 앨런··· 아까 하던 말을 계속해볼까요?”
“Yes, sir. 일단 저는 태상 금융의 회사채를 사들이겠다는 결정을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앨런 오닐이 콧등으로 미끄러져 앉은 사각테의 안경을 올리며 말했다.
“태상 금융은 자금조달의 70% 이상을 회사채로 감당하고 있지요. 이렇게 우회해서 돌아가는 것, 좋은 전략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주식으로 지분권 싸움을 하려고 했다면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쪽 대주주들은 워낙에 태상과 관계가 끈끈하고 오래되었는지라 절대 우리에게 지분을 넘기지 않을 테고, 시장에 풀린 주식을 바닥까지 싹 뒤져 쓸어 모아봤자 경영권 싸움에 불을 붙이는 데는 어림도 없었을 겁니다.”
“지금까지 얼마를 썼습니다.”
“4,800억가량입니다. 이 짧은 기간에 쏟아부었다기엔 어마어마한 액수죠.”
그런데 앨런은 사뭇 걱정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프리미엄을 얹어준다는 소문이 시장에 쫙 돌아서 아주 자기들 것도 사달라고 사방에서 난리예요. 회사채를 모으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이게 합리적인 방법인지는···”
“한마디로 지금 호구 짓을 하고 있다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거죠?”
나는 빙긋 웃으며 앨런에게 말했다.
태상 금융을 첫 번째 공격 대상으로 결정하는 것에는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단순히 사장단 선거에서 한 표를 더 얻기 위함만이 아니었다.
태상 금융은 모기업의 브랜드 이미지와는 다르게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
태상의 이름을 달은 계열사들은 뭐든지 동종 업계에서 최고라는 소리를 듣는 판국이지만, 여신업에서만큼은 강자가 아니었다.
물론 자본과 인재는 대한민국 으뜸인 태상 그룹이니, 태상 금융 역시 최고로 키우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태상 금융은 사업 확장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수수료와 이자 장사보다는 오롯이 기업 대출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태상 금융의 목을 조르면 태상 그룹 전체에 흐르는 돈의 흐름을 손아귀 안에 쥘 수 있다는 소리였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현금이 귀한 시기.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유동성 위기는 지금 상황에서 나에게는 오히려 호재였다.
채권의 금액보다 20% 값을 더 쳐주겠다는 말에 은행들은 앞다투어 BH 인베스트먼트에 회사채를 팔아넘겼다.
“앨런, 혹시 허생전이라는 소설 이야기를 모르시죠?”
“허생전? 그게 뭡니까.”
“조선시대 소설이에요. 허생이라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갑자기 조선시대 이야기를 해야 합니까?”
허생전.
가난한 형편에도 글공부만 하던 허생이라는 사람이 있었더란다.
허생의 아내는 매일 글만 읽는 허생이 답답하여 타박했는데, 그 말을 듣고 허생은 집을 뛰쳐나가 한양 최고의 갑부에게 1만 냥을 빌렸다고 한다.
그 돈으로 허생은 시장의 과일이라는 과일은 모두 싹쓸이를 해서 10배의 이문을 남겼고, 그 돈으로 다시 제주도로 가서 말총을 싹쓸이해 망건값을 폭등시켜 또 한 번 10배로 돈을 불렸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간단하게 앨런에게 들려주었다.
“그 허생이라는 사람, 아주 대단한 트레이더 인걸요?”
“소설 속 가짜 인물이에요. 허생이라는 사람을 내세워 조선의 현실을 풍자하려고 했던 거죠. 하지만 실제로 조선시대에 도고라는 자들이 있었다고 해요. 사재기로 시장을 쓸면서 큰 이득을 취하던.”
“아무튼 미스터 한이 이 이야기를 들려준 이유야 알겠습니다. 하지만 과일이나, 말총? 망건? 아까 그게 뭐라고 말했지요? 아무튼 그런 실물들이야 시세가 변하기 마련 아닙니까. 하지만 채권은 달라요. 가격이 딱 정해져서 찍혀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내가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면서 깨닫게 된 것이 하나 있어요. 이 세상에는 절대 불변의 가격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요. 기다려보세요. 틀림없이 우리가 사들인 가격보다 훨씬 더 비싼 값을 부르는 손님이 조만간 앨런 앞에 나타날 테니.”
앨런은 고개를 좌우로 털었지만,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 일은 돈보다 시간이 중요합니다. 상대방이 방어할 시간을 줘서는 안 돼요. 계속 회사채를 모아주세요. 만기가 다가오는 것일수록 더욱 좋습니다.”
“··· 진심이군요. 태상을 상대하겠다던 그 말이.”
“전 재미없는 스타일이거든요. 농담을 잘하지 못합니다.”
“미스터 한.”
앨런이 진중한 표정으로 날 불렀다.
“혹시 아버지 때문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세상은 넓습니다. 미스터 한의 배짱과 젊음이면 더 큰 무대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굳이 태상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앨런의 말에 희미하게 웃었다.
“앨런, 혹시 서핑 해보셨어요?”
“서핑이요?”
“저도 제주도에 가서 한번 해봤을 뿐이지만··· 그런 기분이 들어요. 나는 지금 그저 파도를 타고 있을 뿐이라고. 마침내 해변에 무사히 닿게 되면 그땐 앨런의 말을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미스터 한, 약속 있습니까? 오랜만에 같이 저녁이라도 했으면 하는데···”
“미안해요. 오늘은 조금 어려울 것 같아요. 제가 가봐야 하는 곳이 있거든요.”
우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