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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억을 상속받았다-177화 (169/200)

177. 500억을 상속받았다

‘무서운 녀석···!’

계절은 이제 여름의 절정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열대야에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을 연일 인터뷰했다.

하지만 장은호의 육체는 이 계절을 거스르는 한기를 느꼈다.

소름이 돋아난 팔뚝을 매만지며 장은호는 한영수를 바라보았다.

대도무문.

장은호가 항상 마음에 품고 사는 일종의 좌우명이었다.

그의 아내가 몇 번 넌지시 말했듯이, 장은호는 당당한 남자였다.

정도를 걸으면 떳떳한 법이고, 누군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장은호는 믿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그가 한영수에게서 어떤 오싹함을 느낀 것이다.

회의, 회의, 그리고 또 회의.

장은호가 고국에 돌아왔을 때, 가장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은 한국의 경직된 회의문화였다.

설령 좋은 아이디어가 하나 나오더라도, 수많은 계선을 거쳐 장은호에게 도달하는 동안 그 빛이 꺼져버리는 경우가 왕왕이었다.

쓸데없이 보고서의 두께만 두꺼워진 채.

그래서 장은호는 잘 알고 있었다.

진정 좋은 해결책이란 건 절대 복잡하지 않다는 것을.

그저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간단한 방법을 짚어낼 뿐이라는 것을.

마치 콜럼버스의 달걀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우화처럼.

한영수의 말들은 하나같이 파격적이다 싶을 만큼 대범했지만, 그 대범함에 비해 아주 심플했다.

그렇기에 더 놀라운 것이었다.

도대체가 저 녀석의 바닥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이제 고작 33살일 뿐이지 않은가.

장은호는 감탄을 숨길 수 없었다.

사실 총수 자리만 생각하면 막장에라도 들어앉은 듯 눈앞이 어두컴컴하기만 한 장은호였다.

말이라는 것은 종종 화자의 의도를 반하는 무의식이 투영되기 마련이다.

끝까지 혼자서라도 해보겠다는 장은호의 말.

그 말은 어쩌면 굳은 결심보다는 이미 패배를 직감하고 있는 장은호의 꺾여버린 마음이 담겨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막장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깊은 어둠 속에서 손을 내밀어 장은호를 끄집어내려는 사람.

바로 한영수였다.

‘어쩌면 말이야. 나와 형과 동등한 입장에서 출발했다면··· 지금 가장 앞서나가는 것은 영수, 저 녀석일지도 몰라.’

장은호는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 당신께서는 큰 실수를 두 가지 하셨습니다. 저 아이를 차갑게 내버리신 것, 그리고 진작에 찾지 않은 것. 당신이 살아계셨을 때 찾으셨어야 합니다. 직접 기회를 주었어야지요.’

살면서 단 한 번도 아비의 따듯한 시선을 못 받아본 아이.

그 아이가 어쩌면 아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재목일지도 모른다.

인생이라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단 말인가?

장은호는 자신이 처음 찾아냈을 때만 해도 겨우 씨앗에 불과하던 것이 어느새 만개를 준비하고 있는 꽃이 되었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 * *

“네가··· 태상 건설의 회장이 되겠구나···”

거침없는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이 밤이 그릇이라면, 나와 은호 형의 대화는 이미 그릇을 넘쳐 바닥을 흥건히 적셨을 것이다.

다행이랄까.

은호 형은 그 노도와 같은 흐름에 쓸려나가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든 이야기의 중심을 잡아보려 노력했다.

“제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지요. 태상의 전통 아닙니까. 태상 건설의 회장이 총수가 되는 것은.”

나는 은호 형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구태의연한 전통이기도 하지. 나는 총수가 된다고 해도 자동차 그룹의 오너에서 물러날 생각은 없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야. 내 몸이 하나인 이상 그렇다면 누군가가 태상 건설 일을 봐주어야 하겠지.”

“저는 그 누군가가 장은수 회장이 아니면 그걸로 족합니다.”

겸양을 떠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 교통정리는 이르다.

일의 완성이 우선이지 논공행상은 차분히 기다려도 늦지 않다.

그래.

어쩌면 은호 형의 말처럼 정말 태상 건설의 회장이 될 수도 있겠지.

내가 앞으로 할 일에 비하면 그 정도 요구는 애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돈을 욕심내는 것은 아니지만, 태상 건설과 고왕 건설이 합병되게 되면 결과적으로 나는 막대한 재산을 얻게 되겠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라면 원한다면 뭐든지 가질 수 있게 되리라.

그 시점에서 은퇴를 선언한다고 해도 누구 하나 내가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계산할 수 있는 모든 선택지 중에서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지겹게 따라붙은 운명이라는 놈의 스토킹을 이제는 끊어내고 싶을 뿐.

그리고 승우가 다시 눈을 떠, 그에게 용서를 빌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좋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회장이라지만,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닌 것 같구나. 임원들의 동의를 끌어내기 쉽지 않을 거야.”

“어차피 그들도 알고 있을 겁니다. 형님의 밑에서 있었던 이상 그들도 장은수 회장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요. 명분이 있으면 됩니다. 명분을 만드세요. 형님 쪽에서 먼저 태상 건설 쪽에 사업참가 의향을 밝히세요. 당연히 정치적인 의도는 쏙 뺀 채요. 에메랄드 시티 프로젝트에 태상 자동차가 참여함으로써 그룹 전체가 가져갈 이익에 대해서 강조하면 할수록 좋습니다.”

“네 말에는 은수 형이 당연히 거절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고왕 건설과 간다는 최소한의 명분은 가지게 될 것이고. 그런데··· 만약 형이 선뜻 내 손을 잡는다면 어쩔 생각이냐?”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나는 미래를 손바닥처럼 알고 있는 예언자라도 된 것처럼 딱 잘라 단언했다.

“장은수 회장은 아마도 살면서 져본 적이 없을 겁니다. 형님 앞에서 함부로 말하려는 건 아니지만··· 거기서 장은수 회장의 오만함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져본 적이 없는 사람은 도움을 받는데 서툽니다. 분명히 자기 인생에 가장 큰 획을 그을지도 모르는 그림을 그리는 데 남의 손을 빌리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더더욱 형님의 손이라면.”

단 한 번의 마주침이었지만, 장은수를 오래 알았던 사람처럼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이건 나의 감식안을 자만하는 것이 아니다.

장은수는 거울의 반대편처럼 나와는 정반대의 사람이다.

서로가 너무나 다르기에 오히려 나는 그를 더 잘 알 수 있었다.

내가 누군가와 함께 걸으려 한다면, 장은수는 뒤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채찍을 휘두르며 인내를 요구할 것이다.

내가 누군가의 이해를 구하려고 한다면, 장은수는 명령을 내릴 것이다.

내가 사람을 믿는다면, 장은수는 의심을 할 것이다.

어떤 방법이 더 나은지를 판단하지는 않겠다.

장은수와 나는 서로가 가장 잘하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 확실히 형은 져본 적이 없지. 아버지마저도 형을 막지 못했으니까.”

은호 형도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많이 없습니다. 발 빠르게 움직이셔야 합니다. 내일이라도 당장 참모들을 소집하세요. 그동안 저는 제가 할 일을 하겠습니다.”

“네가 할 일?”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의지를 담아 말했다.

“찢어 놓아야지요. 장은수 회장의 측근들을.”

그가 나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반격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 * *

“기자님. 어서 오세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날 향해 다가온 남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남자는 색 바랜 점퍼에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한 기업의 오너를 만나는 자리에 하고 나타날 복장과 외모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거··· 회장님께서 뵙자는 말에 설레서 어제 밤을 꼴딱 샜습니다. 몰골이 이래도 이해 좀 해주세요.”

능청스럽게 말을 뭉개는 남자는 밤을 새웠다는 것만은 거짓이 아닌지, 푸석푸석한 얼굴이었다.

눈 밑에 쳐진 그늘은 그의 불면의 밤이 하루 이틀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회부로 돌아가셨다고요? 기자님이 어디서 밤을 새우고 계셨을지 짐작이 됩니다.”

나는 웃으며 남자에게 말했다.

그렇다.

내 앞의 남자는 K 신문사의 이민욱 기자였다.

나의 제보를 받아 영광 산업개발의 실체에 대해 까내리는데 톡톡한 공헌을 한 이민욱 기자.

그는 잘 뽑은 특종 하나 덕분에 데스크에 큰 목소리로 사회부 복귀를 주장했다고 한다.

오늘 나는 이민욱 기자에게 엄청난 폭탄을 하나 넘겨줄 생각이었다.

어느 정치인의 비리 행각, 잘나가는 연예인의 사생활 혹은 늘 오르고 내리는 것을 반복하는 가상화폐의 기사까지도 모두 덮어버릴 뉴스를.

“세상에 나쁜 놈들이 넘쳐나니, 기삿거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그나저나 회장님께서 왜 저를··· 딱히 제가 회장님에게 영양가 있는 사람은 못 될 텐데요.”

“제가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믿을만한 기자가 이 기자님밖에 없어서요.”

이 까칠한 남자는 내 말에 머쓱해졌는지, 자기 목덜미를 슬쩍 매만졌다.

“주제넘게 조언 하나 해드려도 되겠습니까? 글쟁이들보고 함부로 믿는다는 말 하지 마세요. 이 바닥에 사짜가 절반입니다.”

그래.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내가 오늘 부른 것이지.

이민욱 기자야말로 득실을 따지지 않고 나의 일생을 왜곡 없이 글로 옮겨줄 적임자였다.

“아주 기막힌 제보를 하나 더 하고 싶습니다.”

“제보라.”

이민욱 기자는 볼펜을 딸깍거렸다.

“제보야 항상 감사한 일이지요. 어떤 내용입니까?”

“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순간 이민욱의 얼굴에 실망과 망설임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회장님, 저 태생적인 반골에 꼴통 소리를 인이 박이게 듣는 놈입니다. 누군가의 나팔수는 때려죽여도 못 해요. 억지로라도 써보려고 해도 손가락이 펜을 튕겨낸다 이 말입니다.”

이민욱의 정직한 오해가 재밌어서 빙그레 웃었다.

“저에 대해서 공룡처럼 멸종해버린 줄 알았던 단단한 인간이라고 말씀하셨었죠. 그런 인간에 대해 더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그거, 회장님에게 떡고물이라도 얻어먹겠다고 한 소리가 아닙니다. 저한테 특종을 줬다고 입에 발린 소리한 것도 아니고요. 안면 텄다고 스폰으로 엮으려고 하시는 거면 회장님을 좋게 봤던 저를 부끄럽게 만드시는··· 잠깐.”

이민욱 기자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퍼뜩 제 말을 스스로 끊었다.

부족한 잠으로 초점이 흐릿하던 그의 눈이 금세 생기를 되찾았다.

“비밀. 그래, 때가 되면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비밀을 저에게 제일 먼저 말해주겠다고 했었지요. 설마···”

“기억해주셔서 다행이군요. 잊으신 줄 알고 섭섭할 뻔했습니다. 예. 그때가 바로 오늘입니다.”

이민욱 기자가 비스듬히 앉아있던 자세를 고쳤다.

어느새 그가 앉은 테이블 앞에는 수첩이 펼쳐져 있었다.

“기자님.”

이민욱 기자는 내 부름에 대답 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의 손에 쥐어진 펜은 발사 신호만 기다리고 있는 미사일 같았다.

“만약에 말입니다. 기자님이 어느 날 갑자기 500억을 상속받게 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500억을 상속받았다.

영원히 묻혀 버릴 수도 있었던 나의 이야기가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드라마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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