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75화 (167/200)

175. 내 방식대로

“소미야. 삼촌이 그렇게 좋아?”

엄마의 말에 소미는 조약돌처럼 둥근 머리를 끄덕였다.

내 옆에 딱 붙어서 접시에 옮겨주는 고깃덩어리를 열심히도 오물거리는 소미.

티 없이 맑은 소미의 눈망울은 완전히 무해했다.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해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을 것 같은 눈.

천국이 있다면 아마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저런 눈이지 않을까 싶었다.

어린 사슴 같은 검은 눈동자를 굴리며 나를 올려다보는 소미가 너무 예뻐,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어쩐지 나를 닮은 입술로 소미는 환하게 웃었다.

이제 겨우 두 번 봤을 뿐이다.

그래도 삼촌이라고 소미는 내가 퍽 좋은 모양이었다.

현관을 열고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내가 선물해주었던 커다란 인형을 품에 안고 서 있는 소미였다.

부모의 재력을 생각하면 제가 가진 물건이 한두 개가 아닐 것이고 특별히 아끼는 것도 분명 있을 텐데, 하필이면 그 인형을 안고서 나를 기다렸다는 게 고맙고도 놀라웠다.

그 뒤로도 소미는 종일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아이의 조건 없는 애정에 감격한 나는 빈손으로 여기에 온 것을 자책하며 형수의 불같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지갑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 딸, 눈이 참 높기도 하지. 그래. 나중에 남자친구 생기면 최소한 영수 삼촌 정도 외모는 되어야 한다. 알겠지?”

“당신은! 그게 애한테 할 소리예요?”

바비큐 그릴에서 고기를 굽던 아이의 아빠는 소미가 날 따르는 이유에 대해 조금 색다른 해석을 했다.

지금 나는 은호 형 가족과 그의 집 정원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고 있었다.

일단 구 회장으로부터 넉넉한 총알 보급을 약속받았으니, 은호 형과 나 사이의 굳건한 동맹을 재확인하는 것이 두 번째로 해야 할 일이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한 번 만났으면 한다는 내 전화에, 은호 형은 그답지 않게 웬일인지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이다 이내 자기 집으로 오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했다.

굳은 얼굴로 나에게 어서 오라며 인사를 하는 그의 모습에 단박에 무언가 꺼림칙한 게 있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일단 말을 아꼈다.

형수와 소미가 만들어내는 가족적인 분위기에 동참하는 것은 진심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이 귀한 시간을 은호 형과 나누게 될 무거운 대화로 일찍부터 망쳐버리고 싶지 않았다.

저 멀리 다가오는 폭풍우를 모르고 갑판에서 따듯한 햇살을 즐기는 뱃사람처럼 일단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다정함으로 충만한 이 시간을 음미하기로 했다.

좋은 순간은 짧게 느껴지기에 언제나 아쉬운 법이다.

접시 위에서 움직이는 모두의 손길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을 때, 해가 떨어지고 그와 동시에 정원에 조명이 켜졌다.

마치 그것이 어떤 신호였다는 것처럼 은호 형은 자기 아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여보.”

금슬만은 재벌가 최고라는 명성에 걸맞게 형수는 외마디 말의 의미를 바로 알아듣고선 눈치 빠르게 행동했다.

“소미야. 엄마랑 사자 가족 보러 갈까?”

소미는 엄마의 말에 고개를 도리질 쳤다.

“삼촌은? 삼촌이 말했어요. 다음에 같이 사자 가족 보기로. 소미랑 약속했는데.”

곤란하다는 얼굴로 형수는 나를 슬쩍 보더니 다시 아이를 향해 따듯하게 말했다.

“삼촌은 아빠랑 하실 말씀이 있데. 엄마랑 잠깐만 있으면 삼촌 금방 오실 거야.”

별일 아닌 것에도 으레 떼를 쓰는 나이 아닌가.

그런 모습을 조금 보여줘도 누구 하나 뭐라 할 사람이 없을 텐데, 천성이 그런 것인지 소미는 입술을 잠시 빼쭉거렸을 뿐이다.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엄마의 손을 잡고 총총걸음을 옮겼다.

“형님. 고기 굽기만 하시고 제대로 드시지도 못한 거 아니에요?”

멀어지는 소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나는 은호 형에게 말했다.

은호 형은 캠핑 의자 하나를 내 쪽으로 끌고 오더니 그 위에 몸을 맡겼다.

그의 커다란 입이 웃음으로 벌어졌다.

“이게 가장의 행복이지.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말이 있잖아. 젊었을 때만 해도 그냥 하는 말들이겠거니 했는데, 아이 낳아보니까 알겠더라. 영수 너는 아직 이런 기분 모르지?”

“소미가 잘 먹는 것 보니까 어떤 심정일지 어렴풋이 이해는 되네요.”

잠시 아무 뜻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은호 형.

”영수야.”

어느새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말라 있었다.

“황 실장이 찾아왔었다.”

황 실장?

예전에 어렴풋이 고윤아로부터 들었던 이름이다.

장은수 회장의 심부름꾼이자, 오른팔과 다름없는 자라고.

“혹시나 말이다. 오늘 여기까지 오는 데 이상한 낌새를 느끼진 못했니?”

“없었습니다. 그때 형님께 누가 제 뒤를 쫓는다고 말씀을 드린 후에는 운전할 때 늘 신경을 쓰고 있거든요.”

은호 형은 고개를 들어 이제는 완연히 검어진 하늘을 향해 깊은 숨을 내뱉었다.

“한강에서 우리가 만난 날, 우리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황 실장이 들고 왔더구나. 너를 쫓은 것인지 아니면 나를 쫓은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미간이 절로 찌푸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만나자는 말에 왜 은호 형이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뭐라고 하던가요? 그 사람, 장은수 회장의 심복이라고 들었습니다. 왜 자기 주인이 아니라 형님을 찾아온 걸까요. 협박이라도 했습니까?”

“협박이 아닌 협상을 하려고 하더군. 요약하자면 자신도 우리 쪽에 끼워달라는 거야. 황 실장 말로는 은수 형은 아직 우리가 만난 걸 모르고 있다더라.”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돌려보냈어. 형의 약점까지 같이 팔겠다고 하더군.”

“형님, 왜 그걸 단칼에···”

나의 말에 은호 형은 단호한 표정이 되었다.

“황 실장이 말하는 은수 형의 약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 사실이 밝혀지면 그룹 전체가 위험해질지도 몰라. 그래서는 안 되지. 그건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야.”

이런···

나도 모르게 속으로 혀를 찼다.

어떤 카드들은 쥐고만 있어도 훌륭한 무기가 되는 법이다.

설령 그걸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물론 정도를 걷겠다는 은호 형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아까운 카드가 하나 날아간 셈이다.

그런데, 다른 쪽으로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은호 형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니, 시기적으로 황 실장이라는 자가 은호 형을 찾아온 것은 승우에게 사고가 나기 전의 일.

그렇다면 배를 갈아타겠다는 의사를 밝힌 황 실장은 혐의의 명단에서 지워도 된다는 말인가?

예상치 못한 변수에 상황을 정리해보느라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은호 형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황 실장이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거야. 듣기로는 급하게 미국으로 출국을 했다고 하더군.”

미국으로 나갔다고?

순간 번뜩임이 스쳐 지나갔다.

적진까지 찾아와 태상에서 한 자리를 달라던 자가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그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 이유를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틀림없이 장은수는 황 실장의 배신을 알아챘을 것이다.

방법까지야 확신할 수 없지만, 자신의 심복에게도 사람을 붙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신이 ‘믿되 확인하라.’를 신조로 삼던 구소련 정보기관의 수장이라도 된 것처럼.

그런데, 자신의 구린 곳을 알고 있는 자가 미국으로 도주하는 것을 장은수가 가만히 묵인했다?

나는 날 제거하라는 오더가 장은수의 입에서 나왔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가정 아래서는 무언가 이야기가 매끄럽지 않다.

그런 장은수가 배신자인 황 실장을 살려두었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정답이 아닐 때가 많다.

진리는 단순함에서 찾으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도 있지 않은가.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한가지였다.

도덕성의 마지노선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장은수는 살인으로 상황을 정리하지는 않는다는 것.

마침내 머릿속의 실타래가 모두 풀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아···

이 모든 일은 황 실장이라는 자의 폭주로 벌어진 것이겠구나.

황 실장은 자신의 배신을 용서받기 위해 나를 팔았겠지.

실수를 만회하겠다며 나를 정리하겠다고 덤벼들었을 것이고.

그런데 만회는커녕 엄한 생사람만 잡아버렸으니, 바로 한국을 떠나는 것을 선택했으리라.

어찌 되었건, 그렇다고 해도 앞으로의 계획이 달라질 건 없다.

장은수가 비록 직접 지시하지 않았더라도 승우의 사건에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여전히 똑같은 사실일 테니까.

“형님. 그 황 실장이라는 사람, 미국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있습니까?”

“... 영수야.”

은호 형이 눈이 잔뜩 커져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까지는 알 수가 없지. 그런데 너 지금 얼굴이 무섭다. 그렇게까지 화가 나는 거야? 미안하다. 내가 그날 한강에서 괜히 보자고 해서···”

은호 형은 나의 분노의 이유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그래. 황 실장의 소재를 잡아내는 것은 조금 뒤로 미루자.

“형님. 하나만 물어보겠습니다. 사실 오늘 형님을 뵈러 온 건, 이걸 물어보고 싶어서였습니다.”

“물론이지.”

“... 태상의 총수가 되겠다는 그 마음. 아직 변함없습니까?”

예상하지 못했던 잽처럼 툭 튀어나온 내 말에 은호 형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를 오늘 처음 본 사람인 것처럼 유심히 뜯어보았다.

재벌이라는 이미지가 주는 통념을 깨는 사람.

선한 의지와 가정적인 모습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사람.

만약 우리가 같은 집에서 태어났다면 틀림없이 우애 좋은 형제가 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내가 그를 형님이라고 주저 없이 부를 수 있는 것은, 장은호를 인간으로서 존경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그의 동기가 모든 것을 다 차지하려는 장은수의 욕망을 이길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일이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은호 형은 만약 자신이 지더라도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말 종류의 사람이다.

남자로서는 멋진 모습일지 몰라도 이 아귀다툼에서 그 정도 각오로는 무언갈 차지할 수 없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상황이 썩 유리하지는 않다. 하지만 지레 겁먹고 포기할 생각은 없어.”

용암같이 뜨거운 시선이 교차했다.

태상의 총수라는 머리와 심장을 뜨겁게 만들기에 충분한 자리니까.

“저도 형님처럼 누군가를 좀 만났습니다.”

“형 말인가? 카타르의 왕자가 내한했을 때, 고왕 건설의 대표 자격으로 너도 그 자리에 있었다지? 두 사람이 마주쳤을 거란 예상은 하고 있었다.”

“예. 하지만 거기서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장은수 회장이 먼저 저에게 독대를 청하더군요. 결코 유쾌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한가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있었습니다.”

은호 형은 내 입을 가만히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장은수 회장의 집념은 형님보다 훨씬 더 강할 거라는 걸. 이대로라면 총수 자리는 그에게 넘어가고 말 겁니다.”

잠시 은호 형의 동공이 흔들렸다.

하지만 굳은 심지를 가진 은호 형답게 이내 평정을 찾았다.

“네 안목을 의심하진 않는다. 하지만 혼자라도 상관없다. 너에게 부담을 줄 생각은 없어. 어쨌든 나는 끝까지 갈 거야.”

“아니요.”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이게 어디 완주만으로 환호할 수 있는 일입니까.”

잠시 우리 사이에 밤공기가 우리 사이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타닥타닥 타들어 가던 바비큐 그릴 안의 장작마저 온기를 잃어 온전한 침묵이 흐르고 있을 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제가요. 형님을 태상의 총수로.”

가능과 불가능을 떠나 오만하다 싶을 만큼 대범한 나의 발언에 은호 형조차 화들짝 놀랐다.

“영수, 너···”

“이대로라면 형님은 틀림없이 집니다. 판을 뒤집어 놓겠어요. 대신 방식은 철저하게 절 따라 주셨으면 합니다.”

태상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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