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74화 (166/200)

174. 실탄 준비 (2)

구 회장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대한민국이 뒤집혀? 고작 이 종이 몇 장 때문에?”

“절대 고작이 아닐 겁니다. 같은 종이여도 누가 그걸 썼는지, 내용이 무엇인지에 따라 값이 달라지는 법 아니겠습니까.”

편지를 들고 있는 구 회장의 손이 가볍게 떨려왔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구 회장에게 말했다.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네. 내가 사기를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내가 언제부터 영수 군에게 속아 왔는지.”

“만약···”

장영복 회장에 대해 잘 안다는 사람들이 같은 말로 회고하는 것이 있다.

장 회장에게는 그 어떤 꿀 같은 말재주보다도 강한 설득력을 가진 눈빛이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그것이야말로 타고난 왕의 자질 아니겠느냐며 다소 과장되게 떠들기도 했다.

만약 나도 그런 기질을 조금이나마 물려받았다면.

지금, 이 순간 그 힘을 발휘하길 바라며 나는 구 회장을 바라보았다.

“제가 지금 회장님을 속이는 것이라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으셔도 됩니다. 목숨까지 포함해서요.”

“··· 정말 지금 하는 말에 자신이 있나?”

나와 구 회장의 시선이 뜨겁게 교차했다.

더 이상 우리는 구동일을 사이에 놓고 환담하는 관계가 아니었다.

마치 대결을 앞두고 언제든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내 들 준비가 된 서부의 총잡이들처럼, 우리 둘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리고 이 긴장감은 구 회장이 나를 자신과 같은 위치에 올라선 상대로 인정한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평생을 돈을 만지며 살아왔지만, 자네처럼 대범하게 뭔가를 요구하는 사람은 처음이야. 그것도 상식 밖의 액수를. 목숨까지 걸겠다고 했나? 내 앞에서는 그런 말을 쉽게 해서는 안 돼.”

구 회장이 엄숙하게 말했다.

승우의 일이 있고 나서 알게 되었다.

내가 그동안 믿고 살았던 세상이 얼마나 동화 속 이야기인지.

사주를 받고 트럭으로 밀어버린다는 상투적인 클리셰가 내 현실에서 일어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명(明)과 암(暗)

그 암에 대해 알아버린 지금 구 회장의 말이 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구 회장은 자신을 숨긴 채 그늘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

그런 그라면 지금 저 말이 단순한 경고는 아닐 것이다.

“만약 제가 실패한다면, 제 목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 제가 하려는 일은 그 정도 결심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니까요. 대신 회장님께서도 제가 드린 편지를 열어보시는 순간, 제 말을 꼭 들어주셔야 합니다. 많은 사람의 운명을 바꿀지도 모를 비밀이 담겨있는 편지입니다.”

나는 역공에 나섰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구 회장.

그는 폭, 한숨을 쉬는가 싶더니 다과상 위에 올려져 있던 돋보기안경을 코에 걸쳐 썼다.

“난 자네를 아주 좋아해. 내가 왜 자네의 목숨까지 빼앗아야겠나. 다만, 이 편지의 내용에서 내가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다시는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는 일은 없을 걸세. BH 인베스트먼트에 투자금은 물론, 고왕 건설의 주식까지도 모두 처분해 버릴 테니까.”

“물론입니다.”

자칫하면 가장 큰 동맹군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결코 모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지독한 장난으로 점철되어 있었던 것 같은 나의 인생 아닌가?

틀림없이 구 회장이 이 이야기의 끝이 보고 싶어질 것이다.

끝이 보고 싶다면 구 회장 역시 나의 열차에 올라타야만 한다.

‘마침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구 회장이 편지 봉투를 열었다.

“그럼 읽겠네. 이제 이걸 내가 읽는 지금부터 앞으로의 일은 되돌릴 수가 없는 거야.”

나는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에 얼마 동안 눈이 몰려있던 구 회장이 미간 사이를 좁히며 나를 바라보았다.

“자네··· 이거 자네의 부친이 쓴 것인가?”

“예. 맞습니다.”

“그래··· 생각해보면 난 자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구먼. 귀신에게라도 홀린 기분이군.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이렇게까지 신뢰했다니··· 그런데 영수 군에게 비극이 있다는 것 알겠네. 안타깝게 여기고. 그런데 이게 무슨 담보가 된다는 거지?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사연 같은 건 돈이 될 수가 없어.”

“아직 성급하십니다. 이왕 펴드신 거 끝까지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오늘 여러 번 한숨 쉬게 만드는구만.”

구 회장이 손가락으로 코끝에 걸쳐있는 안경을 올려 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 회장의 표정이 극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편지에서 확인을 했겠지.

나의 아버지의 이름을.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경제의 흐름을 주도했던 그 전설의 이름을.

“이게···”

구 회장은 입이 떡 벌어진 채로 말을 잇지 못했다.

“모두 한 치의 거짓이 없는 사실입니다. 저의 생부는 장영복 그분이 틀림없습니다. 세상에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기껏해야 다섯도 안될 겁니다. 그리고 지금 한 사람이 더 추가되었습니다. 바로 구 회장님이시지요.”

허허허━

구 회장이 고개를 젖히고 웃었다.

기묘한 웃음이었다.

마치 마른행주에서 물기가 나오는 것처럼 얼굴과 소리가 따로따로 놀고 있었다.

“장영복, 그 양반에게 숨겨진 자식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아이가 내 앞에 있단 말인가? 허허···”

구 회장은 편지를 조심스럽게 접어 봉투에 넣었다.

“인정하지.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흥미로운 이야기야.”

“두 번째··· 첫 번째가 어떤 것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늘그막에 본 아들인 동일이 녀석이 나에게 처음 ‘아빠’라고 말했을 때지.”

딱딱해졌던 분위기가 아버지로서만 할 수 있는 구 회장의 농담에 다소 온화해졌다.

“하지만 아직 일러. 나는 만약 당장 태상의 장은수가 와서 2조를 빌려달라고 해도 고개를 저을 걸세.”

“저는 보육원 앞에 버려져 부모의 이름도, 얼굴도 모른 채로 자랐습니다···”

내가 꼭꼭 숨겨온 비밀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았다는 홀가분함 때문일까?

나는 구 회장에게 내가 살아온 궤적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어떠한 과장도 없이, 담담하게.

구 회장은 중간에 끊는 법 없이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중간중간 탄식을 뱉거나, 혹은 고개를 끄덕이며.

“··· 이게 제 인생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내가 인생을 개척해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어떻게 태어났는지는 바꿀 수 없지만, 상황만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고.”

“훌륭한 마음가짐이지.”

“아니요.”

뜻밖의 반박에 구 회장이 눈이 똥그래져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제가 삶을 선택한 게 아니었습니다. 삶이 저를 선택했던 겁니다.”

“삶이 나를 선택했다라···”

구 회장이 나의 말을 혼잣말로 곱씹었다.

“장영복 회장의 유족들을 상대로 유류분 청구 소송에 들어갈 겁니다. 이것도 재밌지요. 유류분 청구 소송의 소멸시효가 1년이라는데, 하필 지금에 이런 마음을 먹게 되다니···”

“그래. 자네가 물려받은 돈이 500억이라고? 영수 군이 받을 권리가 있는 유산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아닌가? 왜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거야. 세상 사람 누구라도 그러지 않을 걸세. 자기가 그 대단한 재벌의 유산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처음 장영복 회장의 아들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나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 당시에 욕심을 냈다면 열에 여덟, 아홉은 큰 화를 입었을 것이다.

문득, 구 회장이 알겠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런 건가? 그래서 삶이 자네를 선택했다고··· 지금으로 오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이거지···?”

나의 속마음을 정확히 집어낸 말이었다.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유류분 소송이 끝나면 회장님께 빌린 돈은 충분히 갚을 수 있을 겁니다. 구 회장님은 제게 든든한 인연이었습니다. 앞으로도 동행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담보라는 소리를 했구만··· 그래. 자네가 나한테 말한 대로 태상을 먹어 치운다 치세. 그럼 그 뒤에는 또 뭘 할 생각인가?”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 뒤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삶이 저에게 또 준비해 놓은 것이 있겠지요.”

“··· 부럽군.”

구 회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자네의 그 젊음이 부러워. 삶이 준비해 놓은 것을 기다릴 수 있다는 배짱이 말이야. 나이를 먹는다는 건 아무리 좋게 말하려고 해도 서글픈 일이지. 난 이제 몸이 더 이상 머리를 따라와 주지 못해. 그러니 이 집에 가만히 들어앉아 의미 없이 쌓여가는 돈들만 세고 있는 거지.”

“회장님에게는 동일이가 있지 않습니까. 회장님의 유지를 이을 수 있는.”

“아니. 나 역시 수컷이야. 아직 내가 이빨이 남아있다는 걸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고 있는.”

구 회장은 돋보기안경을 접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왜 차 여사님이 영수 군을 그렇게 아꼈는지 이해가 돼. 자네를 보고 있자니 내가 회춘이라도 하는 기분이 들거든. 피가 끓고, 마음이 동해.”

“할머니께서 단순히 제 아버지와의 인연 때문에 절 아끼신 게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요놈, 개호주야.

나를 다정하게 부르던 복희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할머니.

결국 이렇게 되었어요.

제가 가졌어야 했을 것을 이제부터라도 한번 제대로 승계해 보려구요.

“여사님도 아마 지금 나와 같은 기분이었을걸세. 영수 군, 자네는 정말이지··· 나는 장영복 회장을 직접 본 적이 없다만, 아마 딱 자네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개인적으로는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회장님 말씀을 칭찬으로 감사히 듣겠습니다.”

“그렇지··· 그건 그렇겠지. 아픈 사연은 유감으로 생각하네.”

“괜찮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결국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 회장님에게 부탁을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야. 자네의 사연은 사족일 뿐, 배경 없이도 이미 나에게 영수 군은 충분히 증명했어. ··· 좋아. 자네가 하고 싶은 일, 내가 뒤에서 지원 사격을 하도록 하지.”

··· 됐구나.

비로소 어깨에 긴장이 풀렸다.

장은수가 아무리 재산이 많다고 해도 대부분은 증권과 부동산에 물려있다.

유동적으로 처분을 하기가 어렵다는 소리다.

그에 비해 대한민국에서 가장 현금이 많은 이를 등에 업었으니, 몸놀림의 속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역사가 바뀌는 걸 바로 옆에서 구경하는 값치고는 비쌀 것도 없지.”

“감사합니다. 회장님. 반드시 기대하신 것 이상으로 돌려드리겠습니다.”

구 회장이 다과상을 넘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 회장님.”

나는 두 손으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고맙네. 앞으로 말년에 적적하던 노인네가 심심하지는 않겠구만. 맘껏 휘둘러봐. 자네라면 정말 저 태상을 넘어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구만.”

“칼을 잡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제 마음을 먹고 칼을 집었으니 끝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 회장이 내 말을 듣고 허허, 웃었다.

그의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 졌다.

“··· 정말 한동안 세상이 시끄러워지겠군.”

내 방식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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