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73화 (165/200)

173. 실탄 준비 (1)

“영수 군. 오랜만에 자네 얼굴 보니까 참 좋구먼.”

“제가 자주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이 사람아! 죄송은 무슨. 사정 바쁜 것 뻔히 알고 있는데. 소식이야 내가 묻어둔 고왕 건설의 주식이 잘 오르고 있다는 거, 그거 하나면 됐어.”

이곳은 강남 구 회장의 저택.

번번이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도저히 일반 가정집이라고 볼 수 없는 호사스러운 곳이다.

마치 한옥 박물관을 떼서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구 회장이 부리는 비서야 해가 떨어지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실상 이곳에 사는 곳은 구 씨 부자 둘 뿐인 셈이다.

남자 둘이 살기에는 지나치게 넓다 싶다가도, 구 회장이 가진 재력에 비하자면 소박한 것이 아닌가 하는 모순적인 생각이 들었다.

지금 구 회장과 나는 거실에서 고풍스러운 다과상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오랜 세월 중력의 영향으로 늘어진 볼살과 꼭 그만큼의 세월이 깊게 패놓은 주름은 그가 이제 노년에 접어들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지하경제의 전설에 대해서 감히 외모를 가지고 허튼소리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외모만 놓고 봤을 때, 구 회장과 구동일이 부자 사이라는 걸 단박에 알아맞힐 이가 과연 있을까?

구동일이 아주 반듯한 귀공자 상이라면 그의 아버지는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호감을 주는 외모라고 보기 어려웠다.

아마도 구동일은 외탁을 아주 진하게 한 모양.

저 구 회장이라는 분이 대한민국의 숨겨진 대부호라고 말한다면, 아마 사람들 열에 아홉은 실없는 소리하지 말라며 피식 웃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앉혀놓고 오 분만 구 회장과 대화를 나누게 하면, 그들은 단박에 알아챌 것이다.

이 남자에게는 겉으로 보이는 결점을 충분히 뒤덮을만한 특별한 아우라가 있다는 것을.

어찌 그렇지 않을까?

맨손으로 시작해 엄청난 돈이라는 자본주의의 성배를 들어 올린 사람이 바로 구 회장이다.

70, 80년대 오일쇼크 때 벼락부자가 된 슈퍼 개미들이 몇 있다지만, 대부분 몰락하고 최근까지 건재함을 보인 것이 복희 할머니와 구 회장, 단 둘뿐이라는 점에서 그의 특별함은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만약 적으로 만났다면 참으로 곤란했을 상대지만, 다행히 구 회장은 나를 참으로 어여뻐했다.

심지어 이런 소리를 대놓고 할 정도로.

“우리 동일이 놈이랑 동갑이라 그런가. 이제 난 영수 군이 꼭 내 아들 같아. 거 참, 동일이가 영수 군 반만 닮았어도···”

웬만한 재벌들이나, 힘 좀 쓴다는 국회의원들조차 얼굴 한 번 보기 힘들다는 구 회장이다.

그렇게까지 신중한 그가 나를 아들같이 생각한다고 말하는 건 단순한 허언은 아니니라.

“회장님. 동일이가 들으면 섭섭해하겠습니다.”

“섭섭해하기는! 아들놈이 괜히 영수 군 바짓가랑이나 잡고 늘어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나는 문득 눈이 똥그래져서 ‘영수야.’를 연발하는 구동일의 모습이 떠올라 옅게 웃었다.

“그래도 많이 변하지 않았습니까. 회장님의 속을 끓이던 예전을 생각하면··· 사람이 갑자기 변하기가 어디 쉽습니까. 다 동일이가 천성이 선하고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녀석이 허송세월한 시간이 아까워서 하는 말이야.”

“동일이의 방황은 단지 에너지를 쏟을 곳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목표를 찾은 지금은 전력 질주를 하는 게 제 눈에도 보입니다.”

“그래···? 철부지 녀석이 어디 쓸모나 있을지.”

말은 저래 하면서도 구 회장의 얼굴에 환한 빛이 돌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회장님 앞이라고 여쭙는 말씀이 아니라 동일이가 회사에서도 정말 잘해주고 있습니다.”

“정말인가?”

자기 아들을 타박하던 게 언제냐는 듯 구 회장이 귀를 쫑긋 세웠다.

그의 눈에서 아들 이야기를 뭐라도 더 풀어주길 바라는 간절함이 엿보였다.

이거 원··· 담임교사라도 된 기분이군.

뭐, 그런 갈증이야 내가 해갈 못 해줄 것도 없다.

한동안 나와 구 회장은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로 날아오를 준비를 하는 사나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유하자면 동일이는 백지였지요. 감히 말씀드리자면, 이제 그 도화지에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저도 몹시나 기대됩니다.”

허허━!

구 회장은 내 말이 마음에 든다는 듯 크게 웃었다.

그의 입에 물려있는 미소를 보자 잠시 구동일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일이, 너는 존재만으로 누군가를 저렇게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존재구나.

누군가에게는 핏줄이라는 것이 저렇게도 따듯한 것이다.

나쁜 뜻은 없었지만, 최근의 나의 상황과 비교하자니 묘한 질투심까지 들 정도였다.

“··· 이보게, 영수 군.”

잠시 생각 속에 잠겨있었을 때, 날 다시 현실로 불러들인 것은 구 회장의 목소리였다.

어느새 구 회장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희미해져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 갑자기 이렇게 날 보자고 한 것은 틀림없이 할 말이 있어서겠지?”

아들 칭찬에 사람 좋아 보이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신중하면서도 날카로운 눈으로 구 회장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한번 시작해봐라.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오늘 구 회장을 그저 인사나 하자고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승우에게 밝혔던 내 마음의 결심.

그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첫 번째 스텝에 구 회장이 있었다.

“예. 오늘 회장님을 뵈러 온 것은 낯 두꺼운 부탁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 참··· 이제 자네에게 아쉬울 게 뭐가 있지? 영수 군 또래에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걸 다 가지지 않았나.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싶네만.”

“있습니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구 회장님이 아니면 아무도 못 해줄 것입니다.”

마침내 서서히 옅어지던 미소가 구 회장의 얼굴에서 모두 사라졌다.

“무게를 잡는 거 보니 꽤 겁이 나는 이야기가 되겠구만.”

“어쩌면 회장님께서 생각하시는 것 이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구 회장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래. 동일이 이야기로 뜸은 다 들인 것 같으니, 이제 밥 푸자고. 말해보게.”

“예.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자면, 회장님께서 돈을 좀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예의에 어긋나지만 다소간 맡겨놓은 것을 찾으러 왔다는 식으로 말했다.

일부러 버릇없게 굴려는 의도는 당연히 아니었다.

구 회장은 반평생 동안 구구절절한 사연들에 둘러싸여 살았을 것이다.

- 회장님. 이번 위기만 넘기면 저희 회사, 반드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 이번 총선 이길 자신 있습니다. 회장님이 도와주시면 그 은혜, 반드시 잊지 않겠습니다.

회장님··· 회장님··· 회장님···

구 회장에게 손을 내민 이들은 하나같이 배를 까고 앓는 시늉들을 해대었을 것이다.

익숙한 것은 흥미를 주지 못하는 법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당돌하게 나가자는 계산이었다.

과연 내 예상이 많이 빗나가진 않은 모양이다.

구 회장은 불쾌한 기색은커녕 오히려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얼굴과 얼굴이 가까워지자, 우리 둘은 마치 어떤 음모라도 꾸미는 것 같은 자세가 되었다.

“돈이라. 그것 참 이상하군. 자네라면 차 여사님이 남겨준 막대한 재산이 있지 않은가.”

“예. 할머니가 남겨주신 돈은 한 푼 허투루 쓰지 않고 잘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 보게. 그런데도 돈이 필요하단 말이야?”

도대체 이 젊은 놈이 또 무슨 꿍꿍이속인지.

가늘게 눈을 뜨고 구 회장은 내 속을 읽어보겠다고 연신 노력을 했다.

구 회장의 말은 추궁보다는 호기심에 가까웠다.

“예. 아마도 제가 가진 것으로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자네 대관절 뭘···”

잠시 말을 하려다 멈추고 생각에 잠긴 구 회장.

그는 손을 들어 자기 턱을 얼마 동안 매만지다가 입을 열었다.

“가만 있자··· 내가 BH 인베스트먼트에 묻은 돈이 천억은 되지 아마?”

“예. 지금은 거기에다 300억 조금 안 되게 더 불어나 있습니다.”

“그래. 근래에 내가 돈을 풀었던 것 중에 가장 만족스러웠던 투자야. 아무튼 내가 자네에게 맡긴 돈 아닌가. 용도가 있다면 자유롭게 쓰도록 하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천억 정도는 나에게 쏘겠다는 구 회장의 말이었다.

구 회장이 어디 허술하게 돈을 퍼줄 사람인가?

아들처럼 생각한다는 것이 진심이라는 것과 나를 그렇게나 신뢰하고 있다는 것에 정말 감사했다.

하지만, 나는 그 감사를 배신해야만 했다.

앞으로의 가야 할 길은 천억 정도가 더해지는 것으로는 가뭄에 바가지로 물 뿌리는 정도밖에는 안 된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가 하려는 일은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2조, 어쩌면 그것보다도 더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내 쪽으로 숙여 있던 구 회장이 퍼뜩 뒤로 몸을 물렸다.

마치 알게 되면 반드시 죽어버리고 말게 되는, 그런 끔찍한 저주를 듣기라도 했다는 듯이.

“자네··· 지금 나에게 농담하는 건가?”

“살면서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합니다.”

“2조라고! 내 돈은 은행에 찍히는 숫자와는 달라! 지하 금융에서 2조라면 이 나라의 대통령을 만들 수도 있고, 물러나게 할 수도 있어. 어디 그뿐인가, 악당이 되겠다면 대한민국 국민 전체를 테러할 수 있는 흉악범이 될 수도 있겠지. 뭐, 나라라도 살 생각인가?”

“나라라···”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내 웃음이 서늘하기라도 했던 걸까.

구 회장이 갑자기 한기라도 느낀 것처럼 몸을 움츠렸다.

“예. 회장님. 비슷합니다. 저는 이 나라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기업을 사보려고 합니다. 물론 통째로 사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제가 좌지우지 할 수 있을 만큼은요.”

“내가 아는 영수 군이 맞나 싶군. 자네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 아니었나? 도대체 무슨 기업을? 어디 태상 그룹이라도 사겠다는 소리인가?”

“예. 맞습니다. 태상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마치 우리 둘이 갑작스럽게 우주의 어떤 공간으로 내몰린 것 같은 침묵.

구 회장의 단춧구멍 같은 작은 눈은 이 끝없는 우주의 광대함에 놀랐는지 그 타고난 모양 안에서 커질 대로 커져 있었다.

“··· 진심인가.”

저러다 구 회장이 호흡곤란으로 쓰러지는 것이 아닐까 싶을 때쯤, 그의 말문이 간신히 트였다.

“아까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고개를 좌우로 젖는 구 회장.

“태상 정도 되는 사이즈는 단순히 돈이 있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고왕을 잡았다고 해서 자네가 너무 오만해진 것 아닌가?”

“물론 태상은 정말 큰 기업입니다. 하지만 몸집이 클수록 생각지도 못한 허점이 있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모두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그저 허무맹랑한 포부였다면 오늘 회장님을 뵈러 오지 않았을 겁니다. 저에겐 태상이라는 거대공룡이 입을 열게 만들 재료가 몇 가지 있습니다.”

또다시 숨이 막히는 정적.

“영수 군. 나는 자네를 정말 높이 평가하고 있어. 하지만 자네만을 믿고 빌려주기에는 너무나 큰돈 아닌가? 태상을 먹어 치우겠다는 계획도 내겐 전혀 터무니없게만 들려.”

“··· 회장님께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나는 가슴팍을 뒤져 품 안에서 준비해온 것을 꺼내 들었다.

편지.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바로 그 편지를.

“어찌 저만 믿고 엄청난 액수의 돈을 빌려달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담보를 잡히겠습니다. 이게 저의 담보입니다.”

“이게··· 뭔가?”

얼떨결에 내가 내민 편지를 받아든 구 회장.

그는 편지 봉투를 열어볼 생각도 못 한 채 멀뚱히 나를 바라보았다.

“회장님. 내일이면 대한민국이 뒤집힐 겁니다. 그리고 손에 들고 계신 그것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실탄 준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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