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보이기 시작한 실루엣
“김만수, 그 양반요? 아이고··· 말도 마세요.”
수상쩍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남자.
나는 그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을 이어갔다.
“왜요. 김만수 씨가 무슨 문제라도 있는 사람이었습니까?”
“아이, 나는 몰라. 남 이야기 잘못했다가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도 싫고.”
김만수.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의 이름이었다.
김만수, 그는 다름 아닌 사고를 낸 덤프트럭 운전기사의 이름이었다.
이름의 알게 되자 다른 정보를 찾아내는 것은 어려울 것도 없었다.
약간의 수고로움과 적당한 돈만이 필요했을 뿐.
그렇게 폭우 속 강물처럼 광폭한 행보를 타다 보니 어느새 나는 과거에 김만수가 일했다는 한 화물 업체까지 당도해 있었다.
“그나저나 댁은 뉘슈. 경찰?”
“경찰 아닙니다.”
“그럼 빚쟁이구먼.”
남자는 혀를 쯧쯧 찼다.
그의 말에 눈 주위가 불꽃이라도 튄 듯 뜨거워졌다.
”빚쟁이요? 김만수, 그 사람이 빚을 많이 지기라도 했습니까?”
남자는 고개를 홱 돌렸다.
“난 모른다니까요. 바쁘니까 그만 가보세요.”
나는 가슴팍에서 지갑을 빠르게 꺼냈다.
집히는 대로 돈을 꺼내니 오만원권 서너 장은 되는 것 같았다.
돈이 가진 장점 중 하나는 먼 길을 돌아가지 않게 해준다는 것이다.
남자는 내 손을 슬쩍 흘겨보더니 먹이를 낚아채는 짐승처럼 지폐를 얼른 가로채 갔다.
돈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주변을 훔쳐보던 남자는 큼큼 헛기침하고 말을 이었다.
“문제 많았지. 요것 때문에.”
남자는 나를 향해 화투패를 쪼는 시늉을 해보았다.
“도박··· 이군요.”
“암. 하우스 다니고 카지노 다니고··· 김 씨랑 어울리다가 인생 조진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야. 돈 빌려주고 못 받은 사람들도 있고. 아 참! 그러고 보니.”
남자가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다.
“그러고 보니 김만수, 그 양반이랑 얼마 전에 만난 사람 이야기 들었는데. 조금만 기다리면 금방 돈 다 갚는다고 떵떵거렸다지? 자기가 큰 판에 끼었다고.”
제기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일의 전말이, 그 조각이 조금씩 맞춰지고 있었다.
그것도 나의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방향으로.
내가 이렇게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은 반대로 이 일을 꾸민 자들의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따위 통속적인 이야기가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어렴풋이 실루엣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상대를 향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 * *
“··· 뭐야, 나 알아요? 당신 누구요?”
서울 중부구치소.
나는 김만수를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김만수는 구치소에 수감되기 전까지도 사과는커녕 합의를 위한 작은 노력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리판을 경계로 내 앞에 모를 트고 앉아있는 김만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미결수를 상징하는 누런색 수의를 입고 있는 남자.
그는 길거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얼굴이었다.
불만스럽게 툴툴대는 그에게서 어떤 죄책감 같은 것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아니, 오히려 어떤 점에서는 무언가 홀가분한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수의를 입고 있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게.
“··· 아저씨. 이승우, 알죠.”
“이승우? 그게 누구야. 난 몰라.”
김만수에게서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답이 돌아왔다.
관자놀이께에 핏줄이 벌떡 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우리 둘 사이를 가로막는 유리판을 부숴버리고 멱살을 잡아채고 싶었다.
나는 이를 앙다물고 신음처럼 말했다.
“이승우는··· 당신이 낸 사고의 피해자야.”
“그래서 뭐, 당신 그 사람 가족이라도 돼? 여긴 어떻게 알고 왔는데? 이런 니미!”
김만수는 욕설을 내뱉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교도관, 면회 취소요. 재수 없게··· 시팔.”
“앉아.”
“이런 어린 놈이 반말을 찍찍···”
“천만 원.”
“뭐?”
“시끄럽게 하지 말고 앉아. 나랑 지금 잠깐만 이야기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천만 원 쏴줄 테니까.”
그때, 교도관이 김만수의 곁으로 다가왔다.
“수감번호 12678번. 면회 취소합니까?”
교도관이 김만수의 팔뚝을 잡았다.
잠시 고민하던 김만수.
그는 팔을 흔들어 교도관의 손을 쳐냈다.
“잠깐만요. 이야기 좀 하고··· 가만보니 아는 사람이 맞는 거 같네.”
김만수는 교도관이 멀찍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소 누그러진 말투로.
“진짜 말만 잠깐 하면 천만 원 줄 거요?”
“그래.”
“싸라기 밥만 먹었나. 따박따박 반말을··· 그런데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당신 소문난 도박꾼이라면서? 뻥카인지 아닌지 보면 몰라? 안 믿으면 별수 없지만, 믿어서 당신이 손해 볼 거 없는 거 아닌가?”
“허. 참.”
내 눈을 잠시 응시하던 김만수.
그는 손바닥으로 옷을 탈탈 털더니 자세를 내 쪽으로 고쳐 앉았다.
“왜 합의하러 오지 않았지?”
“이렇게 빵에 있는데 합의는 무슨··· 근데 보아하니 사고 난 차에 타고 있던 사람이랑 관계가 있는 모양인데 나한테 돈을 주겠다고?”
“당신한테 확인받고 싶은 게 있으니까.”
“대관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김만수는 손톱 밑 때를 파며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좋아. 당신이랑 나도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지금부터 판돈을 올릴게. 천만 원에서 1억으로. 조건은 딱 하나. 내가 묻는 것에 사실만, 성실하게 대답해.”
받을 돈이 열 배로 뛰자 김만수의 두 눈이 보름달처럼 똥그래졌다.
“뭐. 좋수다. 까짓것 패 한번 까서 보여주지 뭐. 뭐요, 물어볼게.”
“··· 시킨 사람이 누구야.”
면회 시간은 길지 않고 들어야 할 이야기는 많았다.
나는 달군 칼로 버터를 자르듯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니, 아까부터 자꾸. 시키긴 뭘 시켜.”
“당신이 덤프로 벤츠 밀어버린 거 말이야. 누구 사주를 받았어?”
내 말이 끝나자 김만수는 머리 위로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자리에서 펄쩍 일어났다.
“이 새끼가···”
반사적으로 큰 목소리를 낸 김만수는 뒤에 있는 교도관을 의식했는지 데시벨을 잔뜩 낮췄다.
“뭔 개소리를 자꾸 하는 거야, 지금. 그건 사고였다고 말 그대로 사고!”
“그래. 판사 앞에서 그렇게 말하면 감방에서 두세 달만 썩다가 나올 수 있다고 누군가에게 들었겠지. 석 달 콩밥 먹고 새 삶 살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 테고. 그런데 지금 봐. 냄새를 맡은 사람이 당신을 찾아왔잖아.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 당신 생각대로 일이 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라고.”
“이거 완전 또라이 아니야.”
애써 부정을 하고 있었지만, 김만수의 몸은 거짓을 숨기지 못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의 동공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도박으로 인생을 말아먹었다고 하더니, 왜 그랬는지 알겠군. 눈이 그렇게 흔들리면 속마음이 다 보이잖아.”
“너··· 뭔데.”
“나? 당신이 원래 죽였어야 하는 사람. 원래 그 벤츠에 타고 있었어야 하는 사람!”
나는 죽일듯한 눈으로 김만수를 노려보았다.
“장담하는 데 이걸 그냥 교통사고쯤으로 조용히 넘어가게 가만히 보고 있지 않을 거야.”
김만수는 고개를 돌려 내 눈을 피했다.
손가락으로 제 팔뚝을 불안하게 툭툭 치는 것은 덤.
“판단 잘해. 고작해야 시간문제야.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밝혀지는 것은.”
나는 유리 벽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날 봐.”
최면에라도 걸린 듯 김만수가 고개를 들었다.
김만수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꿈틀거렸다.
“솔직하게 말해. 현명하게 행동하라고. 그럼 최소한 적지 않은 돈이라도 얻게 되겠지. 방금 약속했던 돈은 당장이라도 당신이 원하는 계좌로 쏴줄 테니까.”
그때였다.
“수감번호 12678번 면회 종료.”
교도관이 김만수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쾅-
나는 주먹으로 유리 벽을 때렸다.
“선생님, 이러시면 안···”
“똑똑히 기억해. 당신 때문에 호수를 입에 물고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 그 사람의 이름이 이승우야. 평생을 외롭고 힘들게 살았고, 이제야 비로소 행복의 문 앞에 서 있었어. 당신은 그런 사람의 인생을 박살을 내버린 거야!”
나는 절규하듯 소리를 질렀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반드시 내가 물어본 것의 답을 말해야 할 거야.”
* * *
“··· 그래서 면회하러 온 사람이 누구라고요?”
“이름이 한영수랍디다. 한영수, 사장님이 우리보고 잡으라 했던 그 사람 아니요?”
황 실장은 입을 쩍 벌리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의 목소리가 다시 힘을 찾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뒤지거나 반병신이 되어 있어야 할 새끼가 왜 거기에 가는데!”
황 실장의 호통에도 전화기 건너편의 남자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사장님. 지금, 그걸 저희 탓을 하시면 안 되지요.”
쇳가루를 갈아 넣기라도 한 것 같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 것은 황 실장이 한참을 더 씩씩거린 후였다.
“사장님이 말한 대로 정확히 그 차 였습니다. 알려준 대로 뒤를 본 것뿐이지 않습니까. 뭐, 원하시면 한 번 더 봐 드리겠습니다. 돈만 내시면.”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한영수가 어디 보통 촉이 좋은 놈인가!
한영수라면 이 음모의 덫이 누굴 노리고 있었는지 단박에 알아차렸으리라.
아니, 이미 일이 벌어진 지 며칠 만에 배우를 찾아내 면회까지 갔다고 하지 않는가.
한영수를 상대라면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두 번은 없다.
‘끝났다. 모든 게 끝났어. 그것도 최악으로.’
“설마 한영수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한 건 아닙니까.”
“그거야,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빵안에서 무슨 소리를 씨부렸는지.”
참담하고 조급한 황 실장과는 달리 상대방은 태연자약이었다.
“이봐요. 일이 잘못되면 나만 죽을 거 같아? 당신네도···”
“걱정하지 마십쇼. 사장님. 죽기는 누가 죽습니까. 그때 말했던 대로 조용히 입 다물도록 A/S까지 깔끔하게 해드릴 테니까.”
“뒤탈 안 나게 확실히, 이번에는 제대로 좀 처리하세요.”
거친 목소리의 남자의 말이 무슨 뜻이겠는가.
하지만 이미 황 실장의 누가 죽건 말건 따질 여유가 없었다.
“뭐, 그것도 걱정 마시고.”
쇳소리의 남자는 심드렁하게 황 실장에게 말했다.
“그런데 우리도 좀 알아봤어요. 한영수, 그 사람 보통 사람이 아니던데요. 떠오르는 청년 재벌. 이거 그런 사람의 뒤를 보려 했으니··· 이러면 단가가 맞지 않지요. A/S에다가, 우리 쪽도 위험수당을 생각 안 할 수가 없어요. 큰 거 한 장은 더 얹어 주셔야 계산이 맞겠습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황 실장은 온몸의 피가 모두 끓어 증발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아찔한 기분은 황 실장의 입에서 기어코 거친 욕설이 튀어나오게 했다.
“이런 시팔! 알았으니까 제대로 처리나 하라고.”
그는 신경질적으로 전화기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황 실장.
그는 모든 체면을 벗어던지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 싶었다.
‘어디 가서 목이라도 매달아야 하는 것인가.’
일이 이 지경까지 왔으니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살아 있으면 뭐 하겠는가, 장은수가 경고했던 대로 앞으로 남은 것은 그가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고통 뿐일 텐데.
하지만 황 실장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그들을 두고 아주 먼 곳으로 떠날 용기는 더더욱 없는 그였다.
황 실장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서 휴대전화를 주워 들었다.
어쨌든, 아직 그에게는 할 일이 남아있었다.
휴대전화의 액정은 지금 황 실장의 심정과 같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있었다.
“예. 회장님··· 저 황상규 실장입니다.”
사형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죄수의 심정으로, 황 실장은 장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각자의 다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