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67화 (178/200)

167. 파국 (1)

“이야. 확실히 벽 밀어버리니까 공간이 시원시원하네.”

여기는 이승우의 가게 ‘만리향’

예고했던 공사를 마치고 승우 녀석이 나를 호출했다.

“그렇지? 저쪽에는 테이블을 놓고 주방도 확장할 생각이야. 그리고···”

이승우는 아직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나에게 입에 침을 튀기며 계획을 설명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슬며시 웃음이 났다.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나에게 그 당시에 한참 유행이던 나이키 운동화를 샀다고 자랑하던 학창 시절 승우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비어있다는 것은 채울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

지금 승우의 얼굴이 희망으로 빛나고 있는 것은.

“허락해줘서 정말 고맙다.”

“네가 하고 싶다는데 어쩌겠냐. 들어줘야지. 이젠 진짜 은주랑 둘이서는 무리겠다. 사람 써야지.”

“응. 그래야지. 종업원 구하려고. 요즘 인건비가 보통이 아니라는데, 벌써 골치 아프다. 가뜩이나 사람들 식당 같은 곳에서 일 안 하려고 한다던데.”

“네가 인상만 안 쓰고 있으면 돼. 참··· 승우, 너는 보면 볼수록 얼굴 살벌하다. 진짜.”

우리는 가까운 사이이기에 할 수 있는 농담을 하며 함께 낄낄거렸다.

“야. 난 너랑 달라서 인상이라도 써야 무게감이 있어 보이거든? 이 얼굴에 실실대고 있어 봐.”

“그나저나 그럼 이제 사장님 소리 듣는 거네. 이승우 사장님! 이야···”

“쳇.”

이승우가 잠시 혀를 찼다.

“아무리 그래도 너만 하겠냐. 난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내 친구가 그렇게 큰 기업의 회장이라니.”

이승우가 내 목에 팔을 둘러 헤드록을 걸었다.

“야··· 이때가 아니면 내가 재벌 목을 언제 졸라 보겠냐. 너 이제 높은 사람 되었다고 변하지 마라.”

변하지 마라.

사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어쩌면 승우에게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함구한 것은 그것을 말했을 때 우리의 사이가 달라질까 봐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살다보면 종종 듣게 되는 이야기 아닌가.

갑자기 누군가 큰 돈이 생기자 피를 나눈 가족들도 원수가 되고, 심지어 살인까지 벌어지고는 한다는.

서먹해지거나, 아니면 그 돈이라는 놈 때문에 위, 아래가 있는 사이로 갈라지거나.

혹시라도 승우가 그렇게 되는 일만은 없길 바랐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나의 못난 생각이었다.

승우는 여전했다.

내가 고왕 건설이라는, 사람들이 말하길 그래도 큰 회사라는 그곳의 회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에도 날 대하는 승우의 태도는 한치의 변함도 없었다.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 일인가.

“아무튼 여기 서 있자니, 감회에 젖지 않을 수가 없네.”

내 목을 감고 있던 팔을 풀며 승우가 갑자기 나지막하게 욕설을 뱉었다.

2와 9를 곱하면 나오는 그 숫자와 유사한 발음의 욕을.

“코딱지만 한 방을 너랑 나누어 쓰면서 이층침대 위, 아래로 자던 게 어제 같은데... 그 방도 우리 고등학교 올라가고 나서야 생긴 거잖아. 그래, 우리 성공한 거 맞지?”

“야. 신부님이 들으시면 섭섭해하시겠다.”

“아니, 갑자기 신부님 이야기가 왜 나와. 새끼가 갑자기 나 나쁜 사람 만드네.”

이승우는 종주먹을 들어 나에게 장난스럽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나저나, 나도 너희 회사 인터넷에서 좀 찾아봤어. 정말로 너희 회사가 그 에메랄드인지 다이아몬드인지 카타르에 도시를 지으러 가는 거야?”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

“내가 기사 찾아보니까, 그 도시 짓는데 카타르에서 무려 1,000조를 쏟아붓는다면서? 와··· 진짜 미쳤다. 미쳤어.”

“땅은 작고, 돈은 많은 나라야. 가진 것으로 부족한 것을 채우고 싶은 욕망이야 당연한 것 아니겠어?”

“너희 회사가 거기서 1%만 먹어도··· 그것도 대단한 거 맞지?”

나는 씩 웃으며 팔을 들어 승우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승우의 몸에서 따듯한 온기와 익숙한 몸 냄새가 전해졌다.

“이왕 칼을 뽑은 거 1%보다는 더해야지. 이젠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많아. 그래··· 그들을 다 먹여 살리려면 1%로는 부족하지.”

이승우가 슬쩍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새삼스럽게 내 얼굴을 빤히 보던 그는 손가락으로 자기 코 밑을 매만졌다.

“새끼··· 좀 멋있다?”

확실히.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 시선의 넓이가 드라마틱하게 확장되었다.

고아, 변변치 못한 학력, 남들 앞에서 번듯하다고 말하기엔 부족한 직업까지.

새장 같던 그 틀에서 빠져나오자 놀랍게도 내 앞에 펼쳐진 세상은 무한했다.

실상 나는 무엇이라도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 생각의 변화가 오랜 친구의 눈에도 내가 뭔가 달라 보이게 만들었는가 보다.

그때, 승우가 내 품을 빠져나가며 박수를 쳤다.

문득 무언가 생각이라도 났다는 듯이.

“야, 맞다! 나 이번에 적금 하나 끝나는 거 있는데 너희 회사 주식 좀 사볼까 봐.”

“··· 주식?”

나는 친구의 입에서 주식을 해볼까 하는 말이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승우는 목에 칼이 와도 그런 소리를 할 녀석이 아니었다.

뭐, 주식을 도박이라고 생각한다거나 투자했다가 돈을 잃을까 겁이 난다는 그런 흔한 이유 때문이 아니다.

주식과 관련해서 승우에게는 아픈 사연이 있다.

승우의 아버지는 녀석이 코흘리개 시절 묻지 마 주식 투자로 전 재산을 날렸다고 한다.

아니, 전 재산을 그저 날리기만 했으면 다행이지 어디서 돈을 빌렸는지 늘 험악한 사람들이 찾아와 문을 쾅쾅 두들겨댔다고 한다.

빈집을 혼자 지키고 있었을 꼬마 승우에게 그것이 얼마나 큰 공포였을지···

그래서 지금도 이승우는 누가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문을 주먹으로 두들기는 걸 참기 힘들어한다.

이어 말하자면 한 가정이 풍비박산이 나고, 그때부터 승우의 아버지는 늘 술에 절어 있었다고 한다.

불쌍한 모자(母子) 가혹한 매질을 하고···

결국 그것을 도저히 버티지 못한 승우의 어머니가 어린 자식을 버리고 도망까지 쳐버리게 된다.

이런 사정이 있으니 주식이라는 건 이승우에게 지독한 악당과 다름없으리라.

그의 인생에 아주 커다란 불행의 낙서를 해놓은.

“야, 너 주식이라면···”

나는 하려던 말을 목 안으로 다시 삼켰다.

굳이 녀석의 아픈 기억을 들추는 꼴이 될까 봐.

그래서 그냥 말을 돌렸다.

하지만 오랜 친구답게 승우는 내가 숨기려던 말을 단박에 알아챘다.

“그래. 아주 이가 갈리지. 그런데···”

이승우는 주먹을 쥐어 내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내 친구 회사잖아. 나도 주주가 되어서 개미 눈곱만치라도 힘이 되어 주어야지.”

자식, 진짜···

콧잔등이 시큰하다.

“···뭐, 평생 받을 배당금을 미리 다 땡겨 받기도 했고.”

승우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차 키를 꺼내 내 눈앞에 흔들었다.

내가 선물해준 그 차의 열쇠를.

“내가 요즘 진짜 아침에 눈 뜨자마자 주차장부터 내려가 본다. 혹시라도 차에 기스라도 나 있을까 봐. 흐흐흐···”

저리도 좋아하니 참 다행이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친우의 결혼 소식에 너무 기뻤던 나머지 차 키를 넘기긴 했지만, 내가 타던 물건 아닌가.

차라리 하나 새로 뽑아 줄걸···

누군가는 미쳤냐고 할지 모르지만, 난 이제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승우는 나에게 그런 것을 받아도 되는 사람이다.

“그나저나 은주가 뭐라고 안 해?”

결혼할 여자친구 이야기가 나오자 이승우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 은주는 몰라. 그냥 네가 안 타는 차라고 빌려줬다고 했는데··· 걔가 차를 잘 모르는 애라서 다행이지 이 차 가격 알게 되면···”

이승우는 끅━ 소리를 내며 엄지손가락으로 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이거 참, 무슨 도둑질이라도 한 것처럼 거짓말을 나도 모르게 해버렸단 말이지.”

“큰일이 났네.”

“몰라. 나중에 은주도 네가 누군지 제대로 알게 되면, 그때 말 좀 잘 해줘.”

“나도 몰라. 네가 내 허락도 없이 몰래 가져가서 탔다고 말할 거야.”

“아! 새끼야···”

괜히 엄살을 부리는 시늉을 하는 승우.

나는 그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승우야.

넌 내 고향이다.

언제나 지금처럼 함께 하자.

* * *

송림 프라자 건너편 갓길에 주차된 차량.

그 차 안에는 한 남자가 타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음지에 살 것 같은 험악한 인상의 사내.

단순히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사람이라면 응당 살아온 삶의 궤적에 따라 몸에 배는 분위기가 있기 마련이다.

이 남자에게서는 보통 사람이라면 고개를 바로 돌릴 것 같은 그런 냄새가 풍겼다.

살벌한 피비린내가.

남자는 아까부터 송림 프라자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웅━ 웅━

조수석에서 남자의 휴대전화가 정적을 찢었다.

남자는 휴대전화 액정에는 ‘발신자표시제한’이라는 문구가 떠 있었다.

“여보세요.”

얼굴만큼이나 남자의 목소리로도 그가 위험한 사람임을 짐작하기 충분했다.

낮게 깔린 그 소리에는 쇳소리가 잔뜩 섞여 있었다.

“··· 나요.”

남자의 전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음성.

그건 다름 아닌 황 실장의 목소리였다.

“예. 그렇지 않아도, 지금 송림 프라자 앞에 와 있습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갔습니까.”

“예. 방금 1층에서 다른 남자 한 명과 나오는 걸 봤습니다.”

“어떻게, 진행할까요.”

황 실장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남자 역시 황 실장을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한 손에는 전화기를 든 채, 남자는 담배를 물고 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가 반쯤 타들어 갈 때쯤, 다시 황 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차는, 차는 제대로 확인했습니까?”

“예. 뒷번호 XXXX. 검정 벤츠. 아까 지하 주차장에 들어가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배우는 확실히 구한 거요?”

황 실장은 계속해서 남자를 추궁했다.

만에 하나라도, 아주 작은 실수라도 있어선 안 된다는 걸 그렇게라도 강조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 어쩌면 자신이 하려는 일을 지금이라도 멈추고 싶다는 그의 무의식이 그런 말들을 내뱉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뭐가 되었든 이제와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깨진 컵이다.

열차는 달리기 시작했다.

이걸 멈출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황 실장이 스스로 선로 위에 몸을 던지는 것뿐이다.

“정선에서 가진 것 다 탕진하고 사채 빚밖에 안 남은 인간입니다. 아마 밖이 지옥이요, 학교가 천국일 겁니다. 거기다 제 빚까지 다 갚아준다니···”

남자는 차창 밖으로 담뱃불을 튀겨 껐다.

“뭐··· 그래봐야, 빵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다시 카지노로 달려갈 테지만···”

“입막음은?”

“걱정이 많으시군요.”

남자의 입이 벌어지며 송곳니가 드러났다.

“일이, 일이니까.”

“만약 일이 틀어지면 우리 쪽에서 배우 입을 막겠습니다. 영원히 입을 열지 못하도록··· 그러니까 마음 푹 놓으셔도 됩니다.”

“...”

수화기 너머에서 작게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선금 보내겠습니다. 나머지는 일 끝나고 처리합시다.”

전화가 끊어졌다.

남자는 대충 전화기를 조수석에 다시 던지고, 운전석에 몸을 깊숙이 눕혔다.

이 사내는 참을성이 좋은 축에 속하는 모양이었다.

그 자세로 그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미동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의 기다림이 마침내 결실을 보았다.

몸을 벌떡 일으킨 남자의 눈앞에 검은색 차량이 주차장 통로를 빠져나오고는 모습이 보였다.

지체없이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남자.

“··· 그래. 지금 건물 나왔어. 일단 내가 뒤를 쫓다가 신호 줄 테니까, 그때 밀어버려. ··· 당연하지. 그건 걱정하지 마시고.

파국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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