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발각 (2)
황 실장에게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장은수가 자신의 일탈을 눈치를 챈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야생에서 동물들은 천적을 만나면 순간적으로 온몸이 굳곤 한다.
인간이 아무리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들, 거기서 얼마나 다를까.
황 실장의 의지와는 무관하게도 잔뜩 경직된 몸과 머리는 이 상황을 타개할 그럴듯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저 아래는 천 길 낭떠러지.
누군가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만든 것 같은 고작 손바닥 한 뼘 폭의 교량에 의지해 앞을 걷는 것 같은 기분.
지금 당장 어떤 말을 한다고 해도 장은수의 손아귀를 빠져나갈 길이 요원해 보였다.
그래서 황 실장은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황상규.”
사나운 짐승이 으르렁대듯 장은수가 황 실장의 이름을 불렀다.
황상규 실장이 대답조차 제대로 못 하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그는 잔뜩 구겨진 사진 한 장을 테이블 위에 집어 던졌다.
사진을 집어 든 황 실장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다.
살면서 누구나 한번은 피할 수 없는 경험이 있다.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자신이 믿는 신을 찾거나, 머릿속 혹은 입 밖으로 비명과 같은 불길한 말을 내지르는 것.
‘X 됐구나.’
이를테면 이런 천박한 욕설 말이다.
지금 황 실장이 딱 그 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장은수 회장이··· 어떻게 이 사진을··· 어디서 샌 거지.’
심부름꾼들은 황 실장의 정체는 물론이요, 한영수가 누구인지, 왜 꽁지를 붙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황 실장에게 그들이 이것저것 농지거리를 던졌던 걸 떠올려보면 한영수를 그저 좋은 직장을 다니는 불륜남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떠올릴 수 있는 알고리즘으로는 어떠한 경로로도 이 사진이 장은수의 손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나한테도 사람을 붙인 거야.’
그의 뒤를 본지가 어디 하루 이틀인가.
황 실장은 장은수를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충분히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명백한 착각이었다.
황 실장은 당장이라도 자기 목을 제 손으로 조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 회장님. 어떻게 전해드려야 할지 고민하던 참이었습니다. 워낙에 중대한···”
“장은호는 널 받아주지 않아.”
딱 잘라 단언하는 장은수.
황 실장은 어떻게든 생각할 시간을 벌어보려고 했다.
그래서 나오는 대로 변명을 내뱉었다.
하지만 장은수의 섬뜩한 눈과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회장님.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냅다 장은수 앞에 무릎을 꿇는 황 실장.
“··· 역시 내 짐작이 맞았군. 이 사진이 나한테 안 왔다면, 네가 갈 곳이라 봐야 거기밖에 없지.”
‘이런··· 제기랄.’
황 실장은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실제로 그는 한 손을 들어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장은수 회장은 내가 장은호 회장을 만난 건 모르고 있었어···’
어쩌면 잘 피해 갈 수도 있었다.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무릎을 바침으로써 날려버린 황 실장이었다.
“한영수도 만났나?”
“아닙니다. 회장님··· 한영수는 아닙니다.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습니다. 예··· 미쳤었습니다.”
“상규야.”
“예. 회장님.”
“머리 들어.”
장은수의 말에 황 실장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의 차이라야 고작해야 1M나 되겠는가.
그런데도 황 실장은 저 절벽 꼭대기에서 장은수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네가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쥐새끼처럼 사생아 뒤를 쫓다 보니까, 너도 그 사생아에게 감화라도 된 거야?”
“아닙니다.”
“아니면, 계산기 두들겨보더니 내가 총수가 못 되기라도 할 것 같았나? 그래서 은호 쪽에 붙으려고?”
흐흐흐━
장은수가 음산하게 웃었다.
“쓰레기나 치우라 했더니, 그걸 뒤져서 남에게 가져다 팔려고 하는군. 그런데 발상에 비해 수를 읽는 건 형편없어. 내 동생 장은호는 절대로 네가 주워간 쓰레기를 살 위인이 아니야. 그런 음험함이 없기 때문에 그 새끼는 총수가 될 수가 없어. 밝은 태양 아래서만 일이 된다고 믿는 순진해 빠진!”
뭐가 재밌는지 장은수는 연신 끅끅 웃었다.
“아니야··· 이렇게 뒤에서 몰래 사생아랑 편을 짜는 걸 보니, 다시 봐야겠어. 내 동생!”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이 판을 설계할 수 있다는 야망을 불태우던 황 실장.
그의 두 주먹이 자기 무릎 위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지금 그는 그야말로 한 마리의 나약한 생물에 불과했다.
“자, 일단 그쪽 일은 나도 생각 좀 해보고. 우선 내가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황 실장의 머릿속에 미국에 있는 딸과 아내가 떠올랐다.
그들 때문에 온갖 더러운 일도 다 참고 여기까지 온 건데···
‘이대로 끝날 수는 없어.’
장은수가 손가락을 부딪쳐 딱━ 딱━ 소리를 냈다.
“황 실장이 이렇게 대답이 느렸던 적이 있나? 왜··· 가족들 얼굴이라도 떠오르나?”
오늘 장은수는 마치 작두라도 탄 것 같았다.
아니, 그 역시도 일대의 걸물이라는 장영복의 적자.
남의 속을 들여다보고 그림을 그리는 데 부족함이 있을 리가 없었다.
“가족들 때문이었다고 합리화 하지 마. 넌 너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내 밑에서 여태껏 일해온 거야. 오히려 네 가족은 피해자지. 그들이 뭘 알겠어? 은혜를 모르는 가장의 병신 같은 짓거리 때문에 장밋빛 미래가 산산조각이 났다는 걸.”
마음 같아서야 황 실장을 어딘가에 고기밥으로 뿌려버리고 싶은 장은수였다.
실제로 그렇게 못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장은수는 황 실장에게 자신이 해줄 수 없는 최선의 자비를 베풀어주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황 실장에게 어떤 정이 남았기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총수 선출을 위한 사장단 회의가 얼마 남지 않았다.
어디 장은수에게 있어서 황 실장의 목숨 따위가 그것이 더 중요하랴.
이 중요한 시기에 더럽고 잔혹한 일을 해치우기 위해 또 다른 누군가의 손을 빌리고 싶은 마음이 없는 장은수였다.
“··· 회장님.”
그때, 황 실장이 입을 열었다.
영원처럼 길었던 침묵이 깨진 것이다.
“저는 태상 그룹의 그 누구보다도 회장님의 약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막대한 상속세를 벌충하기 위해 만든 비자금 계좌. 그것의 행방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벼랑 끝에 몰린 황 실장.
그가 선택한 것은 도박이었다.
그것도 아주 위험한.
“제가 회장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한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실 겁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입 밖에 낼 수 없는 일들까지 말입니다. 아까, 장은호 회장님은 쓰레기를 사주지 않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한영수라면 어떨 것 같으십니까?”
장은수는 눈을 부릅떴다.
늘 가늘게 눈을 뜨는 그로서는 잘 보여주는 일이 없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황 실장의 목을 따버릴 것 같던 살기가 지나가고 모두가 예상치 못했던 반전이 일어났다.
“하하하하━”
장은수는 웃었다.
그것도 고개까지 젖혀가며 아주 크게.
“황상규. 고맙다. 정말 고마워.”
황 실장의 협박.
그것은 장은수에게 있어 가소로운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말을 듣자 장은수는 황 실장을 정리해 버릴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런 연유로 지금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고맙다는 말을 한 것이었다.
“비자금이라. 그거 액수가 얼마나 되지?”
“7천억입니다.”
“7천억이라. 정말 큰 돈이군.”
톡━ 톡━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치는 장은수.
그의 입에서 황 실장은 생각도 못 한 뜻밖의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혼자서 많이도 해 드셨군. 회삿돈을 그렇게 횡령하다니.”
“··· 예?”
“난 황 실장이 말하는 그 돈. 만져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데.”
황 실장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마치 이 공간이 빛이라고는 조금도 들지 않는 컴컴한 암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장은수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
그 비자금을 몇 번 세탁기를 돌리고, 페이퍼 컴퍼니를 하나 거쳐 저 멀리 외국의 은행에 보관하기까지 모든 과정에 주도적으로 손을 댄 것은 바로 황 실장이었으니까.
그 돈의 출처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아니 설령 증명 할 수 있다고 해도 그를 향해 겹겹이 쳐질 거미줄을 모두 빠져나갈 방법이 있기나 할까.
장은수를 위협할 수 있는 무기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자기를 찌르게 될 줄이야!
“회장님··· 하지만 그건···”
“아무도 믿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 이걸 어쩐다. 그 믿지 못 할 말을 믿게 할 수 있는 것이 너와 나의 차이인 것을. 내가 장담하지. 머리가 온통 하얘질 때까지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게 될 거라는 걸.”
황 실장의 눈앞에 백발이 된 자신이 쓸쓸히 출소하는 모습이 선하게 그려졌다.
재산도, 가족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그것은 그가 꿈에서라도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끔찍한 말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단지 상상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공포가 순식간에 황 실장을 마비시켰다.
“회장님. 살려주십시오.”
황 실장은 머리를 바닥에 대고 넙죽 엎드렸다.
“왜 나한테 살려달라고 하지? 그 입으로 잘도 떠들던데. 한영수를 찾아가겠다면서. 어디 찾아가 봐. 혹시 알아? 그 대단한 사생아 새끼에게는 하늘도 놀라게 할 뭔가 신묘한 수라도 있을지.”
비웃음이 9할인 말을 남긴 채 장은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받아들여. 자기가 한 일의 책임을 져야지. 그리고 하나 더··· 너에게 있을 수 있는 최악이 절대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명심해. 여기서 어떻게든 살아나가 보겠다고 또 지랄을 하면··· 굳이 보지 않아도 될 더 지독한 비극을 보게 되겠지.”
“회장님.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이 황상규가 아직 회장님에게 쓸모가 있다는 것을 증명 해보겠습니다.”
“황 실장··· 상규야.”
장은수는 무릎을 접고 몸을 낮춰 황 실장과 시선의 높이를 맞췄다.
황 실장은 그 눈을 차마 마주 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여전히 땅바닥에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넌 항상 쓸모 있었어. 정말로. 그런데 쓸모라는 말속에는 어떤 뜻이 있는 줄 알아?”
비죽이 웃는 장은수.
“언제든지 대체 할 수 있다는 거야. 내가 설마 널 대신할 사람을 못 구할까?”
“회장님··· 제발···”
“그동안 수고 많았어.”
장은수는 몸을 일으켜 황 실장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때, 장은수의 등 뒤로 황 실장의 절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한영수! 회장님의 눈엣가시나 다름없는 한영수를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현관을 향해 걸어가던 장은수의 발걸음이 멈췄다.
“네가? 글쎄··· 비록 밑바닥 인생을 살던 새끼지만, 네가 한영수를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드는데. 인정해줄 건 인정해야지. 한영수, 장영복의 자식이 틀림없는 것은 확실해.”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장은수는 여전히 몸을 앞을 향한 채 입을 열었다.
“황 실장. 너는 최근에 바보 같은 어린애처럼 손에 쥔 걸 전부 망가트렸지. 너답지 않았어. 정말로.”
황 실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네가 한 말은 난 못 들은 걸로 하지.”
황 실장은 지금 장은수가 하는 말의 뜻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파국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