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시멘트 대란 (3)
‘정일 시멘트’
우리가 방문한 이 시멘트 업체의 상호였다.
산을 깎아 만든 커다란 부지에 자리를 잡은 이 회사의 광경은 여러 가지 의미로 제법 볼 만했다.
우리가 흔히 레미콘 차라고 부르는 믹서트럭이 늘어서 있는 가운데 거대 구조물들이 부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구조물들은 내부에서 많은 열에너지를 쓰고 있는지 허연 김을 힘차게 뿜어내고 있었다.
이런 광경을 어디서 보았더라?
그래. 맞아.
이곳은 마치 사이버 펑크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사무실 건물 앞에 차를 대고 내리자, 회사 점퍼를 입은 이들이 미리 앞에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괜스레 민망해졌다.
자칫 오만해 보인다는 인상을 심어줄까 행동을 유독 조심히 했다.
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나는 그들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그때, 정일 시멘트의 무리 중 가장 젊은 사람 한 명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나이라고 해야 내 또래 정도일까?
“안녕하세요. 회장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곽호열이라고 합니다.”
“아, 예. 한영수입니다.”
통상 가장 기초적인 사회적 인사가 되는 것은 악수.
그런데 어쩐 일인지, 곽호열은 슈트 차림의 나를 부러운 눈으로 잠시 보더니, 자기 점퍼 소매 끝만 매만졌다.
“사장님이 안 보이시네요?”
그때, 이종현 사장이 일행들을 두리번거리다 입을 열었다.
“아... 그게.”
나이 지긋해 보이는 직원이 몸을 숙이며 말했다.
“사장님은 잠시 밖에 나가셔서. 연락드렸습니다. 금방 들어오실 겁니다. 그 대신에 여기 곽호열 영업부장님이 나오셨습니다. 곽한용 사장님의 아드님이 되시기도 하지요.”
이곳의 사장과 안면이 있는 이종현 사장이 반가운 눈빛으로 곽호열을 바라보았다.
“아... 어쩐지 성 씨가 같다고 했습니다. 흔치 않은 성 씨인데. 가만 보니, 아닌 게 아니라 회장님을 많이 닮으셨습니다. 하하.”
“아... 예.”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에 곽호열의 얼굴은 썩 밝지 않았다.
어디 그뿐이랴.
이종현 사장과 인사를 하기 전에 곽호열의 입이 소리 없이 달싹거리는 것을 나는 분명히 읽었다.
- 부장은 무슨...
여하튼, 서로 간의 인사가 얼추 정리되자 정일 시멘트 일행은 우리를 안으로 안내하려고 했다.
“저, 실례가 아니라면.”
그들이 우르르 발걸음을 옮길 때, 내가 입을 열었다.
“잠깐 공장을 돌아보고 싶습니다. 생각보다 부지가 엄청나게 커서 놀랐습니다.”
“아... 그러시면 직원에게 안내를... 아닙니다. 제가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선뜻 내 쪽으로 다가오는 곽호열을 향해 나는 손을 들어 보였다.
“아닙니다. 괜히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그저 산책하듯 돌아보고 싶습니다. 시멘트 공장 안에는 처음 들어와 봤는데, 거대함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시면 이걸... 불편하시겠지만, 안전을 위해서라도 착용 하셔야 합니다.”
무언가에 다소 불만이 있어 보였지만, 기본적으로 곽호열은 공손한 남자였다.
그는 나에게 방진 마스크와 안전 헬멧을 건넸다.
내 지금 복장과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조합.
그래도 여길 돌아보고 싶다고 한 건 나였으니, 당연히 여기의 룰을 따라야겠지.
그렇게 공장 터를 돌아보던 참이었다.
나는 이 공장 부지의 딱 중앙쯤에 있는 거대한 구조물 앞에 섰다.
거대한 포탄을 여러 개 겹쳐 놓은 것 같은, 혹은 공상 영화 속 우주 함선의 엔진 같은.
무슨 용도인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리라는 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구조물이었다.
그 구조물에서 커다란 연통들이 뻗어나가고 있었으니.
하얀 증기를 간헐적으로 뱉어내는 그 구조물을 올려다보고 있었을 때였다.
“소성로야.”
낯선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내 옆에는 딱 내 어깨 정도 키의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쿵쾅거리는 기계 소리에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남자는 내 시선과 별개로 정면의 소성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양복쟁이가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나.”
무뚝뚝한 말투의 남자를 잠시 바라보다 그의 정체가 짐작되어 빙그레 웃었다.
“사장님을 뵈려고 왔습니다. 반갑습니다. 곽한용 사장님. 고왕 건설의 한영수입니다.”
“허, 초면이신데, 나를 어떻게 알아보셨는가?”
“제가 잠시 여길 돌아다녔는데, 직원분들이 절 보고 슬슬 피하시더군요. 이해는 됩니다. 영 어울리지 않는 복장을 하고 있으니 이상하게 보였겠지요. 그런데 그런 이상한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오신 걸 보고 짐작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마스크 속에서 입술을 올려 미소 지었다.
“저, 소성로라는 걸 보는 눈에서 애정이 넘치시던걸요.”
곽 사장은 ‘이놈 봐라.’라는 눈으로 나를 잠시 쳐다보았다.
“그런데, 사장님. 소성로라고 하셨지요. 꼭 살아있는 생명체 같아요. 쉭쉭 계속 김을 내뿜는 걸 보면.”
“살아있는 생명체라... 제법 그럴듯한 표현이구만. 실상 이곳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지. 그것도 아주 뜨거운. 저 소성로는 온도를 1,500도를 유지해야 해.”
“1,500도요?”
“그래. 시멘트 제조용 원료를 저기다가 넣고 고온에서 구워버리는 거야. 그럼 클링커라는 게 나오지. 그 클링커에 석회를 첨가해서 분쇄하면 시멘트가 되는 거라고.”
굳은 시멘트처럼 말투는 딱딱했지만, 곽 사장은 알아듣기 쉽게 나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스타일은 전혀 다르지만, 그를 보니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정실 전자의 이신재 사장.
아닌 게 아니라 기름때가 묻어 있는 손까지도 똑같았다.
“자네 이야기에 대해서는 건너 건너 들었어. 이 바닥에서 요즘 아주 소문이 무성하더구먼. 대단한 자산가라지?”
“소문이라는 건 언제나 부풀려지기 마련이지요.”
“이 건설 업계라는 게 보통이 아니야. 돈이 많다고 만만하게 생각했다간 큰코다칠 걸세. 자네, 시멘트 포대나 만져본 적이나 있는가?”
곽 사장은 나를 철없는 귀공자쯤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그의 정 없는 오해를 풀어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져볼 뿐이었겠습니까. 저 곰방으로 학비며, 생활비며 다 벌었습니다. 시멘트 포대 2개씩 얹고 5층까지 올라가고 그랬는걸요.”
“곰방? 자네가 그 힘든 일을 했다고?”
“네. 방학 때마다 매번.”
곽한용 사장의 표정이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자네도 사연이 보통이 아닌가 보구만.”
“들어가시죠. 기왕 여기까지 온 거, 그렇게 만만치 않은 건설 업계에 대해서 사장님께 좋은 말씀 많이 듣겠습니다.”
* * *
“아니... 어떻게 두 분이 함께.”
곽 사장과 나는 각자를 위해 비어 있는 자리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곽 사장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그의 아들 곽호열이 아버지의 귀에다 대고 무언가 속삭였다.
아마도 우리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지, 귓속말하던 와중에 곽호열은 나와 눈이 적어도 세 번은 마주쳤던 것 같다.
곽 사장은 장승같이 퉁명스러운 얼굴로 아들의 말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얼마간, 가벼운 담화가 지나가고 본론을 연 것은 이종현 사장의 입이었다.
“오늘 저희가 정일 시멘트를 찾아뵌 것은, 업계 동반자로서 상호 발전적인 파트너십을 맺고자 함입니다. 각설하자면, 고왕 건설은 시멘트 수급 불안 문제를 해결하고 정일 시멘트는 공급처 확대를 통해 상호 간의 이익을 충분히 도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은 좋지만, 실상 우리보고 고왕 건설이 하도급이 되라는 소리 아니요.”
비즈니스 자리에서 으레 갖춰야 할 예의쯤은 신경 안 쓴다는 투의 말투.
원래 성격이 유한 편은 아닌 것 같지만, 왜인지 곽 사장의 태도에는 유난한 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종현 사장 역시 프로 중의 프로.
온화한 얼굴로 곽 사장의 말을 받아쳤다.
“사장님. 아주 오래전에 말씀하셨지요. 최고의 기업이라면 쓰는 재료도 최고를 쓰라고. 때마침 고왕 건설은 최고가 되려고 과거의 허물을 벗는 중입니다.”
“오래전 이야기를 기억해줘서 고맙다만, 우리는 이제 이 업계에서 명함도 못 내미는 수준이 되었소. 세상 이치라는 게 그런 거지. 국가 산업 역군으로 박수받다가,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손가락질받는 이 시멘트 업계처럼.”
“여전히 시멘트는 근간 산업입니다. 그건 부정할 수가 없지요.”
끙 -
곽 사장은 이종현 사장의 말에 더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정적.
그 정적을 참기 힘들었는지 곽호열을 입을 열려고 할 때, 곽한용 사장이 아들의 손목을 슬쩍 잡았다.
“미안하지만, 앞으로 나는 대기업과 함께 뭘 할 생각이 없소. 고왕 건설이 아니라, 어디라도.”
“아버지!”
곽호열이 얼굴이 벌게져 목소리를 높였다.
“왜 자꾸 독불장군처럼 그러시는 거예요. 좋은 말씀 하시는 데 더 들어볼 수는 있는 거잖아요.”
“호열이 너는 가만히 있어라.”
“아니요. 자꾸 자잘한 대금들 목 빠져라 기다리기만 하잖아요. 회사 생각도 하셔야지요. 큰 곳이랑 연을 맺어야 돈도 제때 도는 거라고요.”
“그 큰 건설사들이랑 일을 하다가 무슨 망신을 당했니? 벌써 태상 건설 일을 잊은 거야?”
곽 사장은 슬쩍 우리 눈치를 보더니, 소란스럽게 해서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아마도 회사 운영을 놓고 부자간에 해묵은 갈등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태상 건설이라고?
“사장님, 혹시 태상 건설과 정일 시멘트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글쎄요. 사실 두 회사는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사이입니다. 장영복 회장님께서는 시멘트는 무조건 정일 것을 최우선으로 쓰라고 하셨었으니까요. 그런데 이거, 아무래도 뭔 일이 있기는 있었던 모양입니다.”
내가 이종현 사장과 작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두 부자 간의 온도도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그 틈을 타 곽 사장에게 말을 걸었다.
“사장님. 한번 여쭙고 싶습니다. 도대체 왜 대기업과는 다시는 일을 하지 않으시겠다는 건지요.”
“말하기도 낯 뜨거운 일이지. 태상 건설에 들어가는 레미콘 업체에서 단가를 낮춰달라고 하더군. 우리도 최대한 맞춰주려고 노력했어.”
곽 사장의 눈썹이 파도처럼 춤을 췄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가격이 문제가 아니었더군. 짬짜미 같이 못된 짓거리나 하는 업체들이 태상과 붙은 거야. 그자들에게 항상 비협조적이었던 우리는 당연히 눈엣가시였겠지. 우스운 게 뭔지 아나? 태상과 거래가 끊기기가 무섭게 공정위며, 환경부, 지자체까지. 그렇게 우리를 들쑤시고 난리들을 쳤어.”
곽 사장이 이상하리만치 나와 이종현 사장을 향해 방어적인 태도로 나온 것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자네들이야 우리 말고도 물건 받을 곳이 천지 아니겠는가. 지금 시멘트 품귀라고 해봐야 진짜 죽을 맛인 건 지방의 작은 공사 현장들이지. 난 차라리 그치들에게 물건을 대겠냬.”
장은수가 뿌린 부덕의 씨앗이 여기까지 퍼져 있었구나.
하지만 지금 곽한용 사장은 오해를 하고 있었다.
마치 나를 그저 철부지 자산가로 보았던 것처럼.
“사장님. 한 말씀만 드리자면... 사장님이 말씀하시는 그들에서 저희 고왕 건설은 빼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못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큰 회사라면 이제 다 똑같이 보이네그려.”
“저는 기업의 규모가 위치를 결정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제가 여기 온 것도 같은 업계에 있는 사람들끼리 상생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말에는 근거가 있어야 설득력이 생기는 법이다.
나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그때, 문득 아까 곽 사장과 함께 보았던 소성로가 떠올랐다.
“소성로 말입니다. 1,500도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연료가 엄청 들어갈 텐데요.”
“원래는 유연탄을 쓰지만, 순환 연료 비중을 높여가는 중입니다.”
곽호열이 아버지를 대신해 말했다.
“순환 연료라면 어떤 걸 말씀 하시는 걸까요.”
“많지요. 폐타이어, 비닐, 합성고무... 우리는 완전연소가 되는 폐플라스틱을 주로 쓰고 있습니다. 그나마 환경에 덜 해를 끼친다는 아버지 고집이지요.”
역시나!
“이종현 사장님. 공사 현장에서도 그런 폐기물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폐플라스틱’ 같은 것들요.”
내 의도를 눈치채고 이종현 사장이 맞장구를 쳤다.
“예. 그 폐기물들 수거 업체에 임금을 주고 처리하고 있지요.”
“어차피 똑같이 태워 없애버리는 거라면, 조금 더 생산적인 일에 쓰이는 게 맞겠군요.”
“그렇게 될 수 있다면 하나도 틀리지 않은 말씀입니다.”
나는 곽 사장을 바라보았다.
“어떻습니까. 사장님. 물건을 주고받는 것 말고도 벌써 이렇게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이 나오지 않습니까.”
곽 사장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제가 보니 아드님... 아니, 영업부장님도 사장님 못지않게 회사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어떤 합의가 나오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영업부장님을 저희 쪽 담당자로 해서 계속 의사를 나누어 보시지요.”
이미 구 씨 부자와의 일련의 일들로 배우지 않았던가.
결국 아버지의 마음은 자식을 향하기 마련이란걸.
“이건... 원. 자네 도대체 어떤 사람인 건가.”
예상은 적중했다.
곽한용 사장은 도저히 못 이기겠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발각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