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62화 (159/200)

162. 시멘트 대란 (1)

“대표님. 안녕하세요.”

“예. 황인훈 대리님. 좋은 아침입니다. 아드님이 이제 두 살이라고 하셨죠?”

“어··· 대표님께서 어떻게 그걸··· 예, 맞아요.”

황 대리는, 내가 자신의 이름뿐만 아니라 가족의 대소사까지 알고 있다는 것에 적이 놀란 눈치였다.

“아이가 참 예쁘겠습니다. 저는 총각이라서 잘 모르지만, 듣기로는 육아 기간 중 첫 번째 위기가 딱 지금이라던데요.”

“아휴, 말도 못 하죠. 미운 두 살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싶습니다. 잠투정에 떼는 어찌나 쓰는지···”

“저런··· 육아는 아내 분께서?”

“예. 와이프가 휴직 내고 육아를 맡고 있기는 한데··· 저도 뭐 자다가 몇 번이나 깨지요. 애가 갑자기 울고 그러면···”

아닌 게 아니라 황 대리의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힘들다, 죽겠다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슬그머니 걸려있었다.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아드님 사진 좀 볼 수 있을까요? 황 대리님을 닮았으면 정말 잘생겼을 것 같은데.”

“그럼요!”

기다렸다는 듯 얼른 황 대리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내 앞에 내밀었다.

황 대리와 그의 아내, 그리고 천사같이 웃고 있는 아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 그의 휴대전화 배경화면이었다.

그 다정한 모습을 보니, 황 대리가 힘들어도 웃을 수 있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황 대리님. 우리 회사는 직원분들이 육아 휴직이나 근로시간 단축 같은 제도는 잘 쓰시는 편입니까?”

“아··· 그게.”

슬쩍 눈치를 보는 황 대리.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는 그래도 사정이 좀 낫겠지만, 내가 중식 모터스에 다니던 시절 이런 제도가 있어도 눈치만 보면서 전전긍긍하던 여직원들을 많이 보았다.

이유야 뻔하다.

휴직의 휴 자만 꺼내도, 잠깐 쉬지 말고 그냥 앞으로 계속 쉬라는 말을 들을 게 뻔한데 어떻게 입 밖으로 그런 소리를 내겠는가.

여직원들조차 이런 상황에, 남직원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법이 보장하는 제도 아닙니까. 개인의 필요에 따라 적극적으로 사용하세요. 황 대리님도,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생각에 능률이라는 것이 회사에 오래 앉아있기만 한다고 오르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황 대리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다른 직원들도 내 말에 퍽 감동한 표정이었다.

오늘 나는 주택사업본부의 팀들을 순회하고 있었다.

카타르에서 TF팀이 귀국한 뒤에 나는 일부러라도 국내 사업 팀들에게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비추고 있었다.

회장인 내가 해외 사업에 기조를 두겠다고 천명한 것은 고왕 건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그렇다고 해서 국내 사업을 등한시한다는 인상을 피하고 싶었다.

기존에 고왕 건설의 주력이던 그들에게 소외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어미새의 마음으로 ‘B시 재건 사업’과 ‘LK 배터리셀 공장 건축’ 건을 물어다 준 것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국내 사업팀을 달래고자 하는 목적이 가장 컸다.

직원들의 얼굴과 이름. 그리고 대소사까지도 기억했다가 인간적으로 다가간 것은 덤이랄까.

여하튼 해외 사업팀과 국내 사업팀 간의 언제라도 터질 것 같던 수면 아래 갈등은 내가 완충지대 역할을 하면서 점차 아물어 갔다.

위기감 섞인 눈으로 날 데면데면하게 바라보던 국내 사업팀들도 이제는 웃는 낯으로 먼저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 아니! 믹서 트럭이 3대만 들어오면 어쩌자는 겁니까. 공사하지 말자는 거에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높은 언성이 터져 나왔다.

“저거 누구야? 황 대리. 가서 목소리 좀 낮추라고 해. 회장님 오셨는데···”

“아··· 부장님 알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황 대리를 손짓으로 만류했다.

“괜찮습니다. 업무들 보세요. 실례했습니다.”

대관절, 누가 아침부터 저렇게 열통을 터트리는 걸까.

무슨 일인지 궁금해진 나는 바인더 몇 개를 건너 목소리를 따라잡았다.

“알아요··· 아는데··· 아, 됐습니다. 내가 지금 현장 나가볼 테니까, 얼굴 보고 이야기합시다.”

전화 통화의 주인공은 건축공사관리팀의 조순홍 차장.

건축공사관리팀은 도시정비사업팀과 함께 ‘B시 도시 정비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배순홍 차장은 뭐가 그리 화가 났는지, 내가 옆에 다가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에게 인사를 하려는 사람들을 향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고, 배 차장이 나를 알아보기를 기다렸다.

“··· 어, 회장님.”

배 차장은 우당탕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던 중에 드디어 나와 눈이 마주쳤다.

“배 차장님. 아침부터 바쁘시네요.”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는 내게 시뻘겋게 상기된 얼굴을 숨기기라도 하려는 듯 배 차장은 고개를 숙였다.

“뭐, 잘 안 풀리시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닙니다. 회장님. 하청 업체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저런··· 그쪽에서도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실례가 아니라면 저도 좀 알아도 되겠습니까.”

배순홍 차장은 이걸 말해도 되나, 마나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제가 아직 미숙한 게 많다 보니 실무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배우고 싶은 것뿐입니다.”

“그게···”

그제야 배 차장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B시 정비 사업 말입니다. 들어와야 할 믹서 트럭이 안 들어오고 있습니다.”

“믹서 트럭이라면··· 레미콘 차 말씀하시는 거죠?”

“예. 하도 그쪽에서 사정 사정을 해서 저희 쪽에서도 양보를 많이 했는데···”

가볍게 여길 일은 아니다 싶었다.

B시 도시 정비 사업은 정부의 핵심 관료인 유 차관과도 얽혀있는 일 아닌가.

자칫 이런 일로 약속했던 것보다 공기(工期)가 늦춰지기라도 한다면···

“그러니까. 우리가 고용한 레미콘 하청업체에서 약속한 물량을 못 맞추고 있다는 말씀이신 거죠?”

“예. 맞습니다.”

“혹시 그 업체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후━

배 차장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 업체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요즘 시멘트 품귀로 건설 현장들이 다들 난리입니다. 레미콘 업체들이 우는소리 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닌데··· 그래도 이 사람들이 우리랑 하는 민간사업에는 어떻게든 물건 대고 있으면서 지자체 예산 받는 공공사업에는 다 시멘트 회사들 잘못이라고 모르쇠로 일관하니, 정말 답답한 노릇입니다.”

몇 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준비를 하는 배순홍 차장을 더 잡아둘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차장님. 현장 상황 확인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회장님. 그럼 저는···”

배 차장은 나에게 꾸벅 머리를 숙이곤 부리나케 사무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 * *

“김 비서님. 사장님께 잠깐 뵈었으면 한다고 말씀 좀 전해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비서실에 말을 전하고 책상에 앉은 나는 인터넷으로 기사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 시멘트 부족에 지방 건설 현장 ‘올스톱’

- “이러다 건설현장 다 멈춘다.” 시멘트 품귀 현상

- 그 많던 시멘트, 도대체 다 어디로 갔을까?

굳이 기사들을 심층적으로 파고들 필요도 없었다.

그저 ‘시멘트’라는 단어를 검색했을 뿐인데 수많은 기사가 쏟아져 내렸다.

기사들을 가만히 정독하자니, 건설사와 레미콘 업계, 그리고 시멘트 업계 사이에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었다.

시멘트 품귀 현상으로 지방의 중소 건설사는 공사 자체를 중지한 곳이 부지기수라니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더욱이 이제 날씨도 완전히 풀렸겠다, 타설(打說) 작업으로 시멘트의 수요는 점점 늘어나기만 할 텐데.

- 똑똑.

문을 몇 번 두들기고, 이종현 사장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회장님, 이종현입니다.”

“예. 사장님. 바쁘신데 제가 뵙자 한 것은 아니겠지요.”

“보스가 보자고 하면 달려와야지 별 수가 있겠습니까.”

이종현 사장은 흐흐, 능청스럽게 웃었다.

“사장님. 이것 좀 보시겠어요?”

나는 책상 근처로 다가온 이종현 사장을 향해 모니터를 돌렸다.

“음···”

“노파심에 하는 말인지 모르지만, 저희 사업에는 차질이 없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업계 전반에 비상이 걸린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입장입니다만··· 그래도 우리는 사정이 좀 낫다고 봐야지요. 차질까지 우려할 상황은 아닙니다.”

나는 잠시 이종현 사장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흔들림이 없는 것을 보니 내 기분을 달래겠다고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시멘트가 없어서 공사를 못 하는 곳도 있다니··· 시멘트의 원료가 석회석 아닙니까? 다른 자원은 몰라도 우리나라는 양질의 석회석이 많이 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우리나라가 좋은 시멘트를 값싸게 많이 만들어낸다고요.”

나는 대학생 시절 곰방을 하면서 어깨 너머로 들었던 이야기를 이종현 사장에게 풀어놓았다.

내가 알고 있던 것이 잘못된 상식은 아니었는지 이종현 사장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생산되는 시멘트는 공급이 수요를 넘어섰었지요. 물건이 남아돌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업계가 존폐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어요. 그래서 시멘트 업계에서 생각한 방법이 있었습니다.”

역시 이종현 사장은 이쪽 업계에서 훌륭한 스승.

그는 나에게 또 한 번 강의를 할 준비를 하는 듯 잠시 헛기침을 큼큼 뱉었다.

“업계에서는 생존의 방법으로 M&A를 선택했어요. 자기들끼리 회사를 합치기 시작한 거지요. 그 과정을 몇 번 거치다 보니 살아남은 회사가 몇 군데 안 남게 되었습니다.”

힌트는 줬으니 어디 정답을 맞혀봐라.

이종현 사장은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재빠르게 그가 원하는 답을 찾아내었다.

“살아남은 몇 안 되는 회사들이 업계의 점유율을 모두 가져가게 되었겠군요. 독과점 시장이 형성된 거예요. 그렇죠?”

“역시 회장님은 이해가 빠르십니다. 그렇게 시멘트 업계가 강한 입김을 가지게 되면서 레미콘 업계, 그리고 건설사들과 아찔한 힘 싸움이 시작되게 된 것이지요.”

그림이 그려졌다.

시멘트 회사, 그리고 중간상 역할을 하는 레미콘 회사, 마지막으로 건설사.

시멘트 업계에서는 독과점 시장을 등에 업고 가격 인상을 고집했을 것이다.

그 시멘트를 받아 콘크리트를 배합하는 레미콘 업체로서는 당연히 원재룟값 인상에 반발했을 것이다.

건설사에서는 두 업계의 다툼에 공기가 자꾸 늘어지면서 계속 손해를 보게 되니 답답해 미칠 노릇일 것이고.

“차라리 그럼 건설사에서 레미콘 업체를 직접 운영하면 되지 않습니까. 대기업이라면 힘 싸움에서 시멘트 회사들에 어느 정도는 우위가 있을 것이고, 협상이 어렵다면 수입산을 쓰는 방법도 있구요.”

“좋은 아이디어이긴 하지만···”

이종현 사장은 희끗희끗한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긁었다.

“일단 레미콘 업종은 중소기업 보호 산업입니다. 대기업이 계열사를 두지 못하게 하고 있어요. 뭐, 위장 계열사라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회장님은 그런 데는 관심이 없으실 것 같고··· 레미콘 회사들이 전국에 천 개가 넘습니다. 시멘트 업종과는 달리 완전한 레드오션이지요. 이 사람들이 수입산을 쓰는 것은 단가가 전혀 안 맞습니다. 규모의 경제가 되지 않으니까요.”

“공생해야 할 관계가···”

“서로 간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서 갈등을 겪는 셈이지요. 유난스럽다고 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 사장님. 그럼 만약에 말입니다.”

알렉산더 대왕과 고르디아스의 매듭.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원정을 떠나면서 고르디아스라는 남자가 남겼다는 예언을 만나게 된다.

그 예언인즉슨,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 풀 수 없는 매듭을 매어둔 고르디아스가 이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를 정복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는 것이다.

매듭 앞에 선 알렉산더 대왕.

그는 단숨에 칼을 꺼내 매듭을 잘라내 버렸다.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어렵게만 생각한 일을 사고의 발상으로 쉽게 해결해 버린 것이다.

그런 알렉산더가 된 기분으로 나는 이종현 사장에게 말했다.

“우리가 직접 시멘트 업체를 찾으면 어떻습니까. 레미콘 업체들을 대신해서요. 수급을 약속받고 우리와 거래하는 업체를 그곳과 연결해주는 것이지요.”

이종현 사장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회장님.”

“예. 말씀하세요.”

“정말이지··· 저는 그런 쪽으로는 상상도 못 해봤습니다.”

시멘트 대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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