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어둠 속의 두 남자
서울 근교의 어느 야산.
해가 떨어지자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겨, 웬만한 이들은 겁부터 먹을 정도로 사위가 고요한 이 야산의 등산로 초입에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시동이 꺼진 채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차 옆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한 남자가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
황 실장.
그는 슈트 안쪽에 손을 넣어 가슴속에 품고 있는 ‘무언가’를 연신 매만지고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기를 몇 분.
부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차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황 실장을 확인이라도 하는 듯 가만히 멈춰있던 차의 시동이 꺼지고, 운전석의 문이 열렸다.
운전석에서 나온 이는 커다란 덩치의 사내였다.
달빛은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을 비췄다.
장은호였다.
“회장님.”
“··· 황 실장. 어쩐 일이에요.”
황 실장은 장은호 쪽으로 몇 발짝 움직이더니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장은호는 다소 냉담한 태도로 황 실장의 인사를 받았다.
“멀리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휴━”
장은호는 휘파람을 불 듯 숨을 내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거··· 뭐. 어디 건달들이라도 숨어있는 거 아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 혼자입니다.”
“알지. 아무리 눈이 돌아갔어도 태상 자동차 그룹의 회장을 담글 만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들이 어디 흔할까.”
장은호는 황 실장에게 쌀쌀 맞을 수밖에 없었다.
황상규 실장.
그는 다름 아닌 자기 형, 장은수 회장의 심복이 아니던가.
그것도 장은수가 내버리는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 역할을 하고 있는.
“할 말 있으면 얼른 하세요. 그리고 형한테도 좀 전달 좀 해주시고요. 괜히 이렇게 공포 분위기 조성하지 말고, 할 말이 있으면 형제끼리 만나서 직접 하자고.”
그런데 황 실장의 입에서는 장은호가 생각 못 한 의외의 말이 나왔다.
“아닙니다. 회장님. 오늘 제가 여기 온 것은 장은수 회장님은 전혀 모르고 계십니다.”
장은호의 각진 턱 위에 볼이 씰룩거렸다.
‘··· 독단적인 행동이다?’
장은호는 정신을 바짝 잡았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음모에 대비하기 위하여.
“아마 회장님께서는 제가 반갑지 않으시겠지요.”
그런 장은호의 속을 다 안다는 듯이 황 실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 이렇게 외진 곳에서 보자고 하니 무슨 꿍꿍이인지 도통 모르겠는 것만은 사실이네요.”
“회장님께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보여 줄 것···?”
황 실장은 자신의 가슴팍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 행동이 영 수상해, 장은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 이것.”
황상규 실장이 장은호를 기다리면서 내내 만지작거리던 것.
그것은 바로 사진이었다.
장은호와 한영수가 만나는 모습이 찍혀있는.
사진을 받아들고 어둠 속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장은호는 양쪽 눈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무섭게 장은호는 사나운 기세로 황 실장을 향해 성큼 다가섰다.
어둠 속에서 황 실장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고, 그의 진심은 더더욱 보이지 않았다.
“이봐요. 황 실장.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당신 내 뒷조사하고 다닌 거요? 아무리 서로 편이 다르다고 해도 당신도 태상 직원 아니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장은호는 야차같이 황 실장을 잡아 삼킬 기세였다.
“오해십니다.”
“오해? 이렇게 제 손으로 증거를 보여주고선 오해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습니까?”
“회장님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한영수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
“이···”
장은호는 사진을 구겨 쥐었다.
‘제기랄.’
사진 속 장면은 자신이 한강에서 라면을 먹자며 한영수를 불러냈을 때가 틀림없었다.
장은호는 자신의 안일함을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남들 눈에 안 띄겠다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왔다면서 한영수에게 천진난만하게 말하던 자신이 참으로 우스운 꼴이 되어버렸다.
‘··· 그런데.’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듯이, 일단 벌어진 상황은 어쩔 수 없는 것.
장은호는 입술을 꾹 깨문 채로 머리를 식히려 노력을 했다.
냉정을 어느 정도 되찾자 보이는 것이 있었다.
황 실장은 왜 이 사진을 나에게 보여주는 것일까.
그것도 하필 지금, 이 장소에서.
황 실장은 곧, 장은호가 원하던 답을 들려주었다.
“장은수 회장님께서는 모르고 계십니다. 회장님과 한영수, 두 사람 간에 어떤 접촉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
“그래서, 이 사진 한 장을 가지고 나와 거래라도 하자는 것이요?”
“거래라··· 예.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장은호 회장님과 대화는 나눠보고 싶습니다.”
“거래를 가장한 협박을 할 의도라면 다시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겁니다. 영수는 내 동생이요. 설마하니 내가 동생을 만난 것을 가지고 벌벌 떨 거라고 생각하면 황 실장이 아주 큰 착각을 하는 건데.”
“하지만 장은수 회장님은 다르게 생각하시겠지요.”
장은호는 황 실장의 멱살을 잡아채고 싶은 기분을 간신히 억눌렀다.
“오늘 만난 건 없던 일로 합시다. 은수 형 옆을 그렇게 오래 지켰으면서도 사람을 그렇게 모릅니까? 아마 내가 영수를 만난 것만큼이나, 지금 황 실장이 날 찾아온 것도 분노할 사람이요. 형 입장에서 누굴 손 봐줄 게 쉬울 것 같습니까? 태상 자동차 그룹의 회장인 나일까요, 아니면 자기 밑에서 일하는 황 실장일까요.”
“...”
장은호는 손안에서 구겨진 사진을 황 실장에게 돌려주었다.
“이 사진으로 황 실장이 나에게서 얻어 갈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차피 언젠가 은수 형도 알게 될 일이니까. 이 사진을 어떻게 처리하든 간에, 황 실장 마음대로 하세요.”
어둠 속에 있는 황 실장의 실루엣을 장은호는 지긋이 노려보았다.
“그런데 내가 충고 하나만 할게요. 처음부터 형을 속일 생각이었다면, 끝까지 숨기는 게 황 실장의 신상에 이로울 거요. 이건 정말 나를 생각해서가 아니라, 황 실장을 생각해서 하는 말입니다.”
장은호는 이 말을 남긴 채 황 실장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렇게 그가 자신이 세워 둔 차를 향해 몇 발짝 떼었을 때였다.
“··· 저도 알고 있습니다.”
장은호의 등 뒤에서 황 실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장은호는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멀어진 거리만큼이나 두 사람 사이에는 어둠이 짙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또렷한 것은 오직 황 실장의 목소리뿐이었다.
“저 역시 한영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어쩌면 두 분 회장님보다 그를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저일지도 모릅니다. 한영수··· 더 이상 무시할 수 있는 카드가 아니지요.”
“...”
“그거 아십니까? 장은수 회장님이 요즘 장은호 회장님보다 더 경계하는 것이 바로 그 한영수입니다. 참 우스운 일이지요. 누구보다도 프라이드가 높은 그분이 사생아라고 깔보던 자에게서 경쟁심을 느끼다니···”
“형도 바보가 아니니까 알고 있겠죠. 그 애가 보통이 아니라는 걸.”
장은호의 눈에 황 실장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얼마간의 정적 끝에 황 실장의 입이 뻐끔거리기 시작했다.
“··· 저는 이제 지쳤습니다. 장은수 회장님의 그림자 역할을 하는 것 말입니다. 십 년을 넘게 그 분 밑에서 눈치를 보며 살았습니다.”
“황 실장··· 지금 내 앞에서··· 배를 갈아타겠다고 말하는 겁니까?”
“마지막으로 승부를 걸어보고 싶습니다. 양지의 공기를 마실 수 있는.”
후우━
장은호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한영수가 대단하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그는 외부인. 한영수와 연합했다는 것만으로 총수의 자리에 갈 수 없다는 걸 장은호 회장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황 실장.”
장은호의 굵은 목소리에 노기가 섞여 있었다.
“나 역시 태상 안에서 커다란 그룹을 이끄는 사람입니다. 황 실장 말처럼 외부인의 도움과 형의 측근의 배신이 있어야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있다는 식의 말은, 나를 모욕하겠다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두 회장님 간의 능력의 고하를 감히 제가 평가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의 판을 깰 자신이 있으십니까? 사장단에서 몇 표나 받으실 자신이 있습니까?”
장은호는 이를 꽉 깨물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황 실장의 말은 틀린 것이 전혀 없었다.
장은수는 장영복 회장의 장례가 끝나기 무섭게 온갖 술수를 동원해 자신에게 적대적이던 주요 계열사의 사장들을 모두 물갈이를 해 버린 참이었다.
전격전을 치르듯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으니, 그것도 장은수의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판세가 그러했으니, 자연히 중립적인 위치의 세력들도 자리보전을 위해 장은수에게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장은수의 침묵이 자기 말에 대한 동의라고 여긴 황 실장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이 판을 깨기 위해서는 장은수 회장님의 약점 몇 개쯤 쥐고 흔드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도저히 이길 도리가 없으실 텐데요. 그리고···”
어둠 속에서 황 실장의 눈이 빛났다.
“제가 바로 장은수 회장님의 약점입니다.”
일생일대의 대단한 선언이라도 했다는 듯 그는 득의양양한 미소까지 지었다.
뚜벅뚜벅━
장은호는 성큼성큼 황 실장을 향해 다가갔다.
황 실장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황 실장의 지척까지 다가온 장은호는 황 실장이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
그 대신 황 실장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였을 뿐이다.
“··· 황 실장. 여기까지만 합시다.”
황 실장은 올렸던 손을 무안하게 내려놓고 자기보다 머리 하나쯤 더 큰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왜 총수가 되고 싶은지 아십니까. 난 정말 좋은 기업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이렇게 뒷구멍에서 공작질해서 돌아가는 회사가 아니라. 난 결과보다 절차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오.”
“순진한 이상론입니다. 손을 더럽히지 않고서는 원하시는 자리에 가지 못하실 겁니다. 그리고 회장님이 한영수와 접선을 하신 것은 공작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하하하━
장은호가 크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산을 타고 메아리로 퍼질 정도였다.
“형제간의 만남을 공작이라고···? 미안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와 황 실장은 궁합이 영 아니에요. 그리고, 한영수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하더니, 실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아닙니까? 한영수 그 녀석, 결코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놈이 아니요. 내가 총수가 되겠다고 영수를 이용할 마음뿐이었다면 아마 진작에 손절당한 것은 내 쪽이었을 거요.”
웃음기가 가시고, 장은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양지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습니까? 방법을 알려드릴까요? 그럼 지금이라도 비서실장 자리에서 물러나세요. 입 다물고 조용히 떠날 테니 어디 지방이라도 보내달라고 말을 하세요.”
잠시 고개를 좌우로 젖는 장은호.
“내가 충고 하나만 더 합시다. 형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게 황 실장의 무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황 실장이 지금 이렇게 어디에 붙을지 저울질 하는 것만큼 형은 황 실장을 의심하고 있을 테니까. 거기에다가 자기가 태상의 총수를 결정할 수 있다니··· 그런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지금 황 실장의 목이 위태위태하다는 걸 본인만 모르는 것 같군요. 꼭 칼이 들어와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일은 역시나 서로 묻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는 황 실장의 목이 떨어지는 데 그 어떤 연관도 되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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