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데이트
“오빠. 여기 정말 비싼데··· 알고 있어요?”
“이보세요. 변호사님. 내가 누군지 압니까?”
나는 가슴을 활짝 펴고 엄지손가락으로 그곳을 쿡쿡 찌르며 허세를 부렸다.
“이거, 회장님의 품격을 무시하시네.”
여기는 서울의 한 호텔에 있는 중식당.
어쩐 일인지, 오늘따라 중식이 먹고 싶다고 말하는 고윤아를 데리고 온 참이다.
인터넷으로 급하게 슬쩍 찾아보니 예약은 필수라고 하던데 운 좋게도 우리는 테이블을 바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여기 와본 적 있어?”
“네. 로펌에 다니던 시절에··· 제 돈 주고 사 먹은 적은 없지만요.”
“어디 한번 보자. 도대체 얼마나 비싸길래 윤아가 이렇게 엄살을 다 부릴까?”
자리에 앉은 나는 메뉴판을 펼쳐 들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메뉴판 가장 위에 자리를 잡고 있는 짜장면이었다.
우리 말과 영어, 일어, 중어로 복잡하게 설명이 적혀 있는 짜장면은 5.5라는 숫자가 가격으로 책정이 되어있었다.
“뭐야··· 가격 이게 맞아? 뭔가 조금 이상하긴 한데? 송로버섯에 한우까지 쓰는 짜장면이 오천 오백 원이라고?”
짜장면에 들어가는 것치곤 과분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재료들은 둘째치고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가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알겠다. 코스 요리처럼 딱 한 젓가락만큼만 나오는 거구나? 그러면 말이 되지.”
쓸데없는 연구를 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나를 보고 고윤아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반달이 된 그녀의 눈이 사랑스럽다.
하지만 그 달달한 감정과 별개로 고윤아가 왜 웃고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오천 오백 원이 아니고, 오만 오천 원입니다. 제가 여기 비싸다고 했지요?”
··· 에?
상식을 파괴하는 가격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누군가 들으면 재수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조 단위의 자산가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가난하게 산 세월이 훨씬 더 길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 생의 대부분이 그랬다.
그렇기에 내 안의 어떤 상식선들은 여전히 예전의 습성에서 그대로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짜장면 한 그릇이 오만 원을 넘는다는 건 그 상식선을 훌쩍 벗어나는 것이다.
아무리 한우가 들어있으면 뭐한단 말인가.
그래봐야 고작 몇 조각 들어있는 것이 전부일 텐데.
그럴 거면 차라리 고깃집에 가서 소고기를 먹고 말지.
뭐··· 이런 생각이 너무 좀스러운 건가?
“회장님? 아까 말씀하신 품격은 언제 보여주시는 겁니까?”
화들짝 놀라는 내 모습이 윤아는 퍽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밝게 웃는 그녀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더 보고 싶어서 익살꾼 흉내를 좀 내보았다.
“무슨 소리야. 윤아와 함께 먹는 식사라면 짜장면 한 그릇에 오십··· 아니, 오백만 원도 낼 수 있어.”
이런···
순간 고윤아의 웃음이 뚝 그쳤다.
유머 감각이 부족한 인간의 특.
어쩌다 한번 누군가에게 웃음을 주는 데 성공하면, 걸신들린 사람처럼 1절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 무리수를 둔다는 것이다.
지금의 나처럼.
“오빠···”
고윤아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 그거 아니에요.”
푸하하하━
나와 고윤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동시에 크게 웃었다.
“아무튼 이거 가격표 보면 눈만 뱅글뱅글 도니까, 그냥 속 편하게 디너코스로 하자. 여기요···”
엄마 배 속에 있었을 때부터 단단히 예절 교육을 받았을 것 같은 홀서빙 직원에게 주문하고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 식당의 위치는 호텔의 36층.
해가 지고 있는 서울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름답다···
고층 건물의 유리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지는 붉은 저녁노을이 그 어떤 물감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고 느껴질 만큼 훌륭하게 느껴졌다.
이 도시를 전부 가지고 싶다.
지금 서울의 아름다움은 그런 망상을 품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나저나, 아쉽습니다.”
풍경에 빠져있던 나를 다시 불러낸 것은 고윤아의 목소리였다.
“응? 뭐가?”
“사실 오늘 중식이 먹고 싶다고 한 건, 승우 씨의 가게를 가고 싶었던 거거든요.”
승우의 가게 만리향은 확장 공사 준비를 위해 잠정 휴업에 들어간 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만약 녀석이 오픈을 했다면, 오랜 친구를 배신하고 굳이 이곳까지 올 필요도 없었으리라.
“나나 승우나 요즘 한창 자기 영역을 키우느라 정신이 없지. 멋진 놈이야, 이승우는.”
“두 사람 사이가 부럽기도 하고··· 솔직히 질투도 납니다. 승우 씨는 제가 모르는 오빠에 대해서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무슨 소리야. 내 얼굴을 보기 전에 이미 우리 집 숟가락, 젓가락 개수까지 다 알고 나타났던 사람이.”
“··· 그때만 해도 전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오빠와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나도 그래. 내가 윤아를 품에 안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
능청스러운 내 말에 고윤아의 얼굴이 금세 복숭앗빛을 띠었다.
식사는 훌륭했다.
솔직히 가격만큼 특출난 맛이 있다고 하기는 어려웠지만, 좋은 사람과 편안한 시간을 즐길 수 있었기에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나른함에 취해서일까.
나도 모르게 고윤아에게 숨기려던 일을 말하고 말았다.
“있잖아. 나 장은수 회장을 단둘이서 만났어. 그때 아메드 빈 알리 왕자와 접견이 끝나고 말이야.”
순간, 고윤아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치 어딘가 고장 난 로봇처럼.
아차 싶었다.
되도록 내가 장은수 회장과는 얽히지 않길 그토록 염려하던 그녀였다.
“··· 무슨 대화를 나눴습니까.”
“아니야. 별 이야기 안 했어.”
나는 말실수를 깨닫고 화제를 돌리려 노력했다.
“알고 싶습니다. 말해주세요.”
고윤아의 눈을 보자 도망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여기서 말을 아끼면, 걱정으로 녹아내려 버릴 것 같은 그녀의 눈동자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 확실히 사교적인 대화는 없었지. 나보고 그러더군.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고윤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요?”
“거기서 꼬리를 내리고 알겠습니다. 할 수는 없잖아. 확실하게 말했어. 당신은 나에게 뭘 명령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고윤아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긴 속눈썹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나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그게.”
“장은수 회장이 오빠를 적대시하는 이유 말입니다. 내가 오빠 옆에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혹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잠시 머릿속으로 사랑에 빠진 남자라면 으레 하기 마련인 유치한 상상을 했다.
하지만 고윤아는 그런 억측 따위는 접어두라는 듯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저었다.
“장은수 회장이 숨기고 싶어 하는 비밀을 하나 알고 있습니다.”
“비밀?”
“이제 와서 전부 소용없는 이야기지만, 장영복 회장님께서 얼마만 더 살아계셨더라면··· 죄송합니다. 이런 소리···”
“아니야. 괜찮아. 그보다 윤아가 알고 있는 것이 뭔데?”
“회장님께서는 장은수 회장을 태상 건설 회장직에서 물러나게 할 생각이셨습니다. 마음이 답답하셨는지, 저에게 여쭤보시기까지 했습니다. 아버지로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 장은수 회장이 오해하는 거로군.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장영복 회장과 가깝게 지내던 네가 무슨 입김이라도 넣었다고 짐작한 모양이지?”
고윤아는 서글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했겠습니까. 그저 회장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 맞을 거라고. 하지만 장은수 회장의 입장을 한 번만 더 들어보시라고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그쪽 부자 사이도 참 문제가 많았군.”
“말년의 회장님은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많이 마음이 약해지셨습니다. 기업을 키우기만 했지, 정작 자기 가족을 돌보지 못한 자신을 많이 자책하셨어요.”
그 돌보지 못한 가족에 나도 포함이 되어있었을까?
아무리 윤아가 저렇게 말한다고 한들 도저히 나는 장영복 회장을 동정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역시 내 표정이 썩 좋지 않았는지, 고윤아가 얼른 말을 돌렸다.
“미안해요. 오빠. 좋아하지 않는 이야기인 걸 아는데.”
“아니야. 괜찮아. 그나저나 장은수 회장 말이야. 그에게는 아버지의 존재가 뛰어넘어야 할 어떤 벽 같은 것이었겠군. 일종의 콤플렉스처럼 말이야.”
“아마도요. 아니, 분명 그랬을 겁니다. 두 사람의 대립이 한창 첨예해졌을 때 고집스러울 정도로 장은수 회장은 아버지의 뜻에 반대로만 행동을 했으니까요.”
흔히 말하는 늙은 아비와 어른이 된 아들의 갈등이라 이건가.
하지만 장영복 회장, 그리고 장은수 정도 되면 결코 그것이 단순한 가족 간의 갈등이 아니었겠지.
태상의 운명을 건 한 판의 힘 싸움.
그 힘 싸움에 어느 줄을 잡을지 눈치만 보았을 사람들의 숫자는 헤아리기가 어려웠겠지.
“그렇다면 장은수 회장이 앞으로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그건 절대 윤아, 네 탓이 아니야.”
“··· 예?”
내가 장은수의 뱃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이 아니지만, 하나 분명히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그날 장은수가 나와 장영복 회장과 겹쳐보았다는 것.
불쾌하고, 화가 났을 것이다.
어쩌면 조금의 절망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일개 사생아에 불과한 나에게서 이제는 넘어섰다고 생각한 벽을 또 마주하게 되다니.
장은수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해는 하되 절대로 공감은 할 수 없는 그것이었다.
어쨌든 이로써 그와 나는 같은 하늘을 지고 살기 어렵겠구나.
“윤아야. 장은수 회장이 두려워?”
“상관없습니다. 그 사람은 제게서 이미 큰 것을 빼앗아 갔어요. 여기서 더 무리를 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오빠에게 무슨 짓을 할지··· 그건 두렵습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윤아의 손등 위로 내 손을 겹쳤다.
그녀의 따듯한 체온이 손을 타고 그대로 몸에 전해졌다.
“그날 분명히 봤어. 장은수 회장 역시 날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너무 걱정하지 마. 지금 나는 혼자가 아니야. 날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장영복 회장이 나에게 남긴 진짜 유산은 너라고 생각해. 윤아가 있어서 난 장은수 회장이 겁나지 않아.”
날 믿어.
“그나저나, 우리 오랜만에 데이트야. 마음 갑갑해지는 이야기로 시간 보내지 말자. 있지, 나 이사 가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까? 이젠 떠돌이 생활 좀 벗어나야지.”
여전히 얼굴에서 걱정을 완전히 지우지 못 했지만, 그래도 윤아는 내 말을 따라와주었다.
“오빠가 원하는 조건을 말하면, 내가 알아볼게요.”
나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무슨. 여자친구한테 그런 걸 시키는 남자친구가 어디 있어.”
“오빠.”
고윤아가 몸을 앞으로 내밀어 그윽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대화를 나누던 동안 어느새 밖에는 어둠이 깔리고 식당에는 분위기를 살려주는 조명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그 조명은 윤아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해주고 있었다.
그야말로 팔불출이 따로 없지만, 나도 몸을 앞으로 내밀어 윤아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북받쳐 올라왔다.
“나는 여자친구이기 이전에 오빠의 대리인이라는 거 잊었나요? 아직 오빠가 서명한 서류, 제가 가지고 있는걸요.”
··· 그래.
새로 집을 구하면 우리 그곳에서 같이 살지 않을래?
우리 둘만의 보금자리를 만드는 거야.
승우처럼 나도 그래야만 정말로 세상에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 같거든.
언젠가 우리의 아이는 내가 받지 못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을 거야.
그렇지, 윤아야?
나는 차마 아직 말할 용기가 없는 이 말들을 대신해 윤아를 향해 옅게 웃어 보였다.
어둠 속의 두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