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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억을 상속받았다-159화 (175/200)

159. LK 그룹 김윤제 회장 (2)

와아━

하나로 모여진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곳 VIP룸까지 울렸다.

아마도 그라운드에서 무슨 일인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타공인 최고의 야구팬인 김윤제 회장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나에게 고정이 되어 있었다.

내가 김 회장을 다소 경박한 인상이라고 이야기했던가?

사람의 일면만을 보고 이렇다, 저렇다는 판단을 내리는 것이 얼마나 섣부른 짓인지.

나는 김윤제 회장에 대한 감상을 새로 고쳐 쓸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의 얼굴은 여러모로 가벼움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그 사람의 됨됨이라는 것이 어찌 혀끝을 통해서만 드러나겠는가.

입에 침을 바르고 말해도 잘생겼다고 하기 어려운 외모의 김윤제 회장.

하지만 지금 그에게서는 신중함과 위엄이 적절하게 섞인 일종의 아우라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그냥 누군가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LK라는 거대 기업의 수장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말 나온 김에 야구 이야기는 잠깐 접어둘까요. 이렇게 힘들었던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경기가 어렵습니다. 기업인으로서 정말 고민이 많습니다. 제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 아니겠습니까. 저도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이런 큰 흐름 앞에 저라는 존재는 너무 작을 뿐이라는 걸.”

“아이고! 한 회장님.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한 회장님 입에서 그런 말이라니··· 엄살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김윤제 회장은 낮게 흐흐, 웃었다.

글쎄.

엄살이 심한 것은 오히려 그쪽이 아니냐고, 되묻고 싶었다.

경기가 어렵네, 어쩌네 하지만 LK그룹은 오히려 눈부시게 순항 중이었다.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LK 전자는 물론이요, 2차전지 사업의 훈풍으로 유례없는 호황을 맞이하고 있는 LK 화학까지.

마이너스 성장의 위기 속에서도 LK그룹은 이렇게 차근차근 왕국의 부를 쌓아 올리고 있었다.

“··· 사실은 말이요. 나도 고왕 건설의 주주 중 한 사람입니다.”

김윤제 회장은 익살스러운 표정을 한 채 누가 들으면 큰일이라도 난다는 듯 작게 속삭였다.

“사정 좀 봐주시죠, 회장님. 아직 이 회사로 하고 싶은 일이 많습니다. 그 LK가 저희 회사 지분을 노리고 있다면, 저 겁나서 앞으로 밤잠 못 이룹니다.”

이번에는 진짜로 한번 엄살을 부려보았다.

“하하하! 나는 그런 식으로 한 회장님과 적이 되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치도 없습니다. 그룹과는 관련 없는 일이에요. 재미 삼아 소액 놀리는 개인 계좌로 고왕 건설 몇 주 담아본 게 전부입니다.”

“그러셨군요. 이거 대단한 영광인데요. LK의 총수께서 관심을 두시다니···”

내가 빙긋 웃으며 말하자, 김윤제 회장은 두 손을 들어 손사래를 쳤다.

“어디요. 감사는 내가 해야지요. 이런 시국에 고왕 건설 주가, 정말 경악을 금치 못할 만큼 많이 올랐지 않습니까.”

김윤제 회장의 말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모두 사실이었다.

처음 입성할 당시, 만 이천 원 선까지 바닥을 찍던 고왕 건설의 주가는 불과 몇 달 만에 이만 원대를 넘어서 버렸다.

고왕 건설의 시총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생각할 때, ‘이례적’이라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았다.

특히나 건설 업계 전반이 경제 한파에 정신없이 두들겨 맞으며 금방이라도 녹다운 될 것 같은 상황에서 고왕 건설의 큰 걸음은 그야말로 군계일학.

몇몇 경제 전문지를 포함한 일각에서는 ‘거품’을 운운하며, 뜬 소문이 부양한 주가는 곧 곤두박질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주의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며 우리는 진군은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비단 고왕 건설뿐만 아니었다.

구동일이 파견을 나가 있는 이재석 사장 체재의 고왕 리조트 역시 모기업의 상승에 힘을 보태고 있었다.

그동안 비정상적으로 부풀려져 왔던 지출이 정상화되자, 자연스럽게 리조트의 실적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윤 회장 일가의 호주머니로 들어갔을 돈들이 리조트 사업에 투자가 되었고, 코로나 이후 반짝 여행 붐까지 겹쳐 고왕 리조트의 상반기 영업 이익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던 고왕 그룹의 놀라운 반전이었다.

나의 재산 역시 기업의 성장과 더불어 놀라운 속도로 불어난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여의도에서는 고왕 건설의 목표 주가를 삼만 원까지도 보고 있더군요. 그것도 아주 보수적인 관점에서. 이 모든 일의 중심에 누가 있습니까? 우리 한 회장님 아니겠습니까?”

“과찬이십니다. 저는 그저 애송이에 불과합니다.”

“애송이? 이보세요.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은 좋다고 자부합니다. 내가 보기에 한 회장님은 지구에서 안드로메다까지만큼이나 애송이와는 거리가 멀지.”

김윤제 회장은 퍽 친근한 태도로 내 어깨를 툭 쳤다.

우스갯소리를 하나 더 보태며.

“이거 가만 보니 음흉한 구석이 있단 말이야.”

하지만 농담은 딱 거기까지였다.

“이봐요, 한 회장. 우리 이제부터는 진짜 솔직하게 대화 좀 해볼까요?”

“저는 지금까지 내내 진심이었습니다만··· 회장님은 아니셨나 봅니다.”

“사람··· 참.”

얼마간 그라운드를 내려다보던 김 회장.

그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내 생각에 국내에서 에메랄드 시티 수주에 들어갈 기업은 단 두 곳. 태상과 고왕뿐이요.”

“제 기를 살려주시려는 의도였다면 대성공입니다. 태상 같은 기업과 저희를 같은 선에 세워주시다니요.”

“태상. 모두가 인정하는 대한민국 최고 기업이지. 하지만 회장의 포부만은 고왕 쪽이 더 큰 것 같던데 혹시 내가 잘못 본 겁니까?”

김윤제 회장의 말은 기름기가 쫙 빠져 담백했다.

“물론 태상과 고왕의 규모만 놓고 보자면, 당연히 고왕 쪽이 열세인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에메랄드 시티 건, 아무리 태상이 대단하다고 해도 그들이 이 사업을 어떻게 독식을 하겠습니까. 세상에는 기운이라는 것이 있어요. 고왕에는 지금 기운이 따르고 있습니다. 아니···”

김 회장은 자기 말을 당장 수정이라도 해야 한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한 회장님에게 기운이 따르고 있다는 것이 맞겠지요. 그날 왕자도 틀림없이 그걸 느꼈을 겁니다. 한 회장을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더군요.”

아메드 빈 알리 왕자는 너무나 거창하게도 나에게서 신을 보았다고 말했다.

김윤제 회장도 눈치 빠르게 그 분위기를 읽은 모양이었다.

“그때 확신했습니다. 고왕은 저 중동의 거대한 프로젝트에 한 자리를 차지하겠구나. 하지만 제 생각에 고왕에는 불안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특히나 태상과 비교하면 더더욱 부각이 되는.”

“인프라··· 의 차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확합니다.”

김윤제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상 그룹은 수많은 사업을 하지요. 계열사들은 필요하다면 한 몸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일 겁니다. 태상 건설은 그만큼 든든한 아군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고왕은요? 건설 외길을 꿋꿋이 걸어온 것은 존경합니다만··· 발을 맞춰 보조해줄 지원군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요.”

씁쓸하지만 반박의 여지가 없는 지적이었다.

저 사업의 거대함에 비해 우리가 가진 볼륨은 너무나 아쉽기만 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기간에 절대 해결할 수가 없는 문제.

자, 그런데 김 회장이 굳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제 겨우 얼굴을 튼 나에게 조언을 하겠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고왕 건설의 주식을 가지고 있다고 파이팅을 외치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고.

이쯤 되면 맹추라도 김윤제 회장의 의도를 눈치 채리라.

누가 누구보고 음흉하다고 하는지!

조용한 밀실이 아닌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없는 야구장으로 나를 초대한 이유도 이제 명백해졌다.

“지원군이라. 그래서, LK그룹이 그 지원군이라도 되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당돌한 나의 말에도 김윤제 회장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 남자 역시도 보통이 아니다.

“조금 다르게 말해 볼까요? 동맹이라는 표현은 어떻습니까. 재밌을 겁니다. 우리가 함께 한다면 틀림없이 훨씬 더 크게 판을 키울 수가 있어요.”

나쁠 것 없는 말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굉장히 솔깃한 제안이었다.

상황이 조금만 달랐다면 우리 쪽에서 먼저 부탁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LK의 이름값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먹힌다.

그들이 우리의 우군이 되어준다면 수주 가능성에 큰 무게감이 실릴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4차 산업에 특화된 LK와 우리의 협업이라면, 미래형 도시를 천명한 에메랄드 시티의 기조에 정확히 들어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좋게 좋게 포장했을 때의 이야기이지 조금 삐딱하게 보자면 우리가 길을 뚫으면 LK는 거기에 밥숟가락만 올리겠다는 말과 같기도 하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이 난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이런 논의가 의미가 있겠습니까. 떡 주는 사람 생각도 들어봐야지요.”

“아메드 빈 알리 왕자가 귀국 전에 마지막으로 들린 곳이 고왕 건설이라는 거.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지 않습니까.”

쉽게 날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듯, 김윤제 회장은 쉼 없이 입을 움직였다.

“자율주행으로 대표되는 지능형 교통체계, ai와 지능형 로봇이 활용되는 첨단 물류기지, 차세대 전력망으로 쓰일 ESS··· 에메랄드 시티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선보이는 박람회가 되겠지요. 어디 건물을 짓고 벽을 쌓는 것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겠습니까. 한 회장님, 먹을 것이 많습니다. 한 회장님. 서로가 잘하는 것을 한번 같이해봅시다.”

나를 향해 열변을 토하는 김윤제 회장.

가만히 그를 보고 있자니 절로 묘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대리라고 불리던 시절의 나.

멀리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고작 얼마 전의 일일 뿐이니.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머리를 숙이고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내가 자그마치 재계 서열 2위의 하소연을 듣고 있지 않은가.

세상에 이보다 더 지독한 아이러니가 있을까 싶었다.

“회장님의 제안은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멋진 이야기구요. 하지만···”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말에는 언제나 함정이 있기 마련이다.

설령 우리에게 이득이 있더라도 선선히 이대로 손을 잡을 수는 없다.

“회장님이 솔직히 말씀 주셨으니, 저도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른다니,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느니 그런 약한 소리는 집어치우겠습니다. 예. 저 반드시 해낼 겁니다. 걸 수 있는 모든 것을 걸 생각입니다.”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하지만 거기서 얻어지는 열매는 오로지 저와 고왕, 우리의 것입니다. 만약 LK도 그 열매를 나누고 싶다면, 우리가 기회를 주었을 때나 가능한 일이겠지요.”

사이즈 차이에 주눅 들지 말자.

생각해보면 이 자리에 오기까지 나보다 작은 상대가 있었던가.

그런 마음으로, 나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잘 아시겠지만, 기회라는 것은 값이 싸지 않습니다.”

··· 하하하!

순간 김윤제 회장이 벼락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한 회장님. 혹시 한 시즌 동안 야구를 몇 게임이나 하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KBO 기준으로는 144경기입니다. 아주 장기 레이스지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뭔지 아십니까? 정규 시즌 1위 팀조차도 10경기를 하면 4번은 지는 것이 보통이라는 겁니다.”

“··· 항상 이기는 게임만을 할 수는 없다는 말씀이군요.”

김윤제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는 값이 비싸다는 한 회장의 말. 100% 공감합니다. 당연히 값을 치러야지요. 그 기회를 얻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지는 싸움도 할 의향이 있고.”

에메랄드 시티에 김 회장 역시 어지간히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말이었다.

어디,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낮은 곳을 향해 머리를 숙이는 게 쉬운 일인가.

“지금 제가 회장님께 실례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이왕에 그렇게 된 거, 한 번 더 하겠습니다. 회장님께서는 그 값을 얼마나 쳐주실 생각입니까.”

“이거 어떻게 해야, 한 회장님이 고개를 끄덕이게 할 수 있을까요. 옷이라도 다 벗어드려야 하나?”

“필요하다면 속옷 빼고 다 벗으실 각오는 하셔야지요.”

김윤제 회장의 양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내년 하반기에 화성에 배터리 셀 공장을 건설할 생각이요. 모르긴 해도 경기도권에선 최대 규모의 공단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새로 태어난 고왕 건설, 해외 시장 진출도 좋지만, 내수시장에서도 뭔가 보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우리 한 회장님에게 좀 어필이 될까요?”

딱━

그때, 타격음과 함께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오늘 응원단이 낸 소리 중 가장 큰 소리였다.

야구공은 빨랫줄같이 빠른 속도로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얼마간 자신의 멈출 수 없는 기세를 자랑하던 야구공은 관중석 안으로 떨어지고 나서야 그 운동을 멈추었다.

굴러들어온 야구공을 향해 사람들이 몰려들고, 가장 먼저 공을 집어 드는 데 성공한 이는 두 팔을 번쩍 들며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 홈런이군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 김윤제 회장에게 말했다.

“그래요. 틀림없는 홈런입니다.”

김 회장도 웃으며 화답했다.

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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