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그 양반, 대단한 사람이지
“인마, 너 갑자기 왜 그래. 천천히 마셔.”
술자리로 돌아오자 이승우는 연거푸 소주를 들이켰다.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내 입에서 나온 말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처럼.
세 잔을 스트레이트로 달린 승우가 네 번째 잔을 채우려고 할 때, 나는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승우는 슬며시 술병을 내려놓더니 크게 날숨을 내뱉었다.
“땅 꺼지겠다. 세상이라도 끝난 사람 같네.”
“그보다 더하지··· 너, 내가 아는 한영수가 맞지? 그렇지?”
“당연하지. 네가 아는 그 사람이 맞아. 너의 형제와 다름없는 친구 한영수.”
이승우는 혀를 날름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마치 입술에 남아있는 알코올의 작은 자취마저 더듬어, 그만큼이라도 더 취하지 않고는 못 버티겠다는 듯.
“좋아. 이제 나 들을 준비가 된 거 같아. 새끼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승우로서는 당연히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너무나 많은 말들이 생략되어 있었으니.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래··· 윤아 이야기부터 하는 게 좋겠다.”
“윤아 씨? 네 여자친구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을 차근차근 풀어내려면 오늘 밤, 나와 이승우 사이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리라.
하지만 왜일까.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입을 열 기회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녀석에게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은 황당하고 이상한 생각이.
“윤아는 내 생부 밑에서 일하던 변호사였어. 그런데 어느 날인가 윤아가 날 찾아왔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유언장을 하나 들고서.”
“잠깐만··· 뭐야. 유언장을 가지고 왔다는 건···”
“그래. 내 생부···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사망한 뒤였어.”
“이런, 시팔!”
승우의 입에서 험한 욕이 튀어나왔다.
“살아있을 때는 뭐 하다가, 죽고 나서야··· 30년이 지나서 말이야! 윤아 씨, 엄청나게 큰 로펌의 변호사였다며. 그런 사람을 밑에 둘 정도면 엄청 힘이 있는 사람 아니야? 널 찾으려면 진작에 찾을 수 있었을 거 아니냔 말이야.”
이승우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열변을 토했다.
서로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우리.
외로움이라는 괴물에 쓰러져버리지 않도록 우리는 서로의 등을 내어준 채 20년을 훌쩍 넘어서는 세월을 의지해왔다.
그렇기에 지금 승우의 감정이입을, 그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일을 진심으로 남 일처럼 여기지 않는 그가 고마웠다.
“그 사람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어. 애초에 날 자애 보육원에 버린 사람이 그였으니까. 아니, 직접 하지는 않았더라도 누군가에게 지시했겠지. 그가 날 찾고 싶었다면 아무런 노력도 필요하지 않았을 거야. 너도 대충 예상하겠지만, 나··· 그렇게 떳떳하게 태어나지는 않았더라.”
승우는 연신 험악한 욕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욕설이 마냥 천박하게 만은 들리지는 않았다.
그건 누군가를 모욕하거나 위협하기 위한 언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이가 내뱉는 비명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 와서 널 찾은 이유가 뭔데? 왜, 자기 제사상 차려줄 사람이 없다디?”
“아마 죽기 전에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낀 걸지도 모르지. 당신의 삶에 남아있는 마지막 숙제라고 생각했거나. 아무튼 나에게 아주 큰 돈을 남겼어. 500억이라는 돈을.”
이승우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마, 지금 승우의 표정은 윤아에게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 모습과 거울처럼 같았을 것이다.
“500억이라니···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네 아버지는?”
“500억쯤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람.”
꿀꺽━
이승우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내 아버지는··· 장영복 회장이야.”
“··· 미쳤네.”
승우의 입에서 신음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한번 입이 풀리자 끊임없이 입이 움직였다.
복희 할머니, 그리고 구 회장과의 만남.
그리고 할머니의 부고와 함께 이뤄진 또 한 번의 상속.
투자회사를 차리고 고왕 건설을 인수하기까지.
중간중간 술잔을 부딪치며 모든 이야기를 끝냈을 때는 이미 시간이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말 믿지 못할 이야기다. 영화나 소설이래도 말도 안 된다고 할 거야.”
“살다 보면 어떤 이야기꾼도 꾸며내지 못할 지독한 농담 같은 일이 벌어지고는 하잖아.”
“역시 어렸을 때부터 넌 뭔가 다르다고 생각했어. 역시나 넌 때깔부터 달랐구나. 자식새끼 쥐어패기만 하던 우리 아버지랑은 다르게···”
나는 내 손을 이승우의 손등 위에 겹쳐 올렸다.
승우의 말을 부정하기 위해 세차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야. 승우야.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다고 해서, 다 똑같이 살지 않더라. 정말로. 오히려 난 나보다 네가 훨씬 더 대단하다고 생각해. 꿈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네가.”
“제기랄, 새끼야. 나 너무 화가 난다. 만약에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면 넌 틀림없이 엄청난 사람이 되었을 텐데.”
“글쎄. 그냥 재벌 집 망나니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사회에 물의나 일으키는 그런 놈팽이 말이야.”
“뭐?”
“죽어도 안 바꾼다고. 너와 신부님, 그리고 자애 보육원에서 보낸 시절 말이야.”
잠시 나를 바라보던 승우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취중에 감정은 금방 전염이 되었다.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던 것이 언제냐는 듯 우리 둘은 함께 웃었다.
“너무 늦었지? 이제 와서 이야기해서 미안하다.”
“새끼··· 어떻게 나한테까지 숨길 수가 있냐. 마음 같아서는 등짝이라도 한 대 치고 싶은데. 또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하다. 혼자서 말도 못 하고 얼마나 끙끙댔을지.”
“그런데 내가 장영복 회장의 아들이라는 거 말이야···”
“알아. 비밀로 해달라는 거잖아. 내 불알친구가 장영복 회장의 아들이라고 어디에 떠들어봐야 믿을 사람도 없겠지만, 입단속 할게. 은주에게도. 너한테 그게 좋은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가 주는 결혼 선물. 그냥 받아. 군소리하지 말고.”
이승우는 차 키를 만지작거렸다.
“알았다! 재벌 친구 둔 덕 좀 보자. 팔자에도 없는 벤츠 타게 생겼네. 은주한테는 이거 뭐라고 말해야 하냐.”
짠.
술잔을 한 번 더 넘기고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며 이승우는 나에게 물었다.
“··· 그런데, 너. 앞으로는 어쩔 생각이야?”
“앞으로라···”
나는 꿈을 꾸는 듯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 * *
“전무님. 아니, 이제는 사장님이시지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황 실장. 잘 지냈나?”
이종현 사장과 황 실장은 악수를 나누었다.
반가움과는 거리가 먼, 어색함이 잔뜩 묻어있는 악수를.
이 시간에 황 실장이 자기 집까지 찾아온 것에 대해 짐작이 가는 바가 있는 이종현 사장이었다.
“회장님은 건강하시고?”
장은수 회장의 안부를 물은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예. 여전하십니다.”
이종현 사장의 눈에 여전하다는 것은 장은수 회장이 아니라 황 실장인 것 같았다.
언제나처럼 감정을 읽을 수가 없는 굳은 얼굴의 황 실장.
“그래. 여전하시겠지. 그나저나 용건이 뭔가? 자네와 나 사이에 할 이야기가 남아있던가.”
“개인적으로야 사장님께서 좋아 보이셔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론만 하지. 우리 둘이 이렇게 자리를 하는 게 양쪽 모두에게 모양새가 좋지는 않을 테니.”
회유인가, 아니면 협박인가.
어쩌면 둘 다일지도.
이종현 사장은 가만히 황 실장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 회장님께서는 사장님께서 고왕 건설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가지고 계십니다.”
“고왕에 건너오기 전에 법적인 문제라면 모두 검토를 했어. 더욱이 이곳에 와서도 전 직장에 대한 예의와 양심은 충분히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네만.”
“저야, 그저 말을 전하는 심부름꾼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회장님께서는 서로 간에 더 불편한 일이 생기기 전에 사장님이 물러나 주시길 바라고 계십니다.”
허.
이종현 사장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탄식을 내뱉었다.
“··· 그래서, 얼마를 주시겠다던가.”
회유의 조건으로 무엇을 제시했을지 뻔히 보이는 이종현 사장이었다.
“아마도 생각하시는 것 이상일 겁니다. 태상 건설을 나가셨을 때 받으셨던 퇴직금보다 더 큰 액수입니다.”
“허허, 재밌군. 30년을 일한 대가보다 여기서 고작 몇 달 머문 값어치를 더 쳐준단 말인가?”
“시세라는 것이 그렇지 않습니까. 가치라는 건 항상 변하는 법이니까요.”
“묘하구먼. 자네 말을 들으니, 마치 내가 태상에 있던 시절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는 걸로 들려.”
“오해십니다. 하지만 그렇게 들리셨다면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황 실장은 정중한 태도로 이종현 사장에게 머리를 숙였다.
“나 말고 다른 직원들도 이렇게 찾아갈 생각인가? 장 회장님께서 직접 솎아낸 그들을 말이야.”
“필요하다면, 이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겠군요. 만약 사장님께서 물러나시면 그분들은 알아서 나갈 것이라는 게 회장님의 판단이십니다.”
“저런···”
이종현 사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번만큼은 장 회장님께서 생각을 잘못하셨군.”
황 실장은 여전한 무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우선 10억이든, 100억이든 나는 지금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네. 그리고 이런 내 마음은 다른 직원들 역시 다르지 않을 거야. 자네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인지 모르겠으나, 괜히 그들을 찾아가서 마음을 흔들지 말아주게. 이미 전 직장에서 상처를 입은 이들이야. 그 상처를 더 들쑤시지 말라는 소릴세.”
“··· 태상에 억하심정이 있기 때문입니까? 복수라도 하고 싶으십니까? 그건 제가 알고 있는 사장님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하하━
이종현 사장은 크게 웃었다.
“물론 처음에야 그런 마음이 없었을 수가 없지. 나뿐만 아니라, 다들 어느정도는 이를 갈았을 거야. 그런데 이제 우리들의 머릿속에 태상은 지워진 지 오래야. 태상 그룹, 아니 태상 건설과도 비교도 안 되는 작은 기업이지만, 일이 즐거워. 이런 기분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 일이 즐겁다.”
“어떻게, 이거면 대답이 되겠는가. 회장님께는 꼭 말씀드리게. 나 역시 옛 직장과 불편해지고 싶지 않다고. 오히려 이러시는 것이 서로를 더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이야. 그리고 부디 건승하시기를 바란다는 말도.”
“아직 저는 액수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안 들어보셔도 되겠습니까?”
“그래. 헛걸음하게 만들어서 미안하구만.”
“후회하실 수도 있습니다. 여러가지로.”
“이봐. 황 실장.”
이종현 사장은 다소 노기를 품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장 회장님도, 자네도 기저귀를 차고 있을 때부터 현장을 뛰던 나야. 그런 협박쯤은 넣어두시게.”
이종현 사장의 뜻을 꺾기 어렵다는 걸 확인한 황 실장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 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무언가 말할 듯 말 듯, 주저하던 황 실장.
“한영수 회장은 어떻습니까? 사장님이 일이 즐겁다는 이유에 그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까?”
“한 회장님?”
순간 황 실장은 똑똑히 보았다.
한영수의 이름을 말하자 이종현 사장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대단한 양반이지. 마치 장영복 회장님께서 다시 살아 돌아오신 것 같아.”
“사장님께서 하실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군요.”
“그래. 고인께는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마 회장님께서도 그 나이에 그러지 못했을 거야. 그런데··· 황 실장.”
“예. 사장님.”
“나도 자네에게 뭐 하나만 묻고 싶은데.”
황 실장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네는 어떤가. 장은수 회장님에게 자네는 아직 쓸모가 있는 사람인가?”
이종현 사장은 날카로운 눈으로 황 실장을 바라보았다.
내내 표정 없던 황 실장의 볼이 잠시 씰룩거렸다.
LK 그룹 김윤제 회장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