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우리의 우정을 걸고
“새끼··· 왔냐?”
술집 안으로 들어서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나 그곳에 있어 줄 것만 같은, 너무나 친숙하고 고향 같은 음성이었다.
목소리의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이승우가 팔을 높게 들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린이날을 맞은 아이처럼 입을 헤벌쭉 벌린 채.
“뭐 기분 좋은 일 있어? 실실 웃기는···”
자리에 앉으며 주먹을 내밀자, 승우는 위로 들었던 팔을 앞으로 해 나와 주먹을 마주쳤다.
“일단 앉아. 안주는 내가 미리 시켜놨다. 너 홍합탕 좋아하잖아.”
“언제적 이야기를··· 그건 그냥 돈 한 푼 없을 때, 그나마 싸고 오래 먹을 수 있는 안주니까 좋아한 거지. 짜다 싶으면 물 부어서 또 끓여 먹으면 되니까.”
“어쭈, 건물주 되었다고 이제 입맛도 변했다 이거야?”
“··· 싫다고는 안 했습니다.”
콸, 콸, 콸.
이승우는 이미 반쯤 비어있는 소주병을 들어, 내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나는 술을 받기가 무섭게 목구멍 안으로 털어 넣었다.
“하━ 쓰다. 소주 오랜만이네. 그나저나···”
나는 슬쩍 이승우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비어있는 반병이 어디로 갔는지 알려주기라도 하듯, 노란빛의 술집 조명 아래서 승우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뭔데.”
내가 약속 시간에 늦은 것도 아님에도 혼자 미리 와서 혼술을 까고 있었다는 건 녀석이 말 못 할 고민이 있다거나 나에게 큰 부탁을 할 생각이거나가 틀림없다.
아니면, 둘 다 이거나.
“뭐가 인마.”
“내가 뭘 해주면 되냐는 말이야.”
순간, 이승우의 입에서 친근한 사이에서 흔히 나오는 욕설이 튀어나왔다.
“한영수, 이거 귀신이네. 귀신이야.”
“괜히 어떻게 말할까 끙끙대지 말고 속 시원하게 털어놔 봐. 내가 도와줄 것 있어?”
“그게···”
이승우는 손가락을 들어 정수리를 긁적거렸다.
이미 붉어져 있던 그의 얼굴이 사과처럼 더 시뻘게졌다.
“너, 송림프라자 말이야. 우리 가게 옆에 공실 난 거 알고 있지?”
승우의 만리향 옆에는 작은 카페가 하나 있었는데, 최근 임대 계약이 끝난 참이었다.
혹시라도 장사가 잘 안돼서 나간 거라면 건물주로서 마음이 편하지 않을 텐데, 다행히 좀 더 넓은 곳으로 가게를 옮길 생각이라는 뒷이야기 정도는 전해 들었다.
“알지. 그래서?”
“허··· 참. 이게···”
“야, 이승우. 뭐 나한테 사랑 고백이라도 하려고 그래?”
“뭔 미친 소리야.”
나는 승우 앞의 빈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뭘 그렇게 뜸을 들이냐는 소리야. 대충 알 것 같으니까 속 시원하게 이야기해 봐.”
“아니, 이게 막상 또 친구 사이니까 말하기가 불편하네. 네가 오해라도 할까 봐··· 그래, 솔직하게 말할게. 혹시 내가 공실까지 쓸 수 있을까 해서.”
“그래? 욕심을 내는 것 보니 요즘 장사가 괜찮은 모양인데?”
“야, 우리 가게가 어쩌다 보니 짬뽕 성지라고 SNS에 입소문을 탄 모양이야. 난 그런 거 하지 않으니까 몰랐는데 은주가 보여주더라고.”
“너야, 정직하게 장사를 하니까. 결국 진심이 이기는 법이지.”
“그래··· 그래서 우리 가게 음식 먹겠다고 줄 서는 손님들 보면 죄송하기도 하고···”
“알겠어. 그렇게 해.”
나는 두 번 묻지 않고 시원스럽게 말했다.
이승우와 나 사이에는 그깟 돈이 문제가 아니다.
승우에게라면 나는 장기 한쪽도 떼어줄 수 있다.
그 역시 나에게 그렇게 할 거라는 믿음이 있기에.
“정말? 그런데··· 건물 벽 뜯어야 하는 건데···”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 건물 관리인에게 말해 놓을게. 내부 확장 공사 좀 알아봐 달라고.”
“아니야! 아니야!”
이승우는 두 손을 들어 손사래를 쳤다.
“비용은 당연히 내가 내야지. 건물에 해가 안되도록 잘하는 업체를 알아볼게. 보니까 은행에서 내부 확장 공사 가지고도 대출 내주더라. 당연히 시청에 허가나 소방 점검 같은 것도 체크하고.”
나는 양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미 다 알아봤네. 이승우 선생님께서 하고 싶으시다는 데 어떻게 말리겠어. 은주는 뭐라고 해?”
“또 빚내면 몇 그릇을 더 팔아야 하냐고 한숨 푹푹 내쉬고 있지. 그래도 내 꿈이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래. 영수 오빠한테 말 잘하라고.”
내가 승낙의 뜻을 내비치자, 이승우의 눈은 희망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눈을 보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성취감이 가슴 속에 차올랐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다는 건 이렇게나 기쁜 일이구나.
“그리고 은주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나 은주랑 결혼하려고.”
하하하━
나도 모르게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중동의 왕자를 만나고, 대한민국 최고의 경영인과 기 싸움을 하고···
최근에 평범한 사람에게는 너무나 비일상적인 일만 겪었던 나다.
그런데, 이렇게 일상적이고 친근한 소리를 듣게 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잘 생각했다. 언제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으라고 올해는 좀 그렇고··· 내년 초쯤. 가게 확장 공사 들어가면 조금씩 준비해 놓고.”
“내가 만약 벽 뜯는 거 안된다고 했으면 나 때문에 결혼 못 한다고 했겠네.”
“새끼··· 말은.”
“야야··· 술잔이나 들어.”
우리는 잔을 들어 부딪쳤다.
소주가 유난히 달게 느껴졌다.
“이승우··· 네가 나보다 먼저 어른이 되네.”
“인마. 넌 한 열두 살부터 어른인 거 같았거든. 애늙은이 새끼.”
“잘 됐어. 정말. 진짜로 축하한다.”
“야, 야. 한영수. 너 왜 울어?”
이승우가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 어?”
승우의 말에 나는 손을 들어 눈가를 훔쳤다.
아닌 게 아니라 손가락 끝이 살짝 축축해졌다.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여있었다.
드디어 그렇게 외롭던 두 아이가 세상에서 자리를 잡아간다는 생각에 감정이 북받쳤던 모양이다.
“뭐야 이거···”
머쓱해진 나는 괜히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새끼. 결혼은 내가 한다는 데 네가 왜 그러냐.”
나의 눈물은 본 이승우도 금세 코맹맹이 소리를 내고 있었다.
다 큰 시커먼 사내들이 훌쩍거리고 있는 것이 남들 눈에는 형편없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진정 행복함을 느꼈다.
“그래, 결혼 선물로 공사비용은 내가 댈게.”
“아니야! 너 그러면 안 돼. 허락만 해준 것도 고마운데···”
“됐어. 내 건물이거든. 만약에 너 이거 싫다고 하면 건물주로서 확장 못 하게 할 거야.”
“아니, 진짜···”
“그리고 하나 더. 이거.”
나는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테이블 위에 턱 올려놓았다.
“이 차, 너 해라. 너 내가 이 차 뽑았을 때 엄청 부러워했잖아.”
삼각별 로고가 들어간 차 키를 보고 승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너 미쳤어?”
“더 한 것도 해줄 수 있는걸.”
나는 차 키를 집어 이승우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었다.
“어차피 송림 프라자에 세워놓고 잘 안 타게 되더라. 요즘 어디 돌아다닐 시간도 안 나고.”
승우 녀석은 차 키를 손에 쥔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내가 끌어보니까 보험비랑 유지비가 보통이 아니긴 하더라. 이거 끌려면 너 짬뽕 더 열심히 팔아야 해.”
나는 낮게 흐흐 웃었다.
그런데 웬걸,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선물에도 이승우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한영수.”
그는 진지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너 요즘 이상한 짓 하고 다니는 거 아니지?”
“뭐가 인마.”
“로또 돼서 건물 샀다는 것도 솔직히 안 믿기기는 하지만, 너라면 뭔 수가 있어서 그랬거니 넘어갔어. 그런데 아무리 우리가 친구라도 공사 비용 다 내줘··· 거의 2억은 나가는 차를 그냥 주겠다고 해···”
“우리 사이에 2억이 뭐.”
“야! 2억이면 사람이 죽고 살기에 충분한 돈이야.”
승우의 목소리가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도박이라도 하는 거야? 아니면 무슨 나쁜 일이라도 하는 거냐고.”
“네가 아는 한영수가 그럴 사람이냐.”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더 걱정되는 거지.”
이런···
친우의 결혼 소식에 들뜬 나머지 내가 너무 성급한 행동을 했구나.
승우는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늘은 기필코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 전까지는 집에 보내주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나는 말없이 승우의 빈 잔을 다시 한번 채웠다.
그래. 어차피 언젠가는 말해야지 싶긴 했었다.
“일단 한잔하자.”
이승우는 계속해서 내 얼굴을 바라본 채 손만 움직여 소주잔을 제 입에다 가져다 대었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다만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손 떼자, 영수야.”
“이제는 손을 뗄 수가 없는 지경까지 들어왔는걸.”
“야! 이 새끼야!”
이승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다른 테이블에 있던 손님들이 우리를 바라볼 지경이었다.
이승우는 이를 앙다문 채로 손님들을 향해 죄송하다는 뜻으로 머리를 숙였다.
“그동안 숨겨서 미안하다. 언젠가는 말할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기회를 놓쳤네.”
“인마, 너···”
이승우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녀석은 지금 자기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승우야. 너, 고왕 건설이라고 들어봤어?”
“고왕 건설···?”
“그래. 아파트도 짓고··· 뭐 이것저것 하는 기업 말이야.”
“그걸 몰라서 되물었겠냐.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나오는데. 혹시···”
이승우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너 혹시 건달이라도 된 거야? 뭐 용역 깡패라도 하는 거냐고? 이 새끼가 그렇게 운동에 미쳐 살더니···”
빈약한 상상력이지만, 재미있는 추측이라 나는 빙긋 웃었다.
“고왕 건설 회장이 최근에 바뀌었어. 너 그 회장이 누군지 알아?”
“모르지. 나같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소시민이 대기업 회장이 누군지 알게 뭐냐.”
“한번 검색해봐.”
내 말에 이승우는 홀린 듯이 휴대전화를 꺼내 손가락으로 타자를 쳤다.
그리고, 녀석의 엄지손가락이 스크롤을 몇 번 내리고선.
“뭐야··· 새로 바뀌었다는 회장이 너랑 이름이 똑같네.”
“똑같은 게 아니야. 그거 바로 나야.”
이승우의 입이 떡 벌어졌다.
체감상 그렇게 5분, 아니 10분의 시간은 지난 것 같았다.
“너··· 지금 진짜로 걱정해주는 친구한테 그렇게 농담이나 할 때야?”
“농담 아닌데.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그런 쪽으로는 나 젬병인 거.”
“구라 치지마.”
“진짜야. 우리의 우정을 걸고.”
우당탕━
이승우의 손에서 힘없이 녀석의 휴대전화가 떨어졌다.
그 전화기는 한번 테이블 모서리를 치고 중력의 법칙에 따라 바닥으로 수직 낙하를 했다.
이승우는 제 휴대전화를 주울 생각은 하지도 않고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러더니 미친 사람처럼 나를 술집 밖으로 잡아끌기 시작했다.
“야, 왜 그래. 이거 놓고 말해라.”
“너, 나 따라와 봐.”
씩씩대며 나를 끌고 나온 이승우는 얼마간 길을 걸었다.
그러더니 녀석은 손가락을 들어 멀리 보이는 아파트 하나를 가리켰다.
“저거, 저 아파트를 세운 회사 말이야. 고왕 건설. 네가 정말 저기 회장이라고?”
“그래.”
이승우는 내 얼굴을 곱씹어 뜯을 듯이 바라보았다.
“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마침내 나의 말에 거짓이 없음을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승우가 말했다.
“많은 일이 있었지. 어디부터 너에게 말을 해주어야 할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에게 숨겨왔던 비밀을 조금씩 풀기 시작했다.
“있잖아. 나, 날 낳아준 아버지를 찾았어.”
그 양반, 대단한 사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