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음모의 소굴
- 당신은 날 미워하는 게 아니야. 날 겁내는 거지.
차라리 차마 입에 담을 없는 천박한 욕설을 들었더라도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날 돌아가는 길, 장은수의 운전기사는 사람 몇쯤은 도륙을 내버릴 것 같은 회장의 분위기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하지만 장은수는 그저 감정적이기만 한 인물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가 그렇게 평면적인 둔재에 불과했다면 장영복 회장이 그 어떤 이유에도 태상 건설의 회장 자리를 넘겨주지 않았을 테니.
장은수는 그 이후로도 한동안 한영수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불같은 분노는 식혀두고 차가운 머리로 감히 자신과 맞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서자에 대해 궁리를 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늘이 미리 정해준 것처럼 만나자마자 둘도 없는 짝이 되곤 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눈만 한번 마주쳤음에도 이자와 나는 같은 하늘을 지고 살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드는 악연도 있을 것이다.
장은수는 단 한 번의 만남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과 한영수는 후자의 관계가 될 것임을.
그리고 하나 더 확실히 알게 된 것이 있었다.
‘··· 내가 저 사생아 새끼를 너무 과소평가했어.’
장은수는 이미 아버지의 유서가 공개되기 전에 한영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한영수라는 놈의 존재가 고마울 지경이었다.
꼭꼭 숨기려고 했던 아버지의 오점을 알게 되었으니.
그 카드를 내밀었을 때, 장은수는 처음 보았다.
그렇게 당황하는 장영복 회장의 얼굴을.
한영수는 장은수에게 딱 그 정도였다.
아버지가 살면서 저지른 실수.
한영수에게 감시를 붙인 것도 그를 경계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경계라는 것도 체급이 비슷해야 가능한 것 아닌가.
그저 한낱 사생아 주제에 쓸데없는 권리를 주장해서 귀찮고 부끄러운 일을 만들까 봐 조금, 아주 조금 신경이 쓰였을 뿐이다.
그런데, 잠잠하던 한영수는 어느 순간부터 광폭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쭉정이 같은 자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재계에서 잔뼈가 굵은 윤일중 회장을 손쉽게 쓰러트렸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장은수가 이상한 기류를 느끼기 시작했던 것은.
그리고, 그와 얼굴을 맞대보고선 장은수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한영수는 절대 아버지의 실수 따위가 아니다.
자신을 향해 불같은 기운을 내뿜는 한영수를 보며 분명 장은수는 어떤 위협 같은 것을 느꼈다.
고왕 건설, 그리고 에메랄드 시티가 끝이 아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그래. 네 놈이 보통이 아닌 것은 알겠다. 할 수 있으면 해보라고? 그래. 그럼 이제부터는 진심이 되어보도록 하지.’
나폴레옹 보나파트르.
생전에 유럽을 손아귀에 넣었던 이 역사적인 걸물도 처음에는 그저 낙하산으로 사령관 자리에 오른 촌놈 취급받지 않았다던가.
한영수도 그냥 내버려 두면 어디까지 클지 모른다.
마치 아무리 높은 벽도 타고 오르는 담쟁이넝쿨처럼.
“회장님. 부르셨습니까.”
황 실장이 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오고 나서야, 장은수는 한영수에 관한 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
“그래. 황 실장.”
장은수는 황 실장을 잠시 바라보았다.
황상규 실장.
그는 표정이 많은 남자가 아니었다.
장은수가 그를 칭찬하거나, 모진 말과 행동을 할 때도 황 실장은 한결같이 두꺼운 입술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가 같이 일한 지 얼마나 되었지?”
“제가 회장님을 모신지 이제 12년입니다.”
“그래. 내가 그룹 본사에서 일할 때부터였지.”
“예. 맞습니다.”
“12년이라··· 어찌보면 가족보다 더 오래 알고 지냈군. 하기야, 나야 결혼 생활이 길지도 않았고 황 실장은 기러기 아빠 신세니 더더욱 그래.”
“송구스럽지만, 맞습니다. 회장님.”
“어떻게 먹고 자는 건 지낼만해? 그 좁은 오피스텔에서.”
“혼자 몸이니 오히려 편합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황 실장이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아서 좋아.”
“...”
황 실장은 장은수의 말의 뜻 속에 무엇이 숨어있는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말을 아끼는 건 좋은데 해야 할 말까지도 안 하는 건 조금 문제가 있지 않아?”
장은수의 말에 순식간에 둘 사이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길게 찢어진 장은수의 눈을 보자 황 실장의 등 허리께에는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한영수한테 꼬리 붙인 거, 들통났다는 이야기를 나한테 왜 안 했지?”
“··· 죄송합니다. 회장님께서 질책하실까 봐 겁이 났습니다.”
황 실장은 알고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차라리 모지리 행세를 하는 것이 장은수 회장의 화를 누그러트리는 방법이라는 걸.
“그래서 들통난 후에도 계속 사람을 붙였나.”
“··· 아닙니다.”
황 실장은 장은수에게 거짓을 고했다.
태상의 굵직한 줄기인 자동차 그룹의 회장과 사생아의 은밀한 만남.
이들이 머리를 대고 뭘 연구하고 있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렇기에 황 실장에게 있어 이 카드는 반드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써야 하는 것이었고, 특히나 장은수에게는 철저히 숨겨야만 했다.
은수, 은호 형제.
그리고 한영수까지.
조만간 태상 그룹에는 격동의 시기가 몰아칠 것이다.
장은수의 뒤만 닦아주다가 나가리가 될 수 없다고 은밀한 다짐을 하는 황 실장이었다.
“회장님. 필요하시다면 다시 뒤를 밟아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확실한 자들을 구해···”
“입 다물어. 이미 뒤를 밟기에는 대가리가 너무 커졌어. 일 더 벌이지 말라고. 그 사생아 새끼에게 우스운 꼴이 된 건 한 번이면 충분하니까.”
“면목이 없습니다. 회장님. 모든 것은 저의 책임이고 과오입니다.”
“··· 야, 황상규.”
머리가 땅바닥에 떨어질 듯이 고개를 숙이고 꼬리를 만 개를 연기하고 있던 황 실장.
그는 장은수가 평소와 달리 냉랭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그 고개를 퍼뜩 들었다.
장은수는 황 실장을 향해 눈으로 칼날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천인공노한 범죄를 저지른 용의자를 심문하는 수사관의 눈도 이렇게 날카롭지는 않을 것 같았다.
“넌 지금 큰 실수를 하나 했어. 여기서 더 실수하지 마라. 또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 한영수 관련해서 말이야.”
네 속마음쯤은 다 꿰뚫어 보고 있으니 빨리 다 실토해라.
장은수의 눈이 입을 대신해 말하고 있었다.
황 실장은 눈동자의 떨림을 참아내려고 온 정신을 기울여야 했다.
“없습니다.”
황 실장은 최대한 짧게 말했다.
말이 길어졌다가는 장은수에게 모든 사실을 들통나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사생아 새끼 말이야··· 묘하게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더군. 입을 터는 솜씨 하며 보통이 아니야. 설마하니 그 새끼의 뒤를 쫓다가 황 실장까지 거기에 물들어버린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모시는 분은 오직 회장님뿐입니다. 별 볼 일 없는 제가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은 모두 회장님 덕분입니다. 제 자녀가 미국까지 가서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은혜를 베풀어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게 머리 검은 짐승들이지.”
어쩐 일인지 오늘의 장은수는 황 실장이 아무리 꼬리를 흔들어도 눈에 준 힘을 풀지 않았다.
“회장님, 저는 이 회사에서 더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습니다.”
어쩔 수 없이 황 실장은 자신의 진심을 아주 조금만 털어놓기로 했다.
“제 미래는 온전히 회장님께 달려있는데, 제가 어떻게 다른 마음을 먹겠습니까. 저는 제 분수를 알고 있습니다. 일개 머슴은 시키는 일이나 잘하고 거기에 따라오는 상만 기대하면 된다는 것 말씀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밝힘과 함께, 최대한 배를 넙죽 깔았다.
그제야 비로소 장은수의 눈매가 둥글어지기 시작했다.
“좋아. 오늘 회의 준비는 모두 끝났겠지?”
“예. 회장님, 계열사 사장들까지도 전부 집합시켰습니다.”
“그래. 다들 기저귀라도 하나씩 차고 있으라고 해. 내가 할 말이 아주 많으니.”
“알겠습니다.”
“나가봐.”
황 실장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설 때, 장은수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그를 다시 불러 세웠다.
“황 실장. 그런데 비서실에 새로운 대리 있잖아. 최영도라고 했나?”
“네. 맞습니다.”
“그 친구, 어때? 좀 쓸만해?”
“아직 배우고 있습니다. 회장님 의전에 불편함이 없도록 잘 교육하겠습니다.”
“어디 어떤 사람인지 말 좀 섞어봐야겠어. 시원찮으면 바로 내보낼 테니까. 잠깐 들어와 보라고 해.”
“알겠습니다. 회장님.”
* * *
최영도 대리는 차렷 자세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육 개월 전에 비서실로 부서를 옮긴 그였다.
비서실에 근무한다 뿐이지, 사무실에서 전화기만 붙잡고 일정표만 짜던 그였는데 이렇게 빨리 회장과 독대하는 순간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긴장과 기대와 불안함에 사정없이 쿵쿵 뛰는 최 대리의 심장은 금세라도 갈비뼈를 박살 내고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봐, 최 대리.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앉지, 그래.”
“아닙니다. 회장님!”
“앉아. 윗사람이 편하게 있으라고 하면 그 말을 따르는 것도 예의야.”
“··· 아, 알겠습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장은수는 잔뜩 긴장해있는 최 대리의 얼굴을 흘낏 훔쳐보곤, 그의 이력서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국내 명문대를 우수한 학점으로 졸업.
최상급 어학점수에 다수의 마케팅 공모전 입상.
거기에 봉사활동 이력까지.
남들이 보면 대단하다 싶을 스펙이었지만, 장은수의 눈에는 그저 복사기에서 찍어낸 것처럼 흔하디흔한 이력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최 대리의 그 점이 장은수는 마음에 들었다.
이것은 최영도 대리가 시스템을 충실히 따라온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었으니.
‘평생을 틀에 갇혀 산 인간은 통제하기도 쉬운 법이지.’
“이력이 굉장히 좋군. 훌륭해.”
장은수는 속마음과 정반대의 말을 입으로 뱉었다.
아까 황 실장을 대할 때와 달리, 장은수의 얼굴에는 제법 온화한 기색까지 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최 대리는 퍽 감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비서실 일은 할 만한가.”
“예.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저런, 열심히로는 부족하지.”
순간 최 대리의 얼굴이 굳었다.
혹시라도 내가 말실수를 한 건가?
아니면 내가 업무에서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걸까?
최 대리의 정직한 표정은 마음속 걱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하나만 물어보지. 최 대리가 취업을 할 때 말이야, 수많은 기업 중에 왜 하필 태상을 선택했지?”
“아···”
잠시 머뭇거리던 최 대리는 이내 기계처럼 말을 줄줄 뱉어냈다.
면접관 앞에서나 떠들법한 재미없는 이야기였다.
“아니, 그런 소리 말고. 우리 더 심플하게 가자고.”
장은수는 칼같이 최 대리의 말을 잘랐다.
“심플하게··· 말씀이십니까.”
“적성이니 전공이니, 그런 소리는 집어치우란 말이야. 태상이 최고이기 때문 아닌가? 그래서 이 회사에 들어오게 된다면 나도 최고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을 것이고.”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기에 최 대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회사에 들어와 보니 어때? 최고가 된 기분이 들던가?”
“그게···”
“물을 것도 없겠지. 피라미드의 꼭대기는 아득하기만 하니까. 매일같이 치열한 경쟁에 줄을 잡기 위한 정치질··· 지금쯤 되니 나르는 존재는 고작 회사의 톱니바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말이야.”
최 대리의 눈이 똥그래졌다.
이건 도무지 회장이 사원을 붙잡고 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이봐, 최 대리. 최고는 절대 그렇게 되는 게 아니야. 어떤 이들이 진흙탕에서 아무리 멱살 잡고 싸워봐야 옷만 더러워지는 법이야. 뭐하러 옷을 더럽히나. 기회가 왔을 때 그걸 잡으면 바지에 흙 하나 안 묻히고 위로 올라갈 수 있는데. 최 대리는 어떤 사람인가. 돌아서 가는 걸 좋아하나?”
이쯤 되면 뭔가가 있음을 최 대리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똑바로 가는 길을 좋아합니다.”
“그래. 지금 최 대리는 그 기회를 만난 거야. 내가 최 대리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
장은수의 눈이 가늘고 길게 찢어졌다.
그 눈을 보자 최 대리는 잠시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지만, 금방 잊어버렸다.
무려, 회장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나.
너에게 기회가 찾아왔다고.
“회장님, 말씀만 해주시면 뭐라도 하겠습니다.”
“좋아. 자네 상사 황 실장 말이야. 앞으로 황 실장의 동태를 좀 감시해줘야겠어.”
“··· 예?”
“지근거리에서 일하고 있으니 어렵지 않겠지. 황 실장의 사소한 행동이라도 잘 기록해 두었다가 나에게 따로 보고하면 돼.”
“하지만 그건···”
“황 실장이 처음 나와 일하기 시작했을 때가 딱 최 대리 정도의 나이였지, 아마?”
순간 최 대리의 눈에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어때, 힘들겠나?”
“아닙니다. 회장님. 말씀하신 대로 사소한 행동이라도 상관없겠습니까.”
“물론.”
“예. 그럼 말씀 따르겠습니다.”
“좋아. 그럼 나가봐.”
최 대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가 땅에 닿을 듯이 장은수에게 인사를 했다.
“아 참,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건 최 대리와 나, 둘만의 비밀이야.”
장은수는 한쪽 입꼬리를 비죽이 올렸다.
“만약 최 대리가 어디 가서 입이라도 뻥끗하면 회사에서 짐 쌀, 아니··· 그 이상의 각오를 해야 할 거야.”
뭐, 작은 일 하나라도 시키면 자기가 대단한 임무라도 맡은 것처럼 열과 성을 다하는 것이 아랫놈들의 특징.
최 대리는 이제 모든 열과 성을 기울여 첩자 짓을 할 것이다.
‘솔직히 뭐라도 영양가 있는 걸 건져낼지는 의문이지만.’
다시 혼자가 된 장은수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