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54화 (148/200)

154. 뜻밖의 손님

“잘하셨습니다. 의연하게 대처하셨군요.”

이종현 사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현장에 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니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아메드 빈 알리 왕자의 머릿속에 고왕과 한영수 회장님의 이름은 확실히 각인시켰을 것 같군요. 그나저나 회장들이 할 말들을 다 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니··· 매번 하는 생각이지만 한 회장님 안에는 노련한 능구렁이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나이답지 않게요.”

“그 자리에서는 남들과 똑같이 행동하면 절대 주목을 받지 못하겠구나 싶었을 뿐이에요.”

사실 아메드 빈 알리 왕자와의 만남에서 확실한 무언가가 결정될 거라고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종현 사장의 말처럼, 도하 호텔 사건으로 간신히 알린 우리의 이름을 굳건하게 공구리 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심정이었다.

“이제 앞으로가 중요하겠군요.”

이종현 사장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입찰은 어떻게 진행될까요?”

회장 자리에만 앉아있다 뿐이지, 건설 업계에 대해서 나는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이 있었다.

다행히 지금 내 앞에는 이 분야에서는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선생님이 있었다.

잘 모르는 것이 있다면, 어설프게 뭉개보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보다 캐물어 배우는 것이 부끄러울 수는 있어도 훨씬 현명한 행동이다.

“일반적으로 국가를 상대로 하는 사업이라면 입찰을 희망하는 기업들이 자유롭게 가격을 제시하는 공개 경쟁 입찰 방식을 사용합니다.”

이종현 사장은 ‘기역은 가지, 니은은 나비.’라고 한글을 가르치는 것처럼 나에게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건설회사의 회장이 되어 그것도 모르냐는 식의 질책은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는 그는, 나에게 무언가 알려줄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운 듯 보였다.

“하지만, 에메랄드 시티는 그런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을 겁니다. 어디까지나 제 예상이지만 공고조차 없지 않을까 싶어요. 자기들 입맛에 맞는 기업들을 쇼핑하듯 고를 겁니다. 돈이 넘쳐나는 곳이니까요. 그것이 그들의 방식입니다.”

“이른바 수의 계약이라는 거군요.”

“네. 계약과정은 철저하게 불문에 부치겠지요. 비밀 협약 각서까지 작성할 겁니다. 판에서 나가떨어지면 그야말로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어느 정도는 참여시킬 기업들을 정해놨지 싶어요. 전 세계를 뒤져 가장 이름값이 높은 기업들로요.”

생태계의 지속을 위한 친환경이니 종교와 인종을 넘어선 통합의 도시니 아름다운 말로 한껏 포장되어 있지만, 결국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가장 큰 목적은 ‘과시’가 아닐까?

미국의 엄청난 셰일 가스 공세와 유럽의 남미 에너지 시장 공략에 화석연료로써 석유의 독점적인 지위와 수요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미국에 소비되지 않은 휘발유가 무려 2억 배럴을 넘어선다는 엄청난 뉴스가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20년도에 유가가 대폭락하면서 사상 초유의 마이너스 유가 사태까지 터지지 않았던가.

물론 저 먼 서방에서 전쟁이 터지면서 다시 기름값이 매섭게 올랐지만, 중동의 산유국들로서는 저간의 사태에 대해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에메랄드 시티 프로젝트는 자신들의 건재함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일종의 선포이리라.

더불어 카타르 내부를 들여다보자면 이 사업은 차기 왕권의 향방이 걸려있는 중요한 길목이기도 하다.

사정이 이러니, 당연히 에메랄드 시티 프로젝트에는 최고 중의 최고들만 참여시키려고 하리라.

“그 대단한 네임밸류의 기업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군요.”

절벽을 열심히 기어올랐다 싶어 위를 올려다보니 아직도 벼랑이 까마득한 기분이 들었다.

이종현 사장이 내 얼굴을 보더니 빙긋 웃었다.

“설마하니 마음이 흔들리기라도 하시는 건가요.”

“몰랐던 것도 아니지만 새삼 터무니없는 짓을 덜컥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긴 하네요. 아주 조금요.”

“우리와 에메랄드 시티에 대해서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는지는 들어보셨습니까?”

당연히 들어보았다.

고왕 건설의 주가가 계속해서 오름세를 보이자, 비아냥거리기 좋아하는 누군가는 단언을 했다.

고왕은 저 세계적인 프로젝트에 낄 깜냥도 안되면서 주가 한번 띄워보겠다고 냄새만 잔뜩 풍기고 다닌다고.

그 바닥이 조만간 드러날 것이고 지금 오른 것의 곱절을 토해내야 할 것이라고.

“예. 좋은 이야기보다는 안 좋은 소리가 많더군요.”

“그래서 더 서운합니다.”

“··· 예?”

섭섭하다는 이종현 사장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안 된다고 말해도 저와 회장님만은 반드시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거라고 믿었는데 말입니다. 절 스카우트하실 때 했던 약속을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집사람 바가지도 힘들었지만···”

이종현 사장은 농담으로 말을 끊으며 하하 웃었다.

그것도 잠시, 그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저를 여기까지 이끈 것은 처음 만날 때, 자신감으로 빛나던 회장님의 눈동자였습니다.”

이런···

그의 경력에 비하면 애송이와 다를 게 없는 나를 이렇게 믿어주는데, 내가 어찌 흔들릴 수가 있을까.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뽑았구나.

이종현 사장의 진심이 고마웠다.

나는 잠시 무너져있던 자세를 바르게 했다.

“물론입니다. 잠시 가야 할 곳이 아득해 보였을 뿐, 사장님을 모셨을 때 그 마음은 여전히 하나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어차피 에메랄드 시티 프로젝트에서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정해져 있습니다.”

“··· 말씀해주세요.”

“에메랄드 시티는 초고층 호화 건물들로 가득 채워질 겁니다. 그런 건물들의 설계는 미국 회사들의 몫이에요.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미국이나 유럽 쪽의 내공은 우리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어요. 그건 단시간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나는 말 잘 듣는 학생처럼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종현 사장의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시공 기술만은 속된 말로 비벼볼 만합니다. 설계대로 잘 만드는 것은 해볼 만하다는 소리입니다. 특히 여기에 와서 보니, 국내 최고라는 태상건설과 비교해도 기술이 부족하지 않아요. 이건 괜한 소리가 아니라 제가 냉정하게 비교한 겁니다. 신공법으로 써 봄 직한 도전적인 아이디어들도 많이 묵혀놓았더군요. 직원들은 제가 계속 독려하겠습니다. 회장님은 왕자를 만났던 것처럼 큰 물꼬를 터주세요.”

“··· 고맙습니다. 사장님. 한낱 가능성에 불과하던 것을 사장님이 현실로 만들어주고 계시군요.”

“이미 열차는 궤도에 오르지 않았습니까. 계속 달려야지요.”

의기투합.

서로의 뜻을 공유한 나와 이종현 사장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때였다.

똑똑 두드리는 소리도 없이 회장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 죄송합니다. 회장님. 너무 급한 일이라.”

“괜찮아요. 말씀하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직원은 상기된 표정으로 얼마간 숨을 몰아쉬었다.

“··· 왕자가.”

“네?”

“카타르의 아메드 빈 알리 왕자가 여기를 찾아왔습니다.”

* * *

“미스터 한, 부디 나의 결례를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을 사과드립니다. 오늘 나는 카타르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한국을 떠나기 전에 미스터 한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가고 싶더군요.”

이 회사에서 영어를 제일 잘한다는 직원은 잔뜩 긴장된 얼굴로 왕자의 말을 나에게 통역하였다.

잔뜩 긴장한 얼굴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종현 사장도 이 예측하지 못한 사태에 적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연신 손바닥으로 바지춤을 훔치는 것이, 진득하게 땀이라도 난 모양이었다.

“별말씀을요. 왕자께서 이곳까지 찾아주셔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고왕 건설 직원 모두가요.”

“들어오면서 보니 대단히 아름다운 건축입니다. 고왕 건설의 사옥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신사옥으로 이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미리 오신다는 말씀이라도 주셨으면, 사람을 붙여서 안내를 해드렸을 텐데요.”

나의 말에 왕자는 느긋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공항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약속 없는 방문인데 대접까지 받으려고 하면 예의가 아니지요. 그런데···”

아메드 빈 알리 왕자는 고개를 들어 회장실을 쭉 둘러보았다.

“미스터 한의 취향이 굉장히 고급스럽군요. 이 회장실이 나는 아주 마음에 듭니다. 진심으로요.”

허, 이거 윤일중 회장에게 감사라도 해야 하나.

내 취향과 무관하게 꾸며진 방이었지만, 왕자의 칭찬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왕자는 손을 들어 자신의 턱수염을 매만졌다.

“미스터 한에게 사과를 하지 않으면 알라께서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순간 통역을 하던 직원이 말을 더듬거렸다.

왕자가 사과를 하고 싶다는 말에 그는 자기 귀를 의심했을 것이다.

“사과라니···”

어리둥절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미스터 한에게 오만하게 굴었습니다. 부디 마음에 담아두시지 않길 바랍니다.”

아···

고왕과 나의 경력을 지적했던 그걸 말하는 건가.

하지만 의문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솔직히 왕자야말로 그걸 마음에 담아두었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일단 나는 두 손을 내저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씀입니다. 글로벌 기준에서는 당연히 저희가 작은 회사로 보였겠지요. 사감은 전혀 없으니 그런 말씀은 거두셔도 좋습니다.”

“알라께서는 용감한 자를 사랑한다.”

왕자는 내가 그를 만났을 때 했던 말을 복기라도 하듯 따라 했다.

“미스터 한이 그 말을 했을 때, 놀랍게도 나는 미스터 한의 눈에서 분명히 무언가를 보았습니다. 과연 알라께서는 어디나 계신다는 우리의 진리를 새삼 다시 깨달았지요.”

양쪽 입꼬리를 올려 웃는 아메드 빈 알리 왕자.

“그런 사자와 같은 남자에게 실수를 하는 것은 나에게 작지 않은 오점이 될 것입니다. 미스터 한, 내 사과를 받아주시는 겁니까.”

“··· 저에게 그러실 필요도 없지만, 왕자께서 그쪽이 마음이 편하시다면 기꺼이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 ???? ?????.”

왕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유창한 영어 대신 아랍어로 말을 했다.

그 뜻을 알 수가 없으니 나는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왕자께서는 미스터 한이 이제 자신의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원 중 한 명이 왕자를 대신해 그 뜻을 해석해주었다.

나도 모르게 테이블 아래서 주먹을 꽉 쥐었다.

“··· ??? ???? ?????.”

어설프게 왕자가 말했던 아랍어를 그대로 따라 말했다.

하하하━

내 말을 듣고 왕자는 기분 좋게 웃었다.

“미스터 한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만 일어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미스터 한. 우리는 꼭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저 역시 또 뵐 수 있는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나는 왕자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나오지 마세요.”

“아닙니다. 손님을 환대하는 것이 카타르의 전통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건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가실 때까지 배웅하겠습니다.”

왕자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이종현 사장이 내 손목을 꽉 잡아 쥐었다.

그의 손아귀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이종현 사장.

그는 정말이지 당장 울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음모의 소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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