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어디 한번 퍼부어봐라, 나는 더 강해질 테니까
“··· 회장님 정도라면 그 정도의 소양은 충분히 가지고 계실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어떻게···'
장은수는 한영수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자기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를 뱉는 한영수의 입술이 마치 슬로비디오를 재생하는 것처럼 느리게 보였다.
- 넌 아직 소양이 부족하다.
장영복 회장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 며칠 전 그에게 했던 말이다.
사실상 그것이 아버지와 제대로 된 마지막 대화였다.
사정이 그랬으니, 장은수를 그토록 성나게 했던 저 말이 사실상 그에게 남긴 아버지의 유언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정말 공교롭게도, 지금 한영수가 그에게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장은수로서는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순간, 장은수의 눈에 장영복 회장과 한영수가 겹쳐 보였다.
이미 오래전에 땅속에 묻힌 그의 아비가 살아서 돌아온 것만 같았다.
태양이라도 담은 듯 뜨거운 갈색 눈동자.
쉽게 패배의 말을 내뱉지 않을 것 같은 꾹 다문 입술.
세상의 소리를 모두 들을 것 같은 큰 귀까지.
그것은 모두 장은수가 아버지를 닮지 못했던 것들이다.
그랬다.
장은수가 한때 존경의 눈으로 우러러보던 젊은 시절의 장영복 회장이 지금 그의 옆에 있었다.
‘··· 그래. 확실히 닮았어. 씨는 못 속인다, 이건가.’
장은수는 저도 모르게 아버지와 한영수의 닮음을 인정해버렸다.
생각이 먼저였고,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 다음이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장은수의 심장을 분노로 가득 채웠다.
아주 약간의 패배감과 섞인 채.
우습게도 자기 생각에 스스로 모욕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따위 놈이 아버지와 닮았다고? 보잘것없는, 먼지 같은 삶을 살아온 저 사생아 새끼가?’
장은수는 억지로라도 더 강하게 부정을 했다.
그래야만 잠시라도 한영수에게서 아버지를 투사했던 자신의 머릿속을 깨끗하게 비울 수 있다는 것처럼.
장영복 회장은 장은수에게 아주 높은 벽이었다.
하지만 그 벽도 결국 시간 앞에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자신을 가로막는 존재를 넘어섰는데, 갑자기 다시 그 벽이 세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다니!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와 강한 에고의 복합체인 장은수로서는 그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이봐, 한영수.”
장은수는 몸속에서 더러운 것을 게워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경고하지. 네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마.”
* * *
장은수는 얼음처럼 굳어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볼 뿐이었다.
방금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했나?
아니,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눈은 나를 바라보고 있되,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분명 내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X선처럼 나를 통과해 그보다 더 먼 어딘가를 향하는 것 같았다.
마치 내 뒤에 어떤 거대한 존재가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유가 뭘까.
그에게 분명 듣기 좋고, 예쁜 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쯤이야, 장은수도 얼마든지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서로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친구도, 동맹도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렇다면 나의 말 몇 마디가 저자를 저렇게까지 굳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침묵이 계속 이어졌다.
긴 침묵에 조금 과장하자면 그의 건강 상태가 걱정되기 시작할 정도였다.
예의상 괜찮냐는 말을 건네려고 할 때, 비로소 장은수의 입이 열렸다.
“경고하지. 네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마.”
엄중한 선전포고라도 하듯 장은수는 잔뜩 무게를 잡고 말했다.
··· 잠시라도 걱정을 해주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오랜 침묵 속에서 준비했던 말이 겨우 저거란 말인가.
장은수의 말은 가뜩이나 얼음장 같던 분위기에 커다란 균열을 내었다.
그가 드디어 판을 깐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 둘은 그 균열 아래 숨어있던 날 것 그대로의 본심을 말하게 되리라.
당연히 모를 리가 있겠는가.
장은수가 힘이 있는 자라는걸.
어쩌면 내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으로.
하지만 과연 그 힘이 장은수 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일까?
인간 대 인간으로서 동등한 출발점에서 시합을 한다면 결승선을 먼저 통과하는 것은 누구일까?
생각이 여기까지 닿자 장은수의 협박이 어쩐지 두렵지 않았다.
“비아냥댈 의도는 아닙니다만, 처음 알았습니다. 회장님이 제가 하고 싶은 것, 제 자유를 통제할 수 있는 분이라는 걸요. 도대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왜 자꾸 내가 네 이름을 들어야 하는 거지? 여기는 너의 무대가 아니야. 네가 원래 있었어야 하는 자리로 돌아가서 조용히 살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차 여사가 너에게 큰돈을 물려주었잖아. 그 사람처럼 돈놀이라도 하던지. 네가 졸부처럼 살면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은 모두 널 부러워할 거야. 그 정도 세계에서 만족하란 말이야.”
“··· 할머니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세요. 당신은 그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는 저 뱀 같은 눈을 가진 사내의 멱살을 잡아 차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다는 욕망을 꾹꾹 눌러야 했다.
“당신이라···? 이제 너도 조금은 솔직해졌군. 그래, 그럼 나도 솔직하게 말하지. 난 네가 싫다. 네 얼굴을 보고 나서 이제 확실하게 알게 되었어. 어떤 사람은 아무런 이유가 없이 싫어질 수가 있다는 것을. 설령 널 좋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가 백 가지가 넘는다고 해도 여전히 네가 싫을 것 같군.”
“··· 왜 그렇게까지 날 미워하는 겁니까. 내 출생이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의 힘들었던 과거가 당신에게 무슨 피해라도 주었습니까?”
“사람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편인가? 네 과거 따위에 아무런 관심도, 흥미도 없어. 방금 말한 것처럼 이유는 중요하지 않아.”
순수한 적의.
장은수에게서 그것을 느꼈다.
지금 그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열심히 주장하고 있지만,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설령 본인은 의식하고 있지 못하더라도 그의 무의식을 잘 뒤져보면 분명히 나를 이리도 거부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걸 찾아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장은수를 위태롭게 만들 무기가 될지도 모르니까.
“좋습니다. 저도 당신··· 아니, 회장님과 아름다운 사이가 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아까 여기가 나의 무대가 아니라고 하셨죠? 재밌네요. 절 이 무대로 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회장님인데. 그건 모르셨나보네요.”
장은수의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그는 눈동자를 굴려 나를 천천히 탐색했다.
내 말 속에 숨겨져 있는 저의를 확인 하겠다는 듯.
“진심으로 조용히 살려고 했습니다. 내 출생, 그거 그냥 혼자 가슴 속에 묻고 가려고 했단 말입니다. 그동안 고생 많이 하면서 살았으니, 이제는 편하게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아보자고. 그래요. 뭐, 한량처럼 산다고 해서 나쁠 거 있겠습니까. 회장님 말마따나 어쩌면 그게 모두가 꿈꾸고 부러워하는 삶인 것을.”
“...”
“그런데 회장님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고윤아 변호사 말입니다.”
사나운 시선이 교차했다.
비록 말이 오갈 뿐이었지만, 분명히 지금 우리 사이에는 칼이 있었다.
서로를 향해 끝을 겨누고 있는.
“고윤아 변호사에게 해코지만 안 했다면 그렇게 지냈을 겁니다. 그때 깨달았어요. 그리고, 다짐했습니다.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있겠다고 해서 날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겠구나. 좋다, 그렇다면 나도 날 지켜야겠구나. 그러기 위해서는 더 강해져야겠구나.”
장은수는 가는 눈 위에 눈썹만 꿈틀댈 뿐 내 말에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어쨌든 이 무대 위에 날 올려줘서 감사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에 서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어요. 내가 지금 이 순간들을 진정으로 즐기고 있다는 걸. 그렇게 외면하려고 했지만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더군요. 내가 장영복 회장님의 자식이 맞다는 걸. 내 몸의 반쪽에 흐르고 있는 경영의 신의 피가 들끓기 시작했다는 걸.”
으득━
장은수가 어금니를 꽉 깨무는 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졌다.
“··· 피?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냐?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지? 부끄럽지도 않은가?”
부끄러워?
내가 왜?
장은수는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했다.
“감히 그렇게 주제넘은 말을 입에 담아? 머저리 같은 회장 하나 밟고 그 자리에 올라섰다고 건방진 소리를 잘도 하는구나. 다 쓰러져가던 회사, 푼돈으로 주워놓고서는 네가 뭐라도 된 줄 알고 말이야.”
“아까부터 분수가 어떻고 주제니, 자리니··· 그런 말만 하시는군요. 저를 으악 죽이는 게 고작해야 나의 출생입니까? 아까 왕자를 만났을 때 회장님에 대해 속으로 감탄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대화를 둘이서 나누니··· 솔직히 실망스럽네요. 더 대단한 분일 줄 알았는데. 그럼 제가 반대로 여쭤보겠습니다. 장은수 회장님, 당신은 뭘 가지고 있습니까? 당신의 출생을 제외하고 나면.”
나의 역공에 장은수 회장은 고개를 돌렸다.
내 눈을 피한 것이다.
“너··· 감히···”
아무도 없는 운전석을 향해 눈을 박아둔 채 장은수는 볼을 씰룩거렸다.
··· 아.
그의 그런 모습을 보자 갑자기 머릿속에 무언가가 번쩍였다.
사방으로 흩어져있던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
이제야 장은수가 나를 향해 왜 이리도 날을 세우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 이제야 알겠어.”
그래, 그랬구나.
“당신은 날 미워하는 게 아니군요. 날··· 겁내는 거야.”
순간 장은수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 내가 널? 정말 제정신이 아닌걸.”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겁나는 게 아니겠지요. 나를 보고 떠오른 누군가··· 그를 겁내하는 거지. 그 얼굴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날 부정하고 싶었을 테고. 그래서 유난히 자격에 대해 운운했겠죠. 내가 핏줄에 대해 말하자 유난스럽게 반응한 것도···”
장영복 회장.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바라보던 내 등 뒤의 거인은 다름 아닌 그와 나의 아버지였다.
퍽━
장은수 회장이 주먹을 운전석에 냅다 질렀다.
그의 그런 행동은 말보다 더 위협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방금 내가 한 말이 모두 맞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었다.
장은수, 당신도 아버지라는 존재에 얽매여 있는 사람이었군.
나와는 다른 의미로 말이야.
“한영수. 오늘 네가 굉장히 큰 실수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나?”
“서로 솔직해지기로 한 순간부터 실수쯤이야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도어트림의 손잡이를 잡았다.
이제 그만 이 차에서 내릴 요량이었다.
서로의 입장은 충분히 확인했다.
더 이상 그와 대화가 계속된다면 그건 서로 간에 유치한 감정싸움에 지나지 않으리라.
“도저히 내가 눈에 걸려서 어떻게든 짓밟고 싶다면 그렇게 하세요.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고 빌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대신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경쟁하세요. 회장님은 나보다 강자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강자로서의 품격을 보여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덜컥━
손잡이를 당기자 차 문이 열렸다.
다리 하나가 차 밖으로 나왔을 때, 내 뒤에서 장은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뭘 가지고 있냐고 물었지? 앞으로 보게 될 거야.”
··· 얼마든지.
당신이 거세게 퍼붓는다면 나는 거기에 맞춰 더 강해질 거니까.
나는 그의 말에 마음속으로만 대답을 했다.
뜻밖의 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