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대담 (2)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회장들은 일제히 고장이 나거나 전원이 꺼져버린 자동문처럼 입을 다물고 그저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미 앞다투어 경쟁하듯, 쓸 수 있는 언어를 모두 동원해서 자신들을 뽐내던 그들이었다.
12라운드를 풀로 뛴 복서처럼 모든 것을 쏟아낸 회장들은 더 이상 할 말도 없었을 것이다.
고로, 지금부터는 오로지 나와 아메드 빈 알리 왕자 둘만의 무대였다.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이런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알라께 맹세할 수 있습니다. 고왕 건설에는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귀사가 계속 승승장구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왕자의 목소리가 통역기를 통해 우리말로 바뀌어 고막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하지만’이라.
이건 내가 그에게서 기대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왕자가 감사하는 마음보다 우리에 대해 궁금해하길 원한다.
그러나 왕자는 내가 품고 있는 속마음과 정확히 반대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에메랄드 시티 프로젝트는 아까도 말했지만, 신께서 나에게 맡긴 원대한 사업입니다. 나는 당연히 가진 역량을 모두 동원할 겁니다. 우리의 파트너는 최고들로만 구성될 겁니다. 부디 이 말을 용서하시길··· 나는 고왕이라는 회사의 업적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감사하게 생각하기 있기 때문에 솔직하게 말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되고, 안되고를 확언할 수는 없지만, 너무 큰 기대가 미스터 한을 실망하게 할까 봐 걱정됩니다.”
두꺼운 붓펜으로 그린 듯한 왕자의 진한 속눈썹이 깜빡거렸다.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서 말하고는 있었지만, 정작 그의 태도에는 자신의 발언에 대해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래. 알고 있었다.
호텔 사건 하나만으로 모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왕자의 말도 틀린 것이 없다.
자칫 위태로울 수도 있었던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한 것은 김영남 부장과 오준호 대리의 공일 뿐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고왕 건설이 한 것이라곤 그들을 거기에 보낸 것밖에 없다.
벌레가 겹 날개를 부르르 펄럭이듯이 눈 밑이 떨려왔다.
보통 눈 밑이 떨리는 이유는 마그네슘 부족이 원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헬스에 진심인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일이다.
과할 정도로 마그네슘을 영양제로 보충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지금 내 몸의 이상 반응은 정신의 문제 때문이리라.
내 인생 최대의 영업이 될 지금 이 자리.
- 형은 원청에서 쏴붙여도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어요? 진짜 멘탈··· 크.
문득 아주 오래전에 김영하가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영하야.
나라고 어떻게 항상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있겠니.
다만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물러서기 싫을 뿐이야.
나는 눈을 감았다.
한영수. 담대해지자.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눈 아래 떨림이 멈춰있었다.
“2013년 고왕은 베트남에서 동남아 최대 길이의 현수교를 단독으로 세웠습니다. 2017년에는 터키에서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참여했구요. 국내에서는 주택 사업 외에도 올림픽 경기장을 비롯한 많은 건축물을 준공했습니다. 특히 70년대 대한민국에서 중동 건설 사업에 가장 앞장섰던 기업이 바로 고왕입니다. 상대적으로 작은 회사일지 몰라도, 건설로만 한 우물을 팠습니다. 기술력은 절대 뒤처지지···”
뒤처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려던 내 머리와 입은 빠르게 다른 단어를 찾아냈다.
“기술력은 절대 뒤처지지 않습니다.”
강한 확언으로 말을 마무리 하며 왕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의 말이 통역기를 거쳐 그에게 어떻게 전해질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때로는 입보다 눈이 더 진심을 전한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잘 들었습니다만, 미스터 한의 말인즉슨 최근에는 해외 수주 이력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70년대는 말할 것도 없고 2017년은 나에겐 아주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집니다.”
아메드 빈 알리 왕자의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사실이었다.
윤일중 회장의 고왕 건설은 그 시점부터 작은 우물에 안주하기 시작했으니.
오직 아파트와 수익형 건물에만 군침을 흘리며 말이다.
“이제 제가 고왕에 온 것입니다. 제가 CEO가 되었으니 달라질 겁니다. 고왕이 가진 기술력을 해외 시장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이미 회사 내부에서 방향은 모두 정리가 되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경영 방침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도, 마음도 없습니다. 하지만 미스터 한, 고왕 그룹은 그렇다 치고 미스터 한이야말로 경력이 불분명하다고 들었습니다.”
제기랄.
도하 호텔 건 말고는 고왕에 대해서 처음 들어봤다면서 이미 속속들이 알아보고 왔군.
내 옆의 회장들이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활짝 열린 동공의 그들의 눈에는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 오직 단 한 사람, 장은수 회장만을 제외하고.
왜 그들의 시선이 변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군요. 고려해보겠습니다.
오직 안면에 옅은 미소만을 띤 채 짧은 몇 마디 함께 고개만 끄덕이던 아메드 빈 알리 왕자다.
하지만 그가 처음으로 길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마치 소위 압박 면접을 하는 면접관처럼.
“오늘 여기에 오니 제 경력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는군요.”
나는 웃었다.
긴장이 풀리고 승부욕이 몸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뱃속에 활화산처럼 뜨거운 불을 내뿜는 화로 하나가 들어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늘 나는 반드시 저 왕자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겠다.
“물론 저는 여기 계신 회장님들에 비하면 젊고, 경험이 미천합니다. 하지만 그건 시간이 분명히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눈이 오지 않아도 언젠가 겨울이 올 걸 아는 것처럼. 실상, 지금 왕자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저의 빠른 성장의 증거 아니겠습니까?”
아메드 빈 알리 왕자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이번만큼은 내 말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제가 부족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궁금해하시니 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하자면 저는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항상 절박해야 했습니다. 가진 것도, 의지할 사람도 없었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절박했다는 건 삶에 대해 진지하고, 또 치열했다는 의미입니다.”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발음이 또렷해졌다.
내 말에 거짓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자리에 함께 있는 회장들에게 우여곡절이 없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가진 것이 많으면 잃을 것도 많은 것이 당연하기에 저들도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해왔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나의 삶의 단단함을 저들이 이길 수는 없다.
나에게 배고팠던 시절은 정말 하루하루가 생존과 직결되어 있었으니까.
이건 절대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다.
통장에 잔고가 똑 떨어져 고작 만 오천 원으로 일주일을 버텨야 했던 때.
나는 그 시절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담금질을 한 내가 저들보다 무를 리가 없다.
오늘 여기서 그 힘들었던 나의 과거는 무기가 된다.
“한 기업을 대표하게 된 지금도 변한 것은 없습니다. 만약 지금 왕자께서 한 인간에 대한 믿음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만약 그래도 제가 미덥지 않다면 고왕의 직원들을 믿어주십시오. 도하에서 큰 박수를 받았던 직원과 건설맨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회사를 끌고 온 그들을요.”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나는 분명히 보았다.
아메드 빈 알리 왕자의 고개가 작게 끄덕이는 것을.
“알라께서는 용기 있는 자를 사랑한다고 들었습니다. 저와 고왕은 용기 있게 도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감정이 조금 과했을까?
하지만 속은 후련했다.
나에게 아버지와 같은 분이 믿는 신을 등진 주제에, 여기 와서는 다른 신의 이름을 입에 올리고 있다.
우리 신부님이 항상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것도 하느님께서 눈 감아 주실까?
설령 그러지 않으신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책임져야 할 5,632명의 직원이 있다.
그때 왕자의 수행원이 그에게 다가가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
아메드 빈 알리 왕자가 나와 회장들에게 약속했던 시간은 이미 훌쩍 지난 지 오래였다.
* * *
“이거, 한 회장님. 배짱이 보통이 아니시던데요. 깜짝 놀랐습니다. 한 회장님이 하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박수를 다 쳤습니다.”
왕자와의 접견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LK의 김윤제 회장은 빵끗 웃으며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왕자는 헤어지며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나에게 볼 인사를 했다.
“알라께서는 정말 용기가 있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그것이 그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김윤제 회장은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모기만 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고왕이 에메랄드 시티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진심인 줄 몰랐습니다. 고왕 그룹이 아주 힘들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그렇게 위태위태한 기업이 국제적인 프로젝트에 도전장을 내민다는 것에 반신반의했었습니다.”
“숨길 것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에메랄드 시티야말로 제가 고왕을 인수한 이유입니다. 회장님 말씀처럼 상황이 좋지는 않지만, 살려만 놓으면 충분히 반전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김윤제 회장은 내 말을 듣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아까 들으면서도 느꼈지만, 확실히 승부사 기질이 보통이 아니군요. 저는 그런 사람들을 아주 좋아합니다. 여담으로 공채 시즌이 오면 임원들에게 가장 강조를 해요. 도전 정신을 첫 번째 조건으로 보라고.”
“감사합니다. 칭찬의 말씀으로 듣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김윤제 회장은 가뜩이나 낮췄던 목소리의 볼륨을 더 줄였다.
이제는 귀에 온 신경을 집중하지 않으면 그의 말이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마치 나와 함께 아주 은밀한 음모라도 꾸미겠다는 양.
“에메랄드 시티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함께 논의해 볼 것이 있을 것 같군요. 서로가 공생할 수 있는 길을 말입니다.”
공생?
너무나 다른 업계에 있는 그의 회사와 고왕이 공생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렇기에 정말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영역을 해치지 않으면서 이득을 나눠가질 수 있는.
하지만 몇 마디 말로는 김 회장의 진심을 전혀 알 수가 없었기에 나는 아무런 확답을 하지 않았다.
“그럼, 조만간 시간 한 번 내주시지요. 또 뵙겠습니다.”
애초에 나에게서 대답을 기대했다는 게 아니라는 듯 김윤제 회장은 빠른 걸음으로 나를 앞질러 갔다.
김윤제를 비롯한 회장들을 태운 엘리베이터는 진작에 아래로 내려가고, 그들과 좁은 공간에서 어색한 공기를 나눠 마시고 싶지 않았던 나는 다음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뚜벅뚜벅━
그때 내 뒤로 누군가의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걸음의 주인공이 결코 서두르지 않는 보폭으로 나와 거리를 좁혀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마침내 그 발걸음 소리가 정확히 내 옆에서 멈췄을 때,
“··· 한영수.”
이미 이 자의 정체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장은수 회장.
그는 정확히 내 이름을 불렀다.
한 회장 따위의 호칭이 아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따라서 지금 장은수 회장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잠깐 나와 대화 좀 하자고. 피차 하고 싶은 말들이 있을 테니.”
곧이어 엘리베이터의 도착을 알리는 차임벨이 머리 위에서 울렸다.
대담 (3)